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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롤하이저,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3장 외로움과 갈망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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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5,460 회
작성일 11-12-1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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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롤하이저,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 포이에마, 2011

"나를 지으신 분께 드릴 최고의 보답은 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3. 외로움과 갈망과 성

-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가져봐야 소용없다

윤리적 외로움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차원에서 온전치 못함을 느끼고, 자신을 초월하여 타자와 세계와 연합하려는 욕구를 끊임없이 느낀다. 인간은 이생에서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 채, 항상 외롭고 불안하며 뿌리가 없는 느낌으로 우울해한다. 우리는 외로움을 해결해줄 존재를찾아 헤맨다.

현대 문화의 관점에서 외로움을 검토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인간은 성관계를 갈망한다는 결론으로 흐르기 쉽다. 우리 문화는 외로움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낭만적인 성관계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현대적 정서에서는 적절한 섹스 파트너를 만나면 외로움은 당연히 해결된다고들 말한다.

그런 이야기가 완전히 틀리다고만은 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성적 연합은 하나님이 명하신 “한몸”을 이루는 결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로움을 보시고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2:18)라고 말씀하셨다. 성적 결합을 이루지 못한 인간은 결국 어느 정도는 외롭고 혼자이며 소외된 미완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여실히 보여주듯이 성관계만으로는 인간의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완전한 연합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섹스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다차원적 측면에서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외로움은 윤리적 고독이다. 우리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 인간의 윤리적 영혼,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곳에서 가장 많이 외로움을 탄다.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비슷한 영혼을 소유하고 윤리적으로 동침할 수 있는 파트너, 즉 진정한 소울 메이트이다.

훌륭한 우정과 결혼 관계의 뿌리에는 예외 없이 이와 같은 깊은 윤리적 친밀감이 자리한다. 친밀감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간직하고 보호하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알기에 외로움을 덜 느낀다.

리지외의 데레사는 “인간은 마음의 망명자이며 신비주의로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비주의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양선, 신실, 충성, 온유, 순결 가운데 서로 동침함으로써 윤리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불안한 순례자가 보내온 공개서신

외로움을 개발하기

알베르 카뮈는 말하기를, 우리는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인간 공동체를 엮어주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키르케고르는 외로움과 신비주의, 갈망과 공동체의 연관관계를 이해했다.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특별한 매개로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있다. 자신의 외로움에 귀를 기울이면 자아와 만날 수 있다. 외로움과 갈망 가운데 공감이 형성된다. 그럴 때 우리 말이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사랑과 외로움과 실망

우리는 결혼이든 깊은 우정이든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는 한계가 있어서 상대방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서로 위로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결혼관계든 우정관계든 상대방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까?

우선, 인간이 태생적으로 이생에서는 몸과 마음과 머리의 온전한 하나 됨을 소유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과 마음과 머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따라서 이생에는 (아주 드물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제외하고는) 성적·정서적·심리적·영적으로 완벽한 연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생에서 우리는 늘 어느 정도는 서로 떨어져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혼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점을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지점은 성적 외로움이 아니라 윤리적 고독이다. 우리는 성적 결합보다 오히려 윤리적 친밀감을 더욱 간절히 바란다. 상대방과 한 마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갈구한다. 애인보다도 똑같은 영혼의 소유자를 더 바란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상대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혼과 우정, 독신 상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유지할 수 있다. 오히려 절대 실망해서는 안된다고 요구하는 바람에 분노하고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게 되며, 상대방의 도덕적 (성적) 온전함을 침해하게 된다. 반대로, 사랑의 한계를 깨닫고 인간의 소외, 윤리적 외로움과 실망을 인정할 때 우정과 결혼 관계에서 서로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위로가 순례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망명 상태를 깊이 어루만져 주기에, 실망을 초월하여 머리와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실을 어루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열정과 순결

교회는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은 순결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개 세상에서 이해하는 교회의 모습은 순결, 특히 성적 순결에 집착한 나머지 열정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폄하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성이나 섹스에 반대하는 집단으로 알고 있다.

반대로, 이 세상은 순결을 이해하지 못한다. 순결한 사람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용기나 삶에 대한 욕구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세상이 순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스스로에게 막대한 해를 입히게 된다. 세상이 순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훨씬 큰 정서적 혼란과 상처, 강퍅한 마음, 극심한 불안감이 비롯된다. 순결을 잃어버리면 순수함을 잃어버린다. 순수함을 잃어버리면 행복을 잃는다.

세상과 교회는 서로 배워야 한다. 열정과 순결, 성과 순결은 같이 가야 한다.

교회는 성의 건전한 측면을 누리고, 사람들이 열정(성적 열정을 포함하여)을 누릴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순결은 열정과 연결될 때만이 의미가 있다. 건전한 성의 테두리를 벗어난 순결은 불감증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세상은 순결을 다시 배워야 한다. 성을 하찮게 여기고 성을 둘러싼 신성한 금기사항을 깨뜨림으로 얼마나 많은 정서적 고통을 초래했는지 인정해야 한다. 성과 열정은 순결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성과 영혼

성과 영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세 종류의 섹스, 세 가지 효과

1. 성폭행 - 영혼을 망친다.

2. 가벼운 섹스 - 영혼을 하찮게 만든다.

3. 신성한 섹스 - 영혼을 강화해준다.

신성한 섹스는 이생의 그 어떤 경험도 가져다 줄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영혼을 강화해준다. 그런 성관계는 성만찬이자 성육신이며 사랑의 화신이다. 신성한 섹스를 통해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연결되고, 바로 그 순간, 성을 만드신 하나님이 바라셨던 본연의 의도와 목표를 체험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감사와 안정감과 평화 가운데 영혼이 강해지고 확장된다. 그와 같은 영혼의 체험이야말로 진짜 대단한 일이다.

성과 숭고

‘숭고함’은 ‘순화’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고통스러운 순화 과정을 거친 뒤라야 강력한 황홀경을 얻을 수 있다. 영혼의 순화 과정이 고통스러울수록, 터질 듯한 황홀감도 커진다.

따라서 수많은 성인들이 순결과 기다림과 순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 시대는 긴장의 숭고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 순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섹스가 숭고해야 한다고 믿지만, 섹스를 숭고하게 만드는 긴장 가운데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숭고하고 깊이 있는 성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가능케하는 고통스러운 순화 과정은 원치 않는다. 영혼을 세워주는 순결의 능력은 외면한 채, 영혼이 터질 듯한 깊이 있는 섹스만 원한다.

섹스는 외로움, 더군다나 윤리적 외로움으 아주 조금밖에 완화시켜주지 못한다. 순결한 삶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숭고한 섹스란 있을 수 없다. 상대방에게 진짜로 헌신하지 않고, 순결한 긴장을 겪어보지 못한 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몸을 섞은 사람은 결단코 숭고한 체험을 할 수 없다. 위대한 사랑은 위대한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노력과 지속적인 헌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사랑을 기다리라고. 모든 것에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치 있는 것은 모두 기다려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 정리 : TGIM 울산점 점장 정한신(greenecho7@gmail.com). 2011.12.12.

< 일상 영성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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