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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Experiencing the Trinity) Summer School 제6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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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건 조회 4,860 회
작성일 09-08-1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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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

들어가는 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진보’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꾸준한 영향으로 인해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61)

그들은 이원론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하신 일을 이 우주 전체를 위해서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 세상 전체가 그 미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162)

희망의 근본적 구조

두 개의 대립되는 관점에 대해 성경이 어떠한 해답을 주는지, 특히 우리는 세 가지 주제가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162)

첫째는, 창조의 선함이다. 초기 기독교가 이원론 우주론(창조 세계를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특징이다. 이 세상이 선한 것은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자연’으로서가 아니라 창조물로서 선한 것이다. 창조는 처음부터 사랑의 행위였고 타자의 선함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창조계 자체가 신적인 것은 아니었다. 범신론에는 악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둘째 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162-163)

둘째는, 악의 성질이다. 성경 신학 안에서 악은 실재적이고 강력하지만 피조성이 곧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부패할 수밖에 없고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이 곧 악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조계는 선하다. 하지만 창조계는 언제나 지향하는 바가 있었다. 변화무쌍함은 하나님이 주신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데, 이 이정표는 물질적 세계에서 비물질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이원성(현재의 시대와 앞으로 올 시대)이지 존재론적 이원론(악한 ‘땅’과 선한 ‘천국’)이 아니다.(163-164)

그렇다면 악은 피조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 대신에 그 어떤 부분들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반항적 우상 숭배에 있다. 인간은 그들에게 권력이나 쾌락이라는 단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어떤 것을 예배하려고 한다. 그 결과 선한 창조의 자연스런 변화의 일부였던 죽음이 두 번째의 영역을 얻게 되는데, 성경은 그것을 ‘영적죽음’이라고 부른다.(164)

셋째, 구속의 계획이다. 창조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처럼 구속 역시 그 창조의 주체가 기쁘고 즐겁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면서 하게 되는 일이다. 구속의 요점은 ‘노예로 속박된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고 성경은 악이 물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항에 있다고 분석하기 때문에, 인간과 이 세상이 속박되어 있는 원인 역시 악이 형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이란 궁극적으로 영이나 혼의 선함만이 아니라 새로운 육체를 입은 삶도 포함할 수밖에 없다.(165)

예수님의 오심(성육신)은 모든 창조물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이 된다.(골로새서 1:15-20 → 이것이 바로신약성경의 진정한 ‘우주적 기독론’이다)

구속은 창조계를 손상시키고 왜곡시키는 악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진, 처음과 동일하신 그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다. 골로새서 1:23 본문에서 바울이 “이 복음은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일어난 일이 결코 복음을 믿어 현재와 그 이후에 새로운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온전히 보거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영향은 우주의 깊은 곳에까지 다 미친다.(167)

이제 기독교적 희망의 우주적 차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핵심본문(6가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파종과 추수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첫 열매’라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유월절에는 보리의 첫 수확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 그로부터 칠 주 뒤에 오는 오순절은 밀의 첫 수확을 바치는 시기였다. 첫 열매를 바치는 행위는 앞으로 있을 큰 추수를 상징한다.(168)

바울은 이 유월절의 이미지를 예수님에게 적용시킨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한 첫 열매이다. 첫 열매의 요점은 그 뒤로 더 많은 수확이 뒤따르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유월절, 즉 갈보리와 부활절은 실제로 유월절에 일어났고 아주 초기부터 그 축제에 비추어 해석되었는데, 죄와 죽음자체가 예수님이 죽음의 홍해를 지나 반대편으로 건너가셨을 때 패배 당했음을 암시했다. 특히 이 이야기를 통해 상징화된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은 순전히 은혜의 행위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진보’만으로는 결코 그런 일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168-169)

