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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9월 일상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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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건 조회 7,299 회
작성일 11-09-0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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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 회중시계 속의 시간 선물

이병철 / 연세대 사학과 강사, IVF 6070 학사회 

  
  나날이 최첨단 기술이 생활양식을 바꾸고 삶의 내용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도 그중의 얼마를 누리기도 하지만 이 세대를 주도하는 수많은 기술의 유행들에서 대체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내 소유로 된 휴대전화나 신용카드나 자동차 없이도 잘 산다. 편지를 자주 쓰고, 지갑 속의 현금 한도 내에서만 물건을 사고, 걷는 데 익숙하다. 이러한 것이 없어서 생길 불편함보다도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더 많이 누리고 있다. 나는 구식을 더 좋아한다.

   내 일상의 구식 도구 중에 시계가 있다. 몸에 소지하고 다니는 시계는 일반적으로 손목시계다. 그리고 요즘의 시계는 모두 건전지의 힘으로 작동을 한다. 그러나 나의 시계는 이 두 가지 모두에 속하지 않는다. 손목시계가 아니라 끈이 달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회중시계에다가, 이른바 “밥”을 주어 바늘들을 움직이는 태엽시계다.

   골동품 같은 구식 시계를 스스로 마련해서 지니고 다닐 용기와 계기가 내게는 없었다. 나도 보통의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며, 그냥 마음속에 갖고 싶은 품목만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작은 꿈이 이뤄지던 어느 날까지는 그랬다.

   나는 긴 공부를 마치고 학위수여식이 있던 날에 우리를 아껴주었던 몇 분을 그 자리에 초대하였다. 독일대학에는 졸업식이 없다. 가운도 학위모도 없고, 아주 조촐한 수여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감사와 감격은 조금도 반감되지 않는다. 이 감사의 자리에 나는 두 교민부인과 두 형제를 초대했다.

   간단한 식에 상응하여 감사한 마음만 나누고 싶었는데, 그날 나는 이 분들로부터 귀한 선물들까지 받았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회중시계였다. 한 교민부인이 건네준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 거기에 있다니! 아,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 뒤로 이 금색 회중시계는 지난 10년 간 내 왼쪽 바지주머니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한 번 태엽을 감아주면 하루 조금 더 가는 이 시계에 나는 매일 아침 “밥”을 준다. 그 일을 잊으면 영락없이 이틀 쯤 뒤에 밥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멈춰버린 배고픈 시계를 만난다.

    아침에 시계에 태엽을 감아주는 일은 나에게 오늘 하루의 시간이 누구의 것인가를 다시 각성시키는 엄숙한 순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계에 밥을 주어 오늘 하루 시간의 흐름을 표시하도록 바늘들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시계를 작동시킬 때, 그때 시간이 생기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시간이 먼저 있었고, 시계는 그것을 계기판에 표시할 뿐이다. 나도, 시계도 시간을 만드는 자가 아니다. 아침을 맞을 때 나는 하루의 시간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시간이 이미 있기에 내가 있고 하루가 있다.

    시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인 창조세계 속의 한 보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날마다 이 시간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내가 오늘 하루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시간을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를 사는 목적은 이 시간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나는 이 구식 회중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선물로 받는다. 그것은 즐거운 시간수여식이다. 시계에 먼지가 끼어 아예 멈출 때 이제는 이 구식 태엽시계를 고쳐줄 동네 시계방이 없다. 첨단기술의 유행은 전문가들에게서도 구식의 지식을 앗아간다. 그러나 시간의 의미와 출처를 되뇌는 즐거운 작업을 내게서 빼앗지는 못한다.

나는 오늘도 시계태엽을 감으며 하나님의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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