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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1-20 (생명의 떡 예수님과 함께하는 충만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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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4,929 회
작성일 09-06-18 07:12

본문

생명의 떡 예수님과 함께하는 충만한 기쁨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먹고 사는 문제를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십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이론으로 해결되는 부분이 아니라 너무나도 실제적인 일상 그 자체인 것인데,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한 실물교육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생명의 떡이며, 우리에게 참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실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등 많은 표적을 행하시자 이 표적을 본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한 무리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 있는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큰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렇게 물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무리들을 먹이는 문제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시는 방식도 '어디에서', '떡을 사서' 사람들을 먹이겠는가라고 구체적인 방안을 말씀하시며 빌립에게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계산이 빠르고 명민했던 빌립은 곧 떡을 사서 먹일 경우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떡을 사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계산하고 사람들의 수를 계산했지만 그 질문을 하는 예수님의 의도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안드레는 한술 더 떠서 한 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시하며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람들을 잔디에 앉게 한 다음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사람들의 원대로 주심으로써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서에서와 달리 제자들에게 명하여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도록'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대로 12 바구니에 남은 조각이 찬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 곧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메시야가 자신들의 먹을 것을 책임져 주시는 임금이라고 오해하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도 표적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따랐고 지금 갈릴리에서도 육체적인 만족을 주는 표적에 혹하여 예수님을 따르고 임금 삼으려 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의지하지 않으시고 홀로 떠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빌립에게 어디에서 떡을 사서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일까요? 단순하게 사람들의 일시적인 배고픔을 채워주시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계산상 떡을 사서 먹일 수 없다는 것을 증거를 했고, 안드레는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어려움에 대하여 예수님께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떡을 사서 먹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이 질문을 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시험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참되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이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빌립에게 질문을 하셨을 때 예수님이 원하신 정답은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얼마를 가지고', '떡을 사서', '먹일 것인가'라는 고민 속에서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제자들은 상황을 보고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안식일을 주관하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망각했습니다. 그들은 외부적으로, 그리고 그들 자신이 떡을 구할 생각을 했지만 그들과 함께하고 있는 분이 떡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우리는 어디에서도 떡을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어디에도 가지 않고 오직 우리와 함께하시는 당신만을 의지하며 당신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6장 32-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요, 따라서 예수님께로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의 떡을 주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배부름을 주신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참 떡이신 예수님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심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디로 가서 떡을 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과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늘 먹을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식으로 믿고, 예수님을 마치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자로 따르며 임금을 삼으려고 하기 보다는 참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유가 생명의 떡이 되셔서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선물을 주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마치 우리의 육체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표적을 행하시는 분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 되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 그 자체로 만족하며 충만히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먹는 문제로 시작하셔서 예수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떡이시며, 금새 먹고 사라지는 떡, 잠시 배부름을 안겨주고 더 큰 허기를 만들어내는 세상의 식물이 아니라 영원히 주리지 않는 참 떡이십니다. 그분을 매일 먹고 그분의 생수를 매일 마시는 우리는 얼마나 복된 것인지 그 기쁨을 회복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늘 먹는 것과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여기기에 늘 허기진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먹을 것을 찾고 구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예수님의 신통한 능력이 먹을 것과 재물을 주시기를 구하기도 합니다. 마치 표적을 따라 다니던 무리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면 예수님을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신 임금으로 삼았다가도 우리의 삶이 곤궁해지면 예수님을 망각하고 버리기 일수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주리지 않고 싶다면 예수님께로 나아오라고. 그 어디든 가서 구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저 무력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참 생명의 떡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먹을 것과 재물의 많고 적음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늘 충만한 기쁨을 소유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과 함께 사는 것.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번째 사건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로 오십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서 배로 영접하고 가버나움 땅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일으키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접한 직후 잠시 예수님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풍랑과 두려움이 엄습하여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 위로 오셔서 제자들의 배에 임재하시자 그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재와 임재는 이처럼 제자들의 인식 속에서 분명한 차이로 각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야말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쁨이며 이 기쁨이 두려움을 물러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곧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나 사람을 의지하여 이 항해길을 갈 수 있다고 여기고는 하지만 참으로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길이야말로 기쁨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무리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고 있습니까? 우리의 눈을 떠서 생명의 떡이 되시고, 우리의 참된 기쁨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분을 더욱 알도록 기도하며 간구합시다. 다른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갑시다. 떡이 아니라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구하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살아갑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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