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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Experiencing the Trinity) Summer School 제4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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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9-07-2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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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ETT(Experiencing the Trinity) Summer School

<일상, 종말, 삼위일체>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Surprised by Hope 강독 2009.7.16

4. 부활절의 특이한 이야기

선례가 없는 이야기들

4복음서의 부활절 이야기는 서로 불일치한다. 그러나 그러한 불일치는 무언가 놀라운 일이 있었음을 짐작케하는 합리적 징조다.(107면)

4복음서가 공유하고 있는 다음의 특징들에 주목하면 부활절 이야기가 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초기에 전해진 것임을 수용하게 된다.

(1) 부활 이야기에서 성경의 인용과 암시와 반향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는 그 이야기들이 후에 기록되기는 했지만 상이한 이야기꾼들의 기억 속에 형성되어 자리를 잡은 아주 초기의 구전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들이라고 보는 수밖에 없다.(109면)

(2) 주요 증인으로 여자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자들은 고대 세계에서 신뢰할 만한 증인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므로, 부활 이야기는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야기이다.(110면)

(3) 부활한 예수님이 정상적 육체를 가지며 그 몸이 변형된 몸이라는 결정적 징후들(잠긴 문을 통과하는 등)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이는 전례가 없었고, 어떤 성경 본문도 부활이 이와 같은 육체를 포함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누가와 요한의 이야기가 가현설에 대항하기 위해 1세기 말에 기록된 문서라는 생각에 종지부를 찍는다.(111면)

(4) 부활 이야기가 미래의 기독교적 희망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도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복음서에서 부활은 현 세상적이고 현 시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따라서 그분이 메시아시다, 따라서 그분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분의 추종자로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전령이 되어 그분의 주되심을 온 세상에 공표하고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게 해야 한다!(112면) 만약 부활 이야기가 1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바울처럼)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최종적 부활을 언급했을 것이지만 그런 언급은 없다. 그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12-113면)

이상의 결론은 부활 이야기들이 바울 이전의 이른 시기의 것이며, 실질적으로 변경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점이다.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다.(113면)

부활절과 역사

예수님과의 만남과 빈 무덤이 반드시 있어야 기독 신앙의 발생 이유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기록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인지적 부조화 현상’(사람들이 무엇인가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지만 그것에 반대되는 증거가 확실하게 있을 때, 그 반대되는 자료를 무시하고 오히려 더 요란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선언하는 현상)이 초기 기독교의 현상을 설명하지는 못하며 이 이론 자체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117면) 또한 이런 설명은 제자들이 역사의 중간에 예수님이 온전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117-118면)

또한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초기 제자들의 은혜 체험과 그들의 지도자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부활은 새로운 종교 체험에 대한 은유가 아니었다.(118면)

여기에서 초기 기독교의 부활사건 설명과 경쟁 관계에 있는 주장들을 살펴보자.(119면)

1. 예수님은 사실 죽은 것이 아니었다(죽은 것처럼 보이는 약을 먹었다).

→ 대답 : 로마 군인들은 사람 죽이는 법을 알고 있었고, 약에 취한 예수를 보고 그가 죽음을 정복하고 자신의 나라를 시작한 것이라고 속을 만한 제자는 없었다.

2. 여자들이 무덤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예수님으로 착각했다.→ 대답: 그들은 곧 알아챘을 것이다.

3.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다. → 대답 : 도마와 바울은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며,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 사후에는 그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

4. 우리가 가진 기록들에 편견이 있다. → 대답 : 모든 역사, 저널리즘도 마찬가지다.

5. 순교자에게 “그가 부활할 것이다”라고 한 것이 “부활했다”로 와전되었다.→ 대답: 그렇지 않다.

6.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직후에 그에 대한 환상을 보듯 제자들도 그러했다.

→ 대답 : 그들도 그런 일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현상을 일컫는 언어도 갖고 있었다.

