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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ETT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1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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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0-04-1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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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100413

 

본문의 첫 두절은(22-23절)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언급을 통해서 배경을 만들어주며 전하려는 메시지를 이미 어느 정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수전절(the festival of the Dedication)은 막카비 시대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정결케하고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거니시던 “성전 안 솔로몬 행각”은 몇 번의 성전의 개축에도 불구하고 그 원형을 보존하여 남아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때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대한 언급은 당시 이 성전중심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그래서 헤롯의 성전을 막카비처럼 정치적, 군사적 해결책을 통해 깨끗하게 하고 민족의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24절)” 유대인들은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자신들의 욕구가 투영된 이미지의 메시야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5절에서 30절까지 그들에게 분명하게 자신이 어떤 메시야인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말”과 “행하는 일들”로 이미 증거를 보여주었지만 너희가 믿지 않을 뿐이다라고 사실을 말씀하시고 나서 두가지 선언을 하십니다. 첫째로 너희는 내말을 듣고 따르지 아니하므로 내 양이 아니다(26절). 둘째로 내가 아버지의 생명, 만물보다 크신 이의 생명, 곧 영생(28절)을 주고, 아버지 손에서 양들을 빼앗을 수 없듯이 내 손에서 그 양들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30절)이다 라고 주장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자신이 동등됨을 주장하자 메시야를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단일신론적 패러다임에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돌을 들어 즉결처분하려고 드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미 8장 59절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자기 주장할 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예수님이 비슷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죄목은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 한마디로 신성모독, 참람죄입니다. (33절) 유대인들은 이제 정확히 예수님의 주장의 본질을 보게 되었지만 이것은 그들의 이념, 생각과 너무나도 배치되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위기의 예수님은 유대교가 기대고 있는 율법에 기대어 일단 즉결처분의 위기를 넘기십니다. 시편 82편 6절의 말씀인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자신을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라고 주장하십니다. 거룩은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여기에서 거룩은 세상에 보내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아마 이 사실을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성전중심의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주장을 받아 들이지 못할 뿐 더러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논박을 하신 후 체포하려는 유대인들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요단강 저편으로 가서 거하십니다.

 

40절이하 42절까지는 절묘한 형태로 그 앞부분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중심부 예루살렘과 그 속에 있던 성전(건물)중심의 체제유지적 사고를 지닌 유대인과는 달리 이곳은 주변부 갈릴리인들 특히 요한의 신생(emerging) 종교개혁 운동에 이미 노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41절) 이들은 어설픈 신학적 지식과 체제유지를 위한 단일신론적 이데올로기보다는 말의 증거를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같은 진리를 대하지만 다른 반응의 대조가 명백합니다.

 

제도와 안정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언제든지 우리가 빠질 수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아는, 진정한 거룩과 경건을 회복하는 것은 어떤의미로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가 어디에 착념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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