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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Experiencing the Trinity) Summer School 제2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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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열정이
댓글 0 건 조회 4,091 회
작성일 09-07-2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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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Experiencing the Trinity) Summer School
<일상, 종말, 삼위일체>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Surprised by Hope 강독 2009,7,16

2장 낙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다?

희망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혼란
스캇 홀랜더의 설교문에서 한 부분을 떼어내어서 인용하는 문단이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사용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이 주장들은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인은 “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으므로, 실제로 죽음이 왔다고 해서 그것을 그렇게 끔찍하게 여겨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는 죽음 너머의 삶을, 현재에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개인의 성화가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내용은 모든 죽음이 가져오는 실재적이고 잔인한 단절과, 생명이 가진 선함을 부정하는 죽음의 잔혹함을 그 본문은 사실대로 말하려 하지 않는다(45).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확고한 태도는 성 바오로 성당의 수석 사제였던 존 던을 통해 볼 수 있다. 죽음은 대단한 적이지만, 그것은 정복되었고, 결국에는 온전하게 다 정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중요하다. 죽음은 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짓밝힌 적이다.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죽은이후의 삶을 두 단계로 본다. 첫 번째는 짧은 잠, 그 다음은 영원한 깨어있음이다. 더 이상 죽음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죽음이 그냥 새롭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정복된다는 것이다(46-47).

전통적 기독교의 입장은 초기 신조들에 표명되어 있다. 그 신조들 자체는 신약성경에 의존한다. 그러나 내가 속한 교회에서는 날마다 그리고 매주 우리가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고 선언하지만 실제로 그런한가? (47)

어떠한 선택들이 가능한가?
죽음에 대한 반응은 양극을 오가는 추와도 같다. 한 쪽은 죽음을 먹이를 추적하는 끔찍한 적으로 본다. 죽음이 적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패배당할 것이라는 확고한 선언과 결합되어있다. 그 반대 극단은 죽음을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려고 오는 친구로 제시하면서 죽음의 타격을 완화하고자 했다. 이처럼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사상은 죽음을 야비한 적으로 보는 것과 좋은 친구로 보는 것 사이를 오갔다(48-49).

전통적 기독교는 구원 받은 혹은 복 받은 사람들이 가게 될 위에 있는 천국과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게 될 아래에 있는 지옥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 왔다(49).

그러나 사실상 성경은 ‘사후 천국행’에 대해 말하는 바가 거의 없다. 지옥행에 대해서도 말하는 바가 많지 않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경에 ‘천국’이라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그것을 구원받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라고 생각하며 자란다.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운명을 일컫는 말도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오해의 뿌리는 매우 깊다. 특히 기독교 사상 전체의 영향을 미친 플라톤주의의 잔재는 사람들을 오도해서, 그리스도인은 현재 세상과 현재 우리 몸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하고, 그것을 초라한 혹은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51).

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은 현재의 실재를 그린 것이다. 즉 우리가 사는 현재 삶 가운데서 천국의 영역을 그린 것이다. 성경에 말하는 천국은 미래의 운명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다른 영역, 숨겨진 영역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영역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마지막에 그 둘을 다시 만드셔셔 영원히 연결시키실 것이다. 계시록 21-22장에서 나오는 실재 종말의 그림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하늘과 땅을 영원히 감싸며 결합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52).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천국이라는 단어를 궁극적 종착지, 최종적 ‘고향’을 일컫는 적절한 용어라고 그냥 생각하고, ‘부활’의 언어 그리고 새 하늘뿐만 아니라 새 땅의 언어도 어떻게든 그 안에 끼워 맞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52).

지난 세기 역설적인 현상은 지옥을 부인하는 자세가 확고해지면서 역으로 천국에 대한 확신은 약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이 죽음이후에 ‘여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경이나 초기 기독교 사상이 전혀 보증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옥이라는 하는 옛 이론이 근대적인 형태로 더 다듬어진 모양새로 나타났다. 연옥 즉 죽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창조자를 만날 준비가 덜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빛을 향해 성장해 가는 정화의 시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여러가지 측면에서 혼란은 우리가 치르는 장례식이나 화장식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찬송가
존 케블은 불교의 종말론에 잠시 빠져있다.
=> 당신의 사랑의 바다에 빠져 위에 있는 천국에서 우리 자신을 잃을 때까지.
 
존 헨리 뉴먼은 영지주의적인 구절로
=> 이제까지 당신의 권능이 내게 복을 주셨으니, 앞으로도 나를 인도하리,
     광야와 늪을 건너, 험준한 바위와 급류를 넘어 나를 인도하리, 밤이 지나갈 때까지.
     아침이 오면 천사들이 웃으며 나를 맞이하리.
     오래 전부터 사랑했으나, 잠시 잃어버렸던. 그 천사들이.