7. 제자들이 일종의 풍부한 ‘영적’ 체험을 한 것인데, 그것을 유대교의 범주 안에서 해석한 것이다. 영적 의미로 말하면 예수님이 정말 살아계셨고, 그들은 계속해서 그분과 접촉할 수 있었다.

→ 대답 : 이는 플라톤주의적 불멸성을 표명하는 것일 뿐이다. 부활은 죽음을 좀 더 좋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정복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부활은 죽고 난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일어나는 일이지 죽음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한편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했다는 믿음을 지지하는 논거들 중 세 가지만 언급하겠다.(121면)

1. 순교자의 무덤은 성지가 되곤 했는데 예수님의 무덤은 그렇지 않다.

2. 초대교회가 한 주간의 첫째 날을 특별한 날로 정한 것은 그날 놀라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설명하기 어렵다.

3. 제자들이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을 위해 고난받고 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빈 무덤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확실한 자료가 되었다. 이는 제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빨리 그 이야기와 신앙이 자라났는지를 유일하게 설명해 준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최고의 역사적 설명은 예수가 완전히 죽었다가 정말로 새로운 육체를 갖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일이 정말 일어났다면, 그 자체로 역사의 중심으로 간주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식론의 중심, 즉 우리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아느냐의 중심으로 간주되어야 한다.(123면)

그 누구도 역사적 논증만으로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믿도록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논증은 회의주의의 덤불을 치우는데 효과적이다.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주장은 초기 기독교의 중심에 있는 역사적 자료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났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는 유추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추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역사에는 단 한번만 일어난 그럴듯하지 않은 일들이 많다.(124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곳에서도 때때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의 한 사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상적으로 기대하지 않는 일들을 역사적 증거가 보여 줄 때 역사가들은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하는가? 역사가가 어떤 종류의 자료가 등장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125면) 그리고 그 지점에서는 철저히 반복되는 결과가 보여주는 증거가 너무 크기 때문에 과학자이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과학자의 입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과학적’ 입장은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는 것일까? “과학자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두 단계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이 탐구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방법을 통해 어떻게 알고 믿을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과학적 지식에 헌신한 사람은 삶의 다른 영역에 대해 어떤 종류의 헌신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과학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부활’이 과학자의 관심 영역을 침범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게 던져지는 질문인 것 같다. 마치 누군가가 “과학자는 태양이 하루에 두 번 뜰 수도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126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앎’의 세 번째 요소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과학을 넘어서는,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유추해야만 이해가 되는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역사’를 넘어서는 당혹스러운 영역이다. 때로 인간은 명백하게 거절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일 경우 자신의 세계관을 개조할 수밖에 없는 무엇과 직면하게 된다.(127면)

예수님의 부활은 초기 기독교 발생에 대한 답변이 됨과 동시에, 역사가와 과학자의 세계관에 이러한 도전을 던진다.

이 도전은 사실상 새 창조의 도전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이나 신학자 못지 않게 역사가와 과학자에게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 안에서 일어난 아주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이제 시작되는 세계 안에서 일어난 매우 특징적이고, 원형적이고, 토대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옛 세상에서 일어난 부조리한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상징이자 시발점이다. 예수님은 단지 새로운 종교적 가능성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 혹은 구원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128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 연구를 더 큰 인간적 맥락, 개인과 집단 모두의 복합적 맥락 안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은 역사가와 과학자 뿐만 아니라 어떤 세계관 안에서 익숙하게 사는 모든 인간에게 도전이 된다.(130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창조와 정의의 하나님을 허용하는 세계관과 허용하지 않는 세계관 사이의 충돌이다.(130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단지 존재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정의와 진리의 하나님-앞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을 열고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창조 세계 안에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조 세계 안에서 결국 무엇이 정말로 가능한지를 볼 수 있도록 생각과 마음의 창을 여는 자세다. 역사는, 정말로 빈 무덤이 있었고, 정말로 예수님을 목격하는 사건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러고서 역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131면)

