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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엘비스클럽 마가복음 8장 11절 21절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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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2-10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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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클럽 마가복음 8장 11절 21절 요약 22120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과 함께 하는 여정중입니다. 따라오는 무리들을 피해 한 배 타고 갈릴리를 종횡무진 건너다니시고 귀찮게 시비 거는(11절)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을 피해 멀리 두로, 시돈을 돌아 데가볼리지방을 걸어서 움직이시는 동안 제자들은 곁에서 예수님과 늘 함께 하면서 모든 것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늘 보고 늘 들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심이 늘 다른 데 있을 때 그렇습니다. 자신의 분주함, 자신의 결핍으로 인한 맹목은 객관적인 사물조차 다르게 보고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해석공동체는 예수님의 답답해하는 심정을 느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적과 표적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분명히 이 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보고도 11절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마16장 상응본문에서는 바리새파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의 경우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구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이적들은 그저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의 이적들은 사회경제종교적인 엘리트들의 입장에서 별 감동이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 말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신박한 무언가를 내어 놓으라는 트집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11절에서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라고 표현합니다. 애시당초 시비를 걸 목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12절에 “예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고서 말씀”하십니다. 7장 34절에 같은 “탄식하시고”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데 이런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한계상황을 맞을 일이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위로가 되는 대목입니다. “이미 있는 표징을 표징으로 보지 못하는 데 무슨 다른 표징이 필요있겠는가?” 이런 뉘앙스가 12절의 탄식 후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일 것입니다. 더 말을 섞을 가치를 못 느끼셨는지 13절 바로 그곳을 떠나 건너편인 북동쪽 벳세다(21절)로 가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움직이십니다.

 

배안에서 또 예수님을 재차 답답하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조금 전 달마누다 지방에서 있었던 일에 근거하여 15절의 예수님의 선의의 경고의 말씀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수군거리는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14절은 그렇게 한 배경을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그들이 탄 배 안에는 빵이 한 개 밖에 없었다.” 제자들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곡해는 그들의 결핍 때문이었습니다. “빵”이라는 단어의 반복은 제자들의 관심이 빵자체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고, 그 빵을 준비하는 일에 대한(그동안 오병이어 이후의 연속되는 경험 때문에) 강박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다(16절)”란 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담고 있는 말이었기에 두 번이나 “아직도...깨닫지 못하느냐”(17절과 21절)라고 탄식에 가까운 서운함, 답답함을 표현하시게 된 것입니다.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17-18절)”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있는 감정은 느껴본 사람은 아는 감정입니다. 19절에서 20절은 지난 경험을 기억하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병이어와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이 그리 먼 기억이 아님에도 그들은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보고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 보았고 객관적인 대답을 다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결핍과 필요 자체에 집착하거나 혹은 과정(process) 그 자체에 매몰되어 버려 자신들의 일, 준비로 바쁘고 분주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무디어 진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마가는 바리새인이나 제자들이나 자신들의 아젠다에 맹목을 갖고 있다는 점을 동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해결방향은 다음 문맥에서 구체화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종종 우리들이 쉽게 그리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늘 사랑하고 감싸주시고 스윗한 예수님은 아니지만 감정을 보이시면서도 비인격적이 아닌(특히 오는 문맥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늘 인간으로서 우리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나 자신의 결핍, 나 자신의 애씀과 수고, 나 자신의 불안한 마음에 치우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스스로 모든 의미의 핵심에 도달하기에 불가능한 우리 자신의 모습들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가진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아직도 너희가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은 깨닫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지 단순한 자기감정의 표출이나 분노의 표출은 아닐 것입니다.

 

삶,일,구원 (3191)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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