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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클럽 마가복음 5장 21절 43절 요약

작성일 2022-06-11 02:04 작성자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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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클럽 마가복음 5장 21절 43절 요약 220610

 

하나님나라: 부정(不淨)이데올로기를 넘는 부정(父情)으로

 

로마의 군대 통치를 경험하는 거라사 지방에서 사회경제문화적 모순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는 군대귀신 들린자를 고쳐 주심으로 이곳에도 하나님의 통치(나라)의 도래를 보여주시고 고침받은 사람을 두셔서(보내셔서) 첫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 후 다시 건너편 갈릴리 바닷가로 돌아오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큰 무리가 바닷가로 몰려 왔는데 그 무리 속에 기다렸던 사람들 특히 두 사람, 12살 딸이 죽게 된 지경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와 열두해동안 혈루증 앓아 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본문의 구조는 회당장 야이로와 예수님과의 동행기사(21-24절, 35-43절) 중간에 혈루증 여인 이야기(25-34절)가 끼여 있는 모양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 볼 때 혈루증 여인의 등장으로 인해 예수님이 지체하시는 상황은 상당한 스트레스와 긴장이었을 테고, 35절의 딸이 죽었다는 기별로 결정적 낙심의 큰 위기를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경험하였던 혈루증 앓는 여인의 치유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없는 상황, 즉 딸의 죽음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는 예수님의 권고에 반응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양쪽을 감싸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와 죽었다 살아난 그 딸의 이야기와 안쪽에 있는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의 회복의 이야기는 서로 이야기를 설명하고 더 깊게 만들어 줍니다. 두 이야기가 평행이론처럼 엮어져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소녀의 나이가 12살이었는데, 여인의 혈루증 앓은 세월이 열두 해입니다. 둘 다 여성이며 특히 “딸”이란 단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야이로가 소녀를 “내 어린 딸(23절)”이라 부른 것처럼 예수께서 그 여자를 “딸아”(34절)라고 부르셨습니다. 두 사람 다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는 데 여인의 경우 부정이데올로기로 인한 두려움이자 예수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회당장의 경우 딸의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에 대한 언급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두 이야기에 공히 “믿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셨고, 회당장에게 믿음을 독려하셨습니다.

 

이 두 사건 모두 공유하는 이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정이데올로기와 관련한 것입니다. 둘다 손(6회 사용)을 대거나 잡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혈루증 앓아 온 여인은 레위기 15장 25-30절에 의하면 부정한 자였습니다. 12년동안 부정한 자로 살아 왔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26절)”의 묘사는 정확하게 이 여인의 형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여인이 손을 대는 모든 사물과 존재는 부정한 것이 되는 이 상황이 예수께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숨기지 않으시고 뒤따라 오는 큰 무리 앞에서 공개하십니다. 그리고 이 부정이데올로기를 넘어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죽은 회당장의 딸의 시신을 가족이 아닌 사람이 만지는 것은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cf.레 21장).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고 일으키셨습니다. 부정 이데올로기로 인한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이 가져다 주는 부정 이데올로기 모두를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나라(통치)를 예수께서 보이시고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과 같이 이런 부정(不淨)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딸의 죽을만큼 병든 상황이 아니었다면 마을에서 나름 신분과 위치, 입장이 있던 회당장 야이로였기에 그동안 예수의 이적을 직접 보거나(cf.1:21ff,3:1ff) 자자한 소문에 노출되었어도 아마 이렇게까지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간곡히 청하”지는 않았거나 못했을 것입니다.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을 모신 회당장 야이로가 지체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딘 것도,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자들의 부정적인 입장(35절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이나 집에 있는 이들의 예수의 말씀에 대한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딸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 부정(父情)때문이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향한 애틋함이 결국 죽었던 딸을 살리게 했던 것처럼 부정한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시는 예수님도 부정(父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온전함, 건강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사회적 사망과 육체적 사망에 연결된 부정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가져오는 참된 동력입니다.

 

삶, 일, 구원 (3191)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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