도마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비유가 될 것이다. 그는 훌륭한 역사가처럼 보고 싶어하고 만지고 싶어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만져보라고 청한다. 그러나 도마는 만져 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고자 했던 앎의 방식을 초월하여 더 높고 풍요로운 앎의 방식으로 들어간다.(132면)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역사에 반하는 진술이 아니다. ‘주’는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이신 바로 그분이면서 또한 새로운 역사의 창시자이다. 일단 부활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에 대한 유추와 그 순간을 준비시키는 유추가 이스라엘 역사에 가득함을 알게 된다. 과거에 하나님이 하셨던 위대한 행동의 네러티브도 그 인식론을 지탱한다.(133-134면)

이는 또한 과학에 반하는 진술도 아니다. 새로운 창조의 세계는 말 그대로 새로운 창조의 세계다. 그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은 청지기로서 그것을 더 잘 섬기고 그것이 의도된 대로 풍성하게 열매를 잘 맺을 수 있게 한다.(134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초월하지만 또한 포함한다.(134면)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무엇이 나타났거나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아도 해결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 중 하나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더 큰 전체 안에서 자신이 알던 것을 포함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도마가 받든 도전이다.(135면)

도마가 역사적․과학적 앎을 초월하면서도 포함하는 믿음의 인식론을 대변한다면, 바울은 희망의 인식론을 대변한다. 고린도전서15장에서 그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창조의 일부로서 미래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로마서 8장에서 말한 우주 전체의 구속이 있을 것이라는 논증을 펼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긍정적 사고나 맹목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앎의 방식인데, 그 방식 안에서는 새로운 일들이 가능하고, 선택도 가능하고, 새로운 창조도 일어날 수 있다.(135면)

한편 도마가 새로운 종류의 믿음으로 부름받았고, 바울이 근본적으로 새롭게 된 희망으로 부름받았다면, 베드로는 새로운 종류의 사랑으로 부름을 받았다.(136면)

부활을 믿는 것은 사랑이다.(비트겐슈타인) 부활은 예수님과 함께 탄생하게 되는 새 창조 세계의 결정적 사건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앎이 필요하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시키는 앎, 객관적 자세로 연구함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는 인식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인식론을 잘 요약한 말이 ‘사랑’이며, 요한이 말하는 온전한 의미의 ‘아가페’다.(136면)

이런 설명은 부활절의 진리를 주관주의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믿기 위해 사랑이 필요한데, 사랑은 사랑하는 자 외부에 존재하는 상호 관계적 실재를 필요로 한다. 사랑은 가장 깊은 앎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실재에 완벽하게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실재를 확인하고 축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근대적 인식론이 무너진다. 사물은 객관적으로 사실이거나(따라서 관찰자에 의해 지각될 수 있거나) 아니면 주관적으로 사실이거나(따라서 실재적 공공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는 쓸모가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 ‘객관’과 ‘주관’의 진부한 반정립이 사랑의 인식론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공 세계, 부활절에 시작된 세계, 예수님이 주이시고 카이사르는 주가 아닌 세계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 필요한 앎의 방식은 바로 사랑의 인식론이다.(137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인식론을 부활절의 진리를 주장하는 궁극적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모든 앎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믿음, 소망, 사랑의 앎뿐만 아니라 역사적 앎과 과학적 앎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138면)

나오는 말

회의주의는 결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의 부활을 원치 않았던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회적, 지적 압제자와 폭군들이었다. 압제자의 마지막 무기인 죽음 자체를 패배시킨, 이 세상의 주라는 존재에 대해 위협을 느낄 카이사르와 같은 자들, 헤롯과 같은 자들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일은, 1세기에 일어난 오래된 사건을 연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에 다시 희망을 발견하는 문제가 된다.(139면) 희망은 다른 세계관-부자와 권세 있는 자와 부도덕한 자가 최종적 발언을 하는 세계관이 아닌-이 가능하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을 때 생겨난다. 예수님의 부활이 요구하는 이러한 세계관의 전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전환이기도 하다.(14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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