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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톡톡크리스찬 #77 교만(2010년7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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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8,958 회
작성일 10-07-2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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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회 방송파일은 방송국 사정상 제공해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부산 CBS 방송 -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2010년 7월 5일 방송분 준비

주제 : 7가지 죄악 "교만"

* 자료 발췌 및 참고 자료
신원하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 윤리학 교수)
그말씀 2003. 11월호과 기독교 사상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

▲ 모든 죄의 어머니 "교만"
  7가지 죄악이라는 전통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 그리스의 수도자 에바그리오 도 폰토에 의해 처음 체계화되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이 목록에 ‘질투’를 포함시키고, 기존의 ‘교만’과 ‘허영’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17세기에 이 목록은 다시 수정을 거치게 됩니다. 교만은 라틴어의 Superbia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 오만, 자만심, 거만함, 무례함의 의미를 가진다. 국어 사전의 뜻으로 교만은 겸손함이 없이 잘난 체하여 방자하고 버릇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이 교만의 죄는 일곱 죄의 목록 중 첫 번째에 나오는 죄이다. 이는 모든 죄의 최우선적인 죄요 모든 악이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교만은 모든 죄의 어머니라고 했다. 또한 C. S. Lewis도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는 죄라고 했다. 성경도 인간 불행과 비참함이 교만에서 연유되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사탄이 하늘의 영화로운 세계에서 떨어지게 된 것도 교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실낙원의 비극을 맞게 된 것도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교만으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신학자 중 라인홀드 니버는 교만을 인간 존재가 지닌 이중적 성격과 연결시켰다. 니버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함, 한계 그리고 불충분성의 성격을 지닌 피조물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인간의 유한함을 초월하는 영원, 불멸에 대한 의식과 조명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영혼을 소유한 자로서 이성 지식을 지니고 자기 결정의 힘과 육신의 유한함을 초월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즉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유한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자기 초월의 능력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이다. 니버는 인간의 이런 이중성이 불안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는 유한과 불충분성으로 불안전감을 갖고 불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가능한 선택이 있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의탁함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다른 방향은 자신이 지닌 자기 초월의 힘을 확장하여 불안을 스스로 극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유한함을 벗어나 자신의 운명과 세상을 주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후자의 방향으로 유혹을 받고 선택하게 되는데, 니버는 비록 인간의 이중적 성격이 죄의 원인으로 작용될 수 있지만, 결코 필연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교만 즉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위치를 벗어나 자신을 높은 자리로 높이려는 의지 때문에 인간은 범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의 예 : 바리새인과 세리
성경 누가복음 18장 9-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자기 의에 가득 찬 자라고 정죄하시면서 그들의 교만을 신랄하게 비판하신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인은 유대사회에서 경건하고 존경 받는 인물들이었다. 율법적으로 발버둥 치는 사람이었다. 그 반대로 세리는 도덕적으로 유대 민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따돌림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의 모습과 내용을 살피는 본문이다. 결국 예수님은 의로운 사람이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세리라고 말씀하신다.

▲ 영적 교만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교회 성도들이 독특한 교만인 영적인 교만을 가지고 있다. 그레고리 교황은 영적인 교만이 지닌 폐해의 심각성 때문에 이것을 신자들에게 경계할 것으로 가르쳤다. 그는 영적 교만이란 마치 화살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보았다. 세이어(Dorothy Sayers)는 예수님이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위선을 지적하고 경고한 사실과 이유를 부각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학, 전통, 유전으로 인해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었다. 그 영적인 교만을 3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첫번째는 신앙적인 교만이다. 특히 저기 교단을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야, 우리가 바로 바른 신앙적인 유산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말할 때, 그리고 교회와 목사님에 대한 자부심등이 때로는 교만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른 교회나 교단을 낮게 보고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상처와 거부감을 줄 수가 있다.
두 번째는 지적인 교만이다. 토니 캄폴로 교수  신대원 시절 설교실습 시간에 동료들에게 너무 설교를 잘했다고 아낌없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지도교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토니, 당신은 한편의 설교에서 예수께서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심을 확신시키는 일과 당신이 탁월한 설교자임을 동시에 심어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을 듣고 토니 캄폴로 교수의 말씀 사역에 시금석으로 삼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교만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영적인 교만이다. 기도생활이나 전도를 많이 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하는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신앙생활을 통해서 영적인 독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생활, 구제생활, 헌금생활, 전도생활 등 규칙적으로 경건 생활을 잘 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동료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 교만의 특징과 결과
1.교만은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바로 깨닫지 못한다.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남을 속이지도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힘들지만 나의 수입의 일부를 떼어서 구제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뿌듯하게 생각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의가 자아에 가득 차서 정작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인가를 깨달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교만은 자신의 실상을 왜곡시키고, 자신의 잘못에 눈을 감게 만드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2. 교만은 다른 사람을 잘못 판단하게 하고, 나중에는 정죄하는 죄악을 범한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보다 한수 위라도 생각했다. 그는 세리를 자신과는 대조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로 정죄한다.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 정말 제가 얼마나 바르게 사느냐를 알기 원하신다면 바로 저 밑에 있는 저 냄새나는 세리를 보시지요!” “물론, 저에게도 약간의 흠은 있습니다, 그러나, 저 놈에 비하면, 나는 백로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데 저 놈은 한번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껴 쓰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 저 놈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등쳐 먹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미 하나님께 세리와 비교해서 자신의 의로운 점들이 부각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나타내며 동시에 세리의 잘못을 알다. 교만은 항상 다른 사람의 흠을 찾습니다. 자기 자아가 그의 삶의 중심과 온 우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수용하기가 힘듭니다. 또 교만은 모든 사람을 경쟁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된 것, 우수한 것을 봐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깎아 내리려 하고 그래서 자기보다 뛰어난 점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이웃과 동료를 잃게 된다.

