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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토트, 제자도, 8장 죽음

작성일 2011-03-21 10:45 작성자 정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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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 부산대 앞 모임 (2011년 3월 17일) / 토즈

존 스토트, 제자도, IVP, 2010

8장 죽음

급진적 제자의 여덟째이자 마지막 특징은 죽음이다. 기독교는 생명, 즉 영원한 생명, 최고의 생명을 주는 종교다. 하지만 생명에 이르는 길이 죽음임을 분명히 한다. 죽음을 통한 생명은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 둘 다의 가장 심원한 역설 가운데 하나다.

근본적으로 성경은 죽음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문으로 본다. 성경이 약속하는 생명은 죽음을 통한 것이며, 다른 조건은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롬 6:13)로 묘사한다.

구원

먼저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죽음과 생명을 본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가 영생이라고 썼고(롬 6:23), 요한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다(요일 5:12). 또한 이 생명의 독특한 특징은 그 영원성이 아니라 새 시대의 생명이라는 특성이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사는 삶이다(요 17:3).

하지만 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막는 장벽이 죄이며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하지만 그분이 죽음으로 이루신 일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우리가 주장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적으로는 믿음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세례로, 우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겨야" 한다(롬 6:11).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 있는 자이다.

제자도

죽음을 통한 생명이라는 원리는 제자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

누가에 따르면 우리는 날마다 우리 십자가를 져야 하고(눅 9:23), 그러지 않으면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7).

위의 마가복음 35절은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 자신을 위해 살려 한다면 자신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며, 자신을 포기하고자 하며, 자신을 내어주고자 한다면(완전히 버리는 순간에) 자신을 찾을 것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부인을 대가로 진정한 자기 발견을, 죽음을 대가로 진정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언했다(갈 5:24) 우리의 타락하고 자기 멋대로인 본성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악을 제거하면 우리는 살 것이다. 온전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는 것, 즉 우리의 제멋대로인 본성과 모든 탐심을 죽이는 것,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하는 것, 철저히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 거하는 죄와 전투를 벌이고, 그 죄와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철저한 죽이기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선교

죽음을 통한 생명의 원리가 작동하는 셋째 영역은 선교다. 고난은 선교에 없어서는 안될 측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받는 종의 예언을 성취할 것임을 분명히 아셨고, 선교에는 고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만 복음은 이방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죽음이 열매를 맺는 길이다.

기독 교회의 역사는 복음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결과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목도했던 용감한 선교사들로 장식되어 있다.

타문화 선교사들에게 죽음은 실제적 순교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가족, 친척들롸 헤어지는 것이며, 안락과 편안함에 대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혹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려는 유혹을 포기하고 초라한 섬김의 사역에 머무르는데 만족하는, 개인적 야망에 대한 죽음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물려받은 문화를 높이지 않는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위해 '죽으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박해

죽음이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발견하게 되는 넷째 영역은 신체적인 박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항상 우리 몸에 예수의 죽음과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고후4:10-11). 육체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거나 우리가 죽을 것을 알고 있을 때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 생명력에 의지할 수 있다.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경험한다. 이렇듯 우리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다."(고후 6:9)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 말하면서 약함을 통한 능력, 고난을 통한 영광, 죽음을 통한 생명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순교

성경에 따르면 순교자들에게 특별한 영예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계20:4) 박해와 순교는 구분할 수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순교의 순간에 이렇게 말했다. "이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내게는 생명의 시작이다."

유한성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공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폐하셨다"(딤후 1:10)고 단언한다. 그분은 자신의 부활로써 죽음을 정복하셨다. 따라서 더 이상 그것이 우리에게 권세를 행사하지 못한다.

부활에 대해서는 씨와 꽃의 관계를 주목하여 설명할 수 있다. 씨는 아주 작고 볼품없지만 그 씨에서 나온 꽃은 색이 다채롭고 아름답다. 우리의 부활한 몸도 그와 같을 것이다. 우리의 현재 몸과 어느 정도 연속성을 유지하겠지만, 그 몸은 새롭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고전 15:35-44).

다가올 생명은 실로 이 땅에서의 생명보다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최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죽음과 생명이란 방정식에서 두 항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영광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것이 된 영원한 생명이며, 우리 육체의 욕망을 죽임으로써 우리 것이 된 강력해진 생명이며, 우리 육체의 연약함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 가운데서 누릴 수 있는 내적인 생명력이며, 자신의 사명에 신실한 이들에게 약속된 풍성함이며, 혹은 박해 가운데서 또 순교 당할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로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창조 세계 안에서 누릴 궁극적인 부활 생명이다.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은 죽는 자가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다른 한편,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대가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죄에 대해 죽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자아에 대해 죽는 것이며, 타문화권 선교를 통해 야망에 대해 죽은 것이며, 박해와 순교를 경험하며 안전에 대해 죽는 것이며, 우리의 궁극적 운명을 준비하며 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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