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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독 교회의 정치학 4장 교회의 정치학 5장 성의 정치학 (정리 홍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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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 건 조회 2,183 회
작성일 20-06-1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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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교회의 정치학_ 어떻게 벽돌을 쌓고 제자를 키울 것인가


“오늘날 교회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현대사회 내에서 우리의 자리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돌봄의 공동체가 됨으로써 그렇게 하려고 한다. 목사는 일차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된다. 그러한 문맥에서는 교회가 훈련 받고 훈련하는 공동체가 되려는 모든 시도가 돌봄의 공동체가 되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 결과, 교회가 제공하는 돌봄은 대개 아주 인상적이고 긍휼이 넘치는 반면, 교회가 대치한 권세에 맞설 수 있는 공동체로 세우기 위한 근거는 결여되어있다.”(p. 129)


“부름받은 교회는 이제 자발적인 교회가 되었고, 그런 교회의 일차적 특정은 회중이 친근하다는 것이다. (…) 그러한 친근한 태도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교회의 성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는 아주 불분명하다.”(pp. 128-129)


“교회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인생의 위기를 잘 통과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섬김을 제공하는 일은 훌륭하게 해내지만, 이것은 단지 교회가 우리 문화에서 사적영역이 되었음을 보여준다.”(p. 131)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자기 이해의 범주 및 그것과 상관있는 돌봄에 대한 인식으로 이해할 때, 교회를 훈련 공동체로 보는 인식을 회복할 길이 사라진다는 점이 두렵다.”(p. 132)


“짧게 말하면, 교회에게 현대성의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훈련된 공동체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다.”(p. 133)


“그러나 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보다 더 순응주의적인 메시지는 생각할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단호하게 말해야한다.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 대부분은사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훈련된 정신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이다. 교육적 중심 과제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아직 뭔가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사고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이 중요하다. 훈련은 권위에 순종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사람들에게 이성적 판단을 위해 필요한 덕을 가져오기 때문이다.”(p. 134)


“벽돌 쌓기를 배우려면 그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그 일을 구성하는 여러 기술을 배워야한다. (…) 벽돌을 쌓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벽돌을 쌓아 보아야 한다.”(p. 138)


“이 모든 것은, 누군가 조적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선임(master) 기술자가 그를 조적 기술의 세계로 입문시켜 주어야 함을 가리킨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조적 기술의 개념을 현대 민주주의의 전제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앞에서 쓴 것처럼, 민주주의가 옹호하는 윤리 해석은 스승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도덕적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 각자가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p. 139)


“매킨타이어는 현대성에 반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졌든 상관없이 똑똑한 사람에게 도덕적 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p. 140)


“기예의 비유를 통해 도덕적 삶을 살펴볼 때, 우리는 우리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왜 스숭이 필요한지 알게 된다. 기예의 공동체는 그 기예의 효율적이고 창조적인 참여자가 되려면 습득하고 배양해야 할 지적이고 도덕적인 습관을 구현하는데, 스승의 권위는 바로 그러한 기예의 공동체라는 토대 위에서 받아들여진다.”(p. 143)


“기예가 훌륭한 상태에 있으려면, 훌륭한 질서를 갖춘 전통 안에 존재해야 한다. 기예에 입문하는 것은 그 전통에 입문하는 것이다.”(p. 144)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교회와 무슨 상관인가? 첫째, 이는 기독교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더하기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우리가 믿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부름 받은 것 때문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혹은 변화된 자기 이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일련의 다른 관습을 가진 다른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다.”(p. 145)


“(…) 기도를 배우기 위해서는 물론 반드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필요한 여러 규율을 배워야 한다는 의미다.”(p. 146)

5장 성의 정치학_ 결혼은 어떻게 전복적 행위인가


“이 보고서의 작성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결혼과 성을 연결시키는 전통적 가톨릭의 주장을 재고해야할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p. 154)


