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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롤하이저,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10장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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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5,351 회
작성일 12-05-2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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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롤하이저,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 포이에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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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으신 분께 드릴 최고의 보답은 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10.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사랑

- 무모하고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지성과 긍휼과 용서가 풍성한 분이신지 미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르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그분의 사랑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하나님의 기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해 주는 이미지들

 

나는 작은 아이 같은 우리 모습이 때론 하나님의 마음에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연민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나이가 몇이건, 우리 안의 아이는 그분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연민과 긍휼을 끊임없이 자아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분의 자비에 우리를 제대로 의탁하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나는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해 무한한 사랑을 끊임없이 비추고 계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왜 우리는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셔서 우리의 모든 의혹을 씻