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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아버지: 기독교 복음의 핵심 재발견, 톰 스매일, IVP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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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건 조회 4,431 회
작성일 08-10-0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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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수단이라고 말한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의 질문은 성부/성자간의 관계의 의의, 위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시와 구원의 수단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 계시와 구원의 내용인가?

성육신교리의 지속적인 적절성과 실제 필요성에 대한 이 논의가 교회의 삶과 선교의 미래를 형성할 만큼 현대신학의 중심에 있다.


기능적 기독론으로 충분한가?(문제제기)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전통적 공식에 불만족을 표하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기능적 견해를 학자들이 이야기 함, 즉 예수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보이시고 행동하신 것처럼 기능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주고 구원의 사역을 하시는 수단이며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신적인 존재와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기능적 기독론

이것은 칼케돈 종교회의의 결론인 복잡한 기독론에 비해 단순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칼케돈의 기독론(양성교리)은 철학적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한 기독론이 복음의 핵심을 파괴하면 너무 큰 대가를 요구한다는 쓰라린 교회사적 경험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분은 무엇을 하셨으며 어떤 분인가?

H.E.W 터너의 말 “작용은 존재에 뒤따른다”-기능적인 것이 기독론의 최종 목표로서 존재론적인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동사가 있으면 주어가 있어야 한다.


Part I.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장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물어보는 것으로 논의를 출발함

불트만, 현대의 주석가들-기능적 주해, 뜻과 목적과 행동에서 일치한다는 뜻으로 이해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비난(33절)

복음서 도처에서 예수님과 아버지의 뜻과 목적과 행동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배후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사이에 존재의 하나됨이 있다는 개념이 있으며, 예수님이 요한복음 10:30에서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행동의 하나됨을 위한 기초로서 바로 그 존재의 하나됨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 이유는 세가지이다. (1)영감과 성육신 (2)속죄와 예수님의 신원 (3)성자와 성령


(1)영감과 성육신-하나님(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성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은 영감을 받았지만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의 인겨과 동일한 것이 된 것이 아니어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공식은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라는 독특한 것이었다. 선지자들처럼 사람들이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를 보도록 하지 않고 예수님은 자신이 마땅히 하나님의 권위를 시행할 권리가 있는 분으로서 그 권위를 시행하신다. 요한의 I am(ego eimi) 진술도 마찬가지이다. 부활후 도마의 고백(나의 주 나의 하나님 마20:28)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그리고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인식을 명백히 나타낸다. 제자들이 예수를 큐리오스(Kurios)라고 불렀던 것은 엄격한 유대적 유일신론으로 양육된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들이 따랐던 예수와 그분을 보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동일시한 것이었다.

결론은 복음은 단지 기능적으로 영감을 받은 예수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성자로서 성부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분을 요구하다는 것


(2)속죄와 예수님의 신원(identity)

화해 행위자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십자가에서의 속죄 행위가 화해시킬 수 있고 효과적일 수 있고 창의적일 수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가?

세상의 필요가 덜 긴급하다고 본다면 기능적 기독론과 계시적 속죄(의미론적 신비주의)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얼마나 강력했는지..(quantum ponderis peccatum) 이것을 위해 성부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내셔야 하며 그러므로 단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성자 하나님안에서 행하시는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3)성자와 성령

성령충만한 탁월한 자 기독론(성령기독론)에 대한 논평-신약은 거의 일관되게 ‘프뉴마’를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이것은 신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동일한 분으로서 성령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성부하나님이 하신 일을 행하는 분이시며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Filioque)


요약및 결론: 신적 행동은 신적 존재를 요한다

예수님의 권위의 본질,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효율성, 성령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단순히 그분의 행동을 포함하는 기능적 관계가 아니라 또한 그분의 존재를 포함하는 존재론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볼 것은 요구한다. 작용은 존재를 암시하며, 동사는 적절한 주어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선재하심

요한복음과 히브리서의 서론에서 보는 선재교리-그리스도 안에서의 재창조는 창조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전제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성자를 획득하신 것이 안라 성자는 그분 자신의 존재와 본성의 ‘독생자(monogenes)’였다. 우리가 그분에게 신적인 이름을 부여하고 주(퀴리오스)라고 고백했을 때 우리는 그저 처음부터 암시되어 있던 것을 명확히 설명할 뿐이다.


성자와 삼위일체

호모우시오스(homousios)-내재적 본질적 삼위일체론(삼위일체 교리)은 복음위에 철학적 신비를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성경적 복음안에 암시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적 복음에 가해지는 철학적 공격들(아리우스주의나 양자론, 양태론과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변호하기 위함이다.


복음의 핵심부에 있는 성부-성자관계

이 관계의 본질이 다른 모든 것을 결정한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부/성자 관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성부와 이 성자는 이 성령안에서 모든 것의 창조주, 유지자, 구속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부의 자녀로서 이 관계로 입양되기 때문에 이 기본적인 새로워짐이 삶의 다양한 정황내의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광범위하게 경험되어야 한다.


Part II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신적 순종?

신적 권위를 공유하시고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시지만 성자는 두 번째이며 성부가 첫 번째이시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14:28)

우리가 인간 예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관계는 모범적인 경건한 사람이들이라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신적 정체성이 있는 분이라면 우리의 질문은 “한 하나님이 명령하고 동시에 순종할 수 있는가?”이다(바르트).


이에 대한 두가지 부정적 대답의 시도

1) 성자종속설은 예수가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기능적 존속은 존재의 열등함이다라고 주장) 아리우스주의-호모이우시오스(homoiusios)에 대한 대답->

아타나시우스-호모우시오스(homousios) 존재의 열등함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은 모두 하나이고 영광은 동등하며, 엄위는 영원히 공존하다..” 기능적 종속이다. 하나님 자신이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 그분의 성육신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분의 은혜의 기초이다. 철학교실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서 배운 하나님 교리가 필요하다.

2) 순종은 성자 하나님이 아닌 인간 예수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행동과 속성들을 그분의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서로 다른 원천들에 속한 것으로 칼빈은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분의 신성과 격리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이 그리스도 외의 다른 곳에서 배운 것으로 결정된 것이 아닌가 하고 물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순종하신다

성육신에 나타난 겸손과 순종은 이미 영원부터 성자안에 있었다. 손종과 복종은 이 세상에서나 하늘에서나 예수님의 아들됨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종합요약

신적 성부와 신적 성자의 관계가 시간속에서 그리고 영원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과 방법의 중심이다. 모든 새롭게 됨의 의미는 성령안에서 성부 하나님을 아바, 성자를 주님이라 고백하도록 그 관계안에 통합되어야 한다. 성부에 대한 성자의 관계의 특징은 순종이다. 순종은 그저 피조물에게 주어진 법칙이 아니라 창조주의 삶의 기초다. 하나님은 높아질 뿐 아니라 낮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 성육신과 속죄의 기초다. 성자의 순종은 성부가 은혜를 내리시는 그리고 교회가 감사를 드리는 수단이며 순종은 모든 자녀를 성부께 묶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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