2.승리의 전쟁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분명히 새창조의 신학을 말하고 있다. 이 우주 전체에 있는 모든 세력, 모든 권위가 메시아에게 굴복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죽음 그 자체가 자신의 권력을 내놓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우주의 항시적인 상태라고 간주하고 싶은 것들(엔트로피, 위협적인 혼돈 그리고 붕괴)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시는 메시아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이 부활절에 예수님을 위해서 하신 일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리라 우주 전체를 위해서 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죽음은 선한 창조의 선한 일부가 아니라 최후의 적이다.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주로 높임을 받기 위해서는 죽음이 반드시 패배당해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에만 이 세상의 주이신 메시아 예수가 그 나라의 통치권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넘겨드리고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시게 될 것이다.(170)

3.하늘의 시민-땅의 식민화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빌립보 전쟁(BC42)와 악티움 전쟁(BC31) 이후에 퇴역 군인들을 그 곳에 정착시켰다. 식민지를 만든 의도 첫째는, 로마의 영향력을 지중해 주변으로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수도 과밀화 현상을 피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은퇴한 군인들이 피 묻은 손으로 한가롭게 로마를 돌아다니며 문제를 일으키는 것 보다 다른 곳에서 사업을 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따라서 바울이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인생이 끝난 후에 천국에 가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구원자, 주, 왕이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으로 와서 사람들의 현재 상황과 상태를 바꿀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변하게 하다’(transform)이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바울이 에베소서 1:19-20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성취해 낸 것과 똑같은 위대한 권능으로 우리의 현재 몸을 변하게 해서 예수님과 같은 종류의 몸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171-172)

4.만위 안에 계실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바울이 모든 역사의 목표로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라”(15:28)라고 선언하는 부분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시제는 미래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창조계를 자신의 존재와 사랑으로 채우시고자 한다.(173)

이사야11장은 65-66장의 ‘새 창조’ 본문을 예견하면서 선지자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이 우주를 자기 자신으로 덮어 버리고자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우주와 이 세계 전체가 자신의 사랑을 위한 저장소로 고안된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넘쳐나고, 흠뻑 젖도록 도안되었다.(173-174)

이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불완전하다. 언젠가 반항의 모든 세력이 패배당하고 나면 그리고 창조계가 그 창조주의 사랑에 자유럽게 그리고 기쁘게 반응하게 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 그 세계를 채워서 그것이 하나님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로 머무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넘쳐나게 하실 것이다.

5.새로운 탄생

로마서 8장에서 새로운 탄생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현재 창조계가 마치 이스라엘 자녀들처럼 노예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21절) 창조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받을 때까지, 즉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의 모든 백성에게 일어날 때까지는 무익함과 변화무쌍과 부패에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창조계 전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날, 그들의 부활이 창조계 자체의 새로운 생명을 알리게 되는 그 날을 갈망하고 학수 고대하고 있다.(175)

그 다음에 바울은 해산의 고통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는 것에 대한 유대교의 친숙한 은유다. 그는 교회의 산통, 성령의 산통, 창조계의 산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다시 한 번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를 강조한다. 바울이 논증의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선택한 이 은유는 그가 창조계의 파괴나 그저 그것의 꾸준한 발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옛 창조의 자궁으로부터 새 창조가 격력하고도 극적으로 탄생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음을 보여준다.(176)

6.하늘과 땅의 결혼

이번에 사용되는 이미지는 결혼이미지(계시록 21-22장)다.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해 치장한 신부처럼 하늘에서 내려온다.

빌립보서 3장에서처럼,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온다. 실제로 교회 자체가, 천국의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온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주기도문에 대한 최종적 응답이다.

하늘과 땅은 결국 극과 극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천국의 자녀들이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출되고 난 후에 서로 영원히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부패할 수밖에 없는 옛 하늘과 옛 땅을 대체한다. 이것은 내가 계속해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쓸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그들 사이에 거하시면서 그 도시를 자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그 도시로부터 흘러나와 전 세계로 퍼져가는 생명의 강에 은혜와 치유를 부어 주실 것이다.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새 세상에서 맞이하게 될 미래에 대한 징표가 여기에 있다.(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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