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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제자도, 1장 불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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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8,924 회
작성일 10-07-0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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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 자료 / 정리 : 정한신

존 스토트, 제자도, IVP, 2010

1장 불순응

급진적 제자의 첫 번째 특성은 ‘불순응’(non-conformity)이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 이중적 책임을 진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에서 증인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세상에 오염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되고(도피주의),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서도 안된다(순응주의).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한 백성을 불러내셔서, 우리로 세상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도록 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벧전1:15-16)

이 주제는 율법서, 예언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되풀이하여 나타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

여기에 급진적 제자도를 향한 부르심, 철저히 주변 문화를 따르지 말라는 부르심이 있다. 이는 기독교 반문화(counterculture)를 발전시키라는 부르심이며, 타협하지 말고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서야할 현대의 풍조는 무엇인가?

첫째, 다원주의의 도전이다. 이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거부하고, 한낱 우리의 의견일 뿐인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오만이라 비난한다. 우리는 이에 대응할 때 지극히 겸손하고, 개인적 우월감은 조금도 비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은 계속 주장해야 한다. 그분의 성육신, 속죄, 부활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dPn 외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음을 이기신 이가 없으므로, 오직 그분만이 죄인을 구원할 자격이 있으시다. 그분은 ‘위대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 분이다.

둘째, 물질주의의 도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물질 세계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리도록 하셨다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 물 세례와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 물질 세계의 질서를 인정하셨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질주의적이지는 않다. 물질주의는 영적 삶이 질식당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탐심을 경고하셨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기를 배운 경험을 이야기하며(빌4:11), 검소하고 관대하고, 자족하는 생활을 익혀 나가라고 권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알몸이 되는 두 순간 사이의 짧은 순례 여행이다. 그러므로 짐을 가볍게 하고 여행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셋째는 윤대적 상대주의의 정신이다. 모든 면에서 도덕적 기준들이 해이해져 가고 있다. 상대주의가 가장 분명히 나타난 영역은 성 윤리 영역이다. 지금은 교회에서조차 진정한 결혼 관계에 꼭 필요한 헌신이 빠져버린 혼전 동거가 만연하고, 동성애 관계가 장려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기준을 따르고 순종하라고 요청하신다. 그분은 결혼에 대해 성경적으로 정의하시면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라고 하시며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몸이 될지니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급진적인 그리스도인 제자는 윤리적 상대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토대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다. ‘예수가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부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서도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삶을 모래 위에 세우는 일이다. 그분은 또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요14:21)

네 번째 현대의 풍조는 나르시시즘의 도전이다. 이 나르시시즘은 1970년대에는 자아 실현의 욕구를 강조한 인간 잠재력 회복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 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뉴에이지 운동이 인간 잠재력 회복 운동에 편승했다. 뉴에이지 운동은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탐구해 보라고 한다.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구원자는 필요없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이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둘째’ 계명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지만 셋째 계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둘째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말세에 나타나는 징표 중 하나다(딤후3:2). 셋째로, ‘아가페’ 사랑의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자기 긍정과 자기 부인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창조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게 된 것은 모두 긍정하고, 타락으로 인한 것은 모두 부인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몰입에서,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건전한 명령으로 돌이키게 되었다.

정리해 보자. 우리는 나약하게 세상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상을 따르지 않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다원주의의 도전에 맞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옹호하는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물질주의의 도전에 맞서서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상대주의의 도전에 맞서서 순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나르시시즘의 도전에 맞서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론의 세찬 돌풍에 굴복하여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계곡의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소극적으로 세상 풍조의 영향을 피하라고만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롬8:29)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 이는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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