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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연구소 ELBiS Club 고린도전서 1장 10절-17절 요약 1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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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건 조회 6,388 회
작성일 11-03-3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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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iS Club 고린도전서 1장 10절-17절 요약 110329

바로 앞 문맥의 밝고 경쾌한, 격려하는 분위기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뭔가를 안타까워하고 책망하는 듯한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글로에의 집에서 온 소식통에 의해서 고린도교회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로서는 가장 긴급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바로 이 나누어져(w/분쟁 3회) 있는 교회 공동체의 상태였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이 문제를 서슴없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12절에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심지어 게바와 그리스도에게 각각 속하였다 주장하는 자들로 교회공동체가 분쟁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파벌과 분쟁이 생기게 되었는 지를 13절에서 16절이 암시하고 있는 데 그것은 “세례”(6회)를 누구에게 받았는가 하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대해 엿볼 수 있는 사도행전 18장 24절에서 19장 7절을 참고하면 특히 이 문제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던 바울과 그 다음에 고린도 교회에 와서 교회를 가르쳤던 아볼로를 각각 추종하던 자 때문에 생기게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아볼로의 경우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 전 까지는 예수를 알고 있었지만 세례의 경우 요한의 세례(회개)만 알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에베소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로 아볼로가 옮기고 나서 에베소를 바울이 방문했을 때 아볼로의 영향을 받은 이들에게 바울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묻고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하였을 때 다시금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볼로와 바울은 서로 약간 강조점과 색깔의 차이가 있었던 셈이고 그래서 처음 바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이들은 바울을, 좀 있다 아볼로의 언변으로 영향을 받고 믿게 된 이들은 아볼로를 더 낫다고 하는 일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분열을 가속화하게 되고 그래서 당시 이곳 저곳을 아내와 함께 순회하고 있던 사도의 순서로 말하자면 저 앞에 있는 베드로를 좀 안다는 이들은 자신들을 게바에 속하였다고 하는 이도 있고 심지어는 아마 더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은 자신들이 더 본질에 가깝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고 주장하는 이까지 생겼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17절) 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10절) 세례(누구에게 세례를 받는가? 어떤 형식의 세례를 받는가?등)도 아니고 말의 지혜(어느 정도 고린도의 상황 즉 아볼로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회의 현재 상태를 의식한 듯)도 아니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을 최우선의 부르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울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세례에 대한 강조나 말의 지혜의 유무에 두는 것이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썼던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십자가의 다면적 의미중 오늘 본문과 연관되는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들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3-16).”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쟁과 원수됨의 상징이 아니라 화평과 하나됨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고린도교회의 이런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상황이며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emptied 공허하게) 만드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되지 않기 위해 공동체는 서로를 바울 자신이 그렇게 호칭하듯이 형제(brothers and sisters)로 이해하고 같은 말과 마음과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최근 “한기총 해체를 촉구하는 운동”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취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런 운동이 오늘 본문의 빛으로 볼 때 빠뜨리기 쉬운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하는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사속에서 항상 개혁을 부르짖는 입장은 자칫 또 다른 극단에서 한계를 배태하는 경우들이 늘 있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끊임없는 질문은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본래의 사명(missional)에 충실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비판을 하면서도 그들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마음, 온전히 합하려 하려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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