“이 보고서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단지 내가 성적 행동에 대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폭넓게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아주 명확하게 말해 주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성을 윤리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하는 경우 그 일차적 사안이 성의 표현이 ‘건강한 대인 관계’에 도움이 되는가라고 추정한다.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유일한 문제는 우리의 성적 표현이 사랑의 표현인가다.”(p. 156)


“가톨릭신학협회의 보고서에 반영된 성 윤리가 인간의 성을 증진하는 행동 패턴을 분별함으로써 결정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는 정치를 반영한다. 특정 공동체의 지향점이나 목적과 별개로 논의될 수 있는 ‘인간의 성’이라 불리는 어떤 분리된 현상이 있다는 가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그러한 가정은, 성이 근본적으로 사적이며 개인적인 문제라고 추정하는, 그리하여 근본문제는 성적 행위가 성취감을 주는지 그리고 비강제적인지 여부라고 추정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전제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독신이나 결혼과 같은 관습과 관련해서만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기독교 전통의 추정은, 자유주의 정치 그리고 그것과 상관관계에 있는 국가권력에 대해 전복적일 수 밖에 없다. 정말로, 모든 인간관계가 계약적이라고 배우는 세계에서, 평생의 헌신을 믿는 사람들보다 더 위협적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p. 159)


“(…) 성행위는 일차적으로 낭만적 사랑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러셀]의 주된 주장 (…)”(p. 160)


“(…) 여전히 러셀이 제시하는 문제는 유효하다. 성적으로 우리의 삶이 파괴적인 힘을 위해 사용되기보다 생명을 가져올 수 있으려면, 우리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형성 되어야 하는가?”(p. 166)


“나의 의도는 로마가톨릭의 회칙 전통이 성과 결혼에 관해 말하는 것 전부를 변호하려는 게 아니며 다만 그러한 전통, 특히 『그리스도교 혼인에 관하여』(Arcanum Divinae Sapientiae, 1880)가 그 논지를 적어도 옳은 틀 안에서 다루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즉, 누군가가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가족의 본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왜 국가가 아닌 교회가 결혼에 대한 일차적 관할권을 주장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p. 167)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결혼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 차이가 결혼 관계에 들어가거나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대인 관계의 질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결혼의 본질 및 기독교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에서 결혼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는 방식에 있옴을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이 결혼으로 성립하기 위해 쌍방 간에 사랑이 존재해야한다고 요구하는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적어도 사랑이 서로 좋은 감정을 느끼는 심리 상태로 이해되는 경우에는 그렇다.”(p. 168)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결혼과 가정이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 불리는 보다 결정력 있는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사용된다고 믿는다. 그 자체가 목적인 가정은 가정과 결혼을 개인에게 보다 파괴적이게 만들 뿐이다.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을 때 가정은 유사교회가 되며, 부당한 이유로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게 된다.”(p. 168-169)


“사실 결혼과 가정에 대한교회의 양면성은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는 종말론적 신념에서 기인한다.”(p. 169)


“(…) 독신은 우리가 생물학적 작용이 아닌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기억하게 해 주는 교회의 본질적 실천이다. 간단히 말하면, 독신은 우리가 생물학적 귀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종종우리의 생물학적 자녀로 판명되는-에 대한 증언과 환대를 통해 자란다는 것을 교회에게 상기시켜 준다.”(p. 170)


“대조적으로, 가정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형성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른 이들에게 줄 선물로 빚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섬기도록 부름 받았고 그 섬김은 독신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결혼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p. 171)


“독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소망을 구현한다면, 결혼과 가정은 우리의 인내를 형성한다. 소망이 반드시 독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덕목이 아니듯, 소망은 가정에 제한되지 않는다. 특히, 일단 기독교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이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부모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음을 인식하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창조주에게 반역을 일으킨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한 삶을 기뻐하심을 알기 때문에 자녀를 낳고 환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의 사회에서는 자녀 출산과 양육이 사적 영역으로 후퇴해버렸지만, 자녀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실천임이 드러난다.”(p. 17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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