3. 교만은 하나님께로 오는 은혜를 차단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아버립니다. 하나님은 자고하고 목이 뻣뻣한 바리새인이 아닌 자기의 비참함과 비참함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아는 세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결국 교만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교만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의 창문을 닫게 만든다.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판단과 평가는 분명합니다. 자선 행동과 몇몇 덕목으로 옷 입은 바리새인은 결코 주님으로부터 의롭다 하는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자신의 파선된 상태를 알고 주 앞에 얼굴을 감히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고 엎드려 주의 긍휼만을 바랐던 세리가 주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 주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은 이 비유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9절)에게 하셨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낮아지는 사람의 본을 보여 주신다.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1.죽기까지 자신의 목숨을 주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겸손을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겸손이 미덕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겸손만큼 강력한 덕목이 없다. 종의 형체를 입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낮아지신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이셨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피조계의 모든 존재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빌 2:9~11).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높이 들어올림을 받으셨던 주님과 그 겸손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교만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한다.

2.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앎으로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나의 자아의 주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왕이시다. 전능한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장엄함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고 더러운지를 깨닫게 된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져도 고기를 잡지 못했으나 주님의 명령대로 한 뒤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되자, 즉시 예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눅 5:8)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전능과 거룩함을 보고 대면하게 되면 인생은 자신의 비참함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참된 겸손은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의 더러움과 추악함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현실의 문제를 헤쳐나갈 수 없는 자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겸손하게 되는 것이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묵상하자. 자연으로 나갈 때마다 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식하자. 눈을 들어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버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우리의 왜소함을 느껴보자 그럴 때, 우리 인간들은 진정으로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한 자로 자라가게 될 것이다.

3.우리의 관심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돌려보도록 노력해야한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미국의 유명한 윤리학자이었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인간의 죄악이란 바로 자기 중심성(self-enteredness)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런 자기 중심성의 죄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한다. 관심을 자기에게서 외부로 돌려 한다. 우리의 격려가 필요한 이들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 많다. “주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힘과 에너지를 돌릴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을 주시고 그런 성품으로 빚어 주십시오!” 라고 주님께 간구해야한다.

▲ 맺으면서
  기독교 전통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가르쳐왔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생활이 자신의 죄악됨과 비참함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겸손한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이 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자신을 하나님의 거울 앞에서 바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웃 성도들과 동료의 귀함을 인식하고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로서 격려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교만을 벗고 겸손하여져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능력을 날로 덧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문 발췌)

제 목을 꺾어 주소서

 _이호빈 1898-1989, 목사, 강남대학교 설립자

아버지,
주제넘은 못된 교만의 목을 꺾어 주시고
비둘기 같은 겸손한 자세로,
죄인의 괴수로,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가장 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권세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올라가던 사울의 목을 꺾어 길바닥에 넘어져
눈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새로 창조해 주신 아버지시여,
이 교만덩어리의 자식들이 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인간의 생각으로 보아도
저희는 감히 머리를 들 수 없는 것들이 아닙니까?
백성으로 백성 구실한 것도 없고,
자식으로 자식 구실한 것도 없고,
부모로서 부모 구실을 한 것도 없습니다.

이러면서 뭐 잘났다고 뽐내고,
나는 너보다 낫다고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목을 꺾어 주시옵소서.
당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당신이 직접 주시는
성령의 생명을 받게 해주시옵소서.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 김영봉 엮음,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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