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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 요한복음 5장 1절-18절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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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9-06-2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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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 요한복음 5장 1절-18절 요약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야, 세상의 구주등 여러 호칭으로 남으로부터 평가(?)를 받은 예수님이 5장부터는 스스로 일련의 행동을 하시고 그 행동에 근거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주장하시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다) 그리고 이 자기 주장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인으로부터 핍박과 살해의 위협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얼마 전 2장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을 청결케하는 일을 하신 후 유대 근처에서 제자들과 함께 세례를 주는 등(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사역을 하시다가 바리새인들을 피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에 수가성에서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고백을 들으신 후 가나에 계시는 동안 가버나움에서 온 왕의 신하의 청을 듣고 그 아들의 병을 원거리에서 고치신 일이 있은 후에(1절 그후에) 다시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아마도 유월절에서 49일이 지난 칠칠절, 맥추절쯤 될 것 같음)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이번에는 성전쪽이 아니라 성문(중 양문)어귀에 있는 병자들(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자등)이 모여 있는 냄새나고 지저분한 할렘촌 베데스다(은혜,친절의 집)쪽으로 가십니다. 그곳은 가끔 물이 동하는 것은 천사가 내려와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낫게 된다는 속설이 파다한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낳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이런 속설 자체가 placebo 효과를 주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38년동안이나 거기에 누워 있던 병자에게 다가 가십니다.

 

38년동안이나 병으로 오래 누워 있던 이 병자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시는 질문에 동문서답처럼 자신의 오랜 숙원을 늘어 놓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오랫동안 이 사람은 병의 노예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헛된 희망의 노예가 되어 아마도 자신의 신세를 한하고, 자신보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이런 현실을 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질병의 치유의 근원이 되시는 분의 질문앞에서 푸념을 늘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 병자는 그 오랜 병 때문에 덕지덕지 문드러진 자신의 자리라도 그 삶에 요긴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쌍하고 가난한 이는 자신의 자리를 챙겨 걸어갔습니다(그러나 여기에는 4장과는 달리 그 어디도 믿음에 대한 언급이 없음).

 

그러나 가엽게도 이 사람은 병에서 놓임을 받았으나 다시금 유대 종교 system의 굴레에 빠지게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내 한 사람의 치유와 그로 인한 기쁨을 자기변명과 불안, 두려움으로 바꾸고 맙니다. 고압적으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안식일 이데올로기로 이 사람에게 도전합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잠시 38년동안의 지긋지긋하고 누추하고 가난한 병상의 삶에서 해방된 기쁨이 이내 다시금 자기보호의 두려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병상에서 남탓하던 사람이 다시 예루살렘 종교 시스템속에서 남탓을 하게 됩니다.

14절이하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얽어매고 있는 이 종교 시스템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하여 굳이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셔서 자신을 노출시키시고 이로 인한 안식일을 어겼다는 핍박앞에 “내 아버지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굳이 유대인들이 보기에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시는 것 같은 발언을 하십니다.

 

유대교든 이슬람이든 단일신론에 근거한 종교는 쉽사리 강력한 종교 시스템과 율법주의적 태도를 지니기가 쉬워서 사람들이 그 아래서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억압과 두려움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기초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종교시스템이 아니라 관계속에 우리를 두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신 예수님의 권고속에 수많은 종교시스템속에서 처음에는 기쁨을 발견하나 다시금 더 심한 것에 종속되고 죄의 노예가 되는 많은 불쌍한 사람들을 향한 자비, 친절, 은혜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죄는 행위의 문제 이전에 관계의 문제입니다. 죄를 행위의 문제로만 보게 하고 관계의 문제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율법주의의 핵심이며 단일신론적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신앙은 율법주의와 종교시스템이 아니라 관계속에 있는 자유와 기쁨을 줍니다.

 

이제 19절 이하에 펼쳐질 예수님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진술(삼위일체신앙의 핵심)에 기대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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