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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연구소 ELBiS Club 아가 5. 여우를 잡아주세요(2,8-15)_ 1704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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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선약수
댓글 0 건 조회 4,285 회
작성일 17-04-1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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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우를 잡아주세요(2,8-15)_ 170403월

처음에는 여인의 몸이 달아 시작된 사랑이었으나 노래가 진행되며 임도 애가 타서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노루나 사슴처럼 힘차게 달려 여인의 집에 달려온 임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처럼 여인을 부릅니다. 산 넘고 찾아온 여인의 집 앞에서 창틈으로 기웃거리며 여인의 모습을 훔쳐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는 어서 일어나서 나오라고 속삭입니다. 어찌 보면 구질구질하게 여겨질 정도로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나오라고 합니다.

임은 계절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겨울이 지나갔고 장마가 활짝 걷혔으며 산과 들에 꽃이 피고 나무는 접붙이는 때라고 노래합니다. 한국의 기후를 생각하면, “겨울”과 “장마”를 함께 말하는 임의 이야기가 엉뚱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은 11월에서 이듬해 4월이 우기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겨울 장마”가 내리는 기간인 것이지요. 아무튼 임은 기나긴 겨울 장마가 끝나고 만물이 새롭게 약동하고 있으니 어서 나와 보라고 합니다. 바깥에 비둘기도 날아다니고 무화과는 푸른색을, 포도는 꽃향기를 뽐내는 아름다운 계절이니 어서 나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인은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니 단장하고 나오는 그 시간이 임에게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은 여인을 바위 틈바구니에 몸을 숨긴 비둘기에 비유하며, 모습을 보여 달라고, 그게 안 되면 목소리라도 들려달라고, 아니 빨리 모습 보여 달라고 횡성수설 애걸복걸합니다. 여인의 마음을 빼앗은 후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떠났던 그 나쁜 남자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낯선 모습입니다.

찰나와 영원 사이 어디쯤에 있을 시간이 지난 후 여인은 임이 그토록 원하던 고운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한데 생뚱맞은 이야기를 합니다. 포도밭을 짓밟는 여우를 잡아달랍니다. 아마 임이 원했던 말은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같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사랑의 밀어(蜜語) 대신 일종의 과업지시를 내립니다. 임의 간곡한 구애 앞에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밭을 짓밟는 새끼 여우떼를 잡아주셔요”라는 말로 대답합니다. 밀고 당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여우”에 대해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른 이미지가 있습니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의 전설을 공유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여우를 사람에 비유할 때 좋은 느낌으로 하지 않습니다. 여우라는 단어는 인간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존재라는 기분을 불러일으킵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는 구미호 전설은 없습니다만 우리와 조금 다른 의미로 여우가 부정적인 기분을 불러일으킵니다. 여우는 성벽을 허무는 존재(느헤미야 4:3)이며 포도원 울타리를 허물고 밭을 망치는 존재(이사야 5:4)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자리에 모여 사는 존재(예레미야 9, 10, 14, 51장)입니다. 구약성서 속 여우는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그 망가짐 위에 기생하는 존재입니다.

여인은 포도꽃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계절이니 어서 나와 보라고 말하는 임에게, 꽃이 한창인 포도밭을 망치는 여우떼가 있으니 그것들을 잡아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애가 달은 임을 자극하는 밀고 당기기 기술이 아닙니다. 여인은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을 망가뜨리려는 무언가가 있으니 그것을 제거해달라고 말합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우는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일 것입니다. 포도밭에서 일하느라 피부가 검어진 여인과 달리 지붕 아래서 편히 있느라 뽀얀 피부의 여인들, 잡목 속에 우뚝 솟은 능금나무처럼 위풍당당한 임의 주변을 맴도는 ‘여우같은 것들’을 멀리하라는 요청입니다.

겨울 장마가 지나고 생명력 넘치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도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을 떨구어내지 않으면 제대로 만나주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던 여인과 그녀를 품에 안아주던 임의 관계는 역전되었습니다. 아니, 역전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여인은 여전히 임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임이 문 앞에 도착하기 전부터, 자신을 만나기 위해 노루와 사슴처럼 산을 넘어온 그 굳센 달음질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까요.

- 홍삼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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