“나와 함께 하소서” 노골적인 플라톤주의 (한글 찬송가 531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 하늘의 아침이 열리면, 땅의 헛된 그림자는 도망가리

그 맑고 환한 밤 중에 라는 성탄 캐롤은 역사의 순환이라든가 궁극적으로 황금기로 돌아간다든가 하는 사상은 기독교적인 것도 유대교적인 것도 아니고 확실히 이교도적이다.

   찬송가와 마찬가지로 교회력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성인의 날과 위령의 날을 보내는 것은 더 이상 천국을 확실히 믿지도 않고 아마 지옥도 분명히 믿지 않는 , 그리고 두가지 보다는 좀더 온화한 형태의 연옥을 선호하는 교회, 그러나 육체의 부활, 새 창조, 하늘에서의 땅으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는 교회의 혼란을 반영한다. 성탄절 자체가 이제는 교회력의 핵심인 부활절보다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바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60).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혼란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매장보다는 화장을 선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암묵적 신학에 대해서 한 마디 해야겠다. 물론 위생과 토지 과밀의 문제 때문에 지난 세기말에 개혁가들이 이러한 제안을 하게 되었지만 정통 유대교와 이슬람교 뿐 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도 여전히 화장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화장은 전통적으로 힌두교와 불교의 신학과 더 연관이 있다. 새로운 육체를 얻어서 살아가게 될 미래의 삶이 있음을 확신 있게 단언하지 못하고 창조계 속으로 다시 융합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61). 물론 나는 화장이 이교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에 우리 문화가 그런 방향으로 크게 움직인 것은 교회와 이 세상의 혼란이 어느 정도는 반영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장례식 자체만 두고 보더라도 혼란은 여전히 나타난다. 영국국교회에서 발간된 장례예식 책자 가운데 아쉬운 것은 책 전체를 통틀어서 부활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62).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과거의 전례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확실하고도 견고한 소망’이 아니라 결국 어떻게든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하는 모호하고 애매한 낙관주의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느냐가 다른 모든 것의 모양과 색채를 결정한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죽음과 부활은 더 이상 놀라움으로 다가 오지 않고, 현재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의 부활에서 비롯된 것도 아닌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지도 않는 그러한 희망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67).

  혼란이 지닌 더 큰 함의들
  무덤 이후의 삶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상에서 직면하게 되는 더 큰 이슈들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하는가?
  새 창조의 일부로서 부활을 믿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확고한 교리를 보면, 현재의 세상과 우리의 현재 육체에 더 많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유대교와 전통적 기독교에서 이 교리는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세상 사이에는 불연속성뿐 만 아니라 연속성도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그 결과 현재에 우리가 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68).
  
   전통적 기독교 교리는 플라톤화된 교리보다 실제로 훨씬 더 강력하고 혁명적이다. 부활은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이 선한 창조자라는 확고한 관점을 수반했다. 이 한 쌍의 믿음은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한 온순한 묵종이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확고한 결의를 불러일으킨다.

핵심 질문들
1. 우리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가?

2.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갖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3. 이 주제 전체에 대한 기독교적 사고의 출발점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인데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세대의 제제자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왜 그들이 그 사건으로부터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 당시의 세계가 죽음이후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고대 세계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무엇을 믿었는지를 살펴 볼 것이고, 예수님 당시에 번창했던 부활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이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4. 그렇다면 이 세상 전체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독교의 궁극적 희망은 무엇인가?
     - 이 우주 전체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 예수님이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 육체의 부활과 영원히 사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5. 이러한 특별한 희망을 지금 우리의 현실과 문화에서 어떻게 적절하게 축하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 희망에 따라 
살 수 있는지를 묻는다. 특히 이 세상에서 교회가 감당해야할 사명과 과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극적 미래에서만이 아니라 좀 더 가까운 미래에서는 그러한 ‘희망’이 어떠한 모습을 가질 수 있는지, 또 거기에는 어떠한 놀라움이 준비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이 책 전체는 “나라가 임하시오며...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님의 기도를 그대로 반영하고자 했다. 이 기도는 첫번째 부활절에 강력하게 응답되었고, 새 예루살렘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완전히 응답될 것이다. 부활절은 희망이 몸소 미래에서 현재로 잠시 들어옴으로서 이 세상 전체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궁극적인 미래의 희망은 여전히 놀라움으로 남아 있다(73). 현재 주어진 우리의 임무는, 부활 백성으로서 첫 부활의 징표가 되고, 마지막 부활의 예견이 되면서, 함께 그리고 따로 예배하고 선교하며 마지막 때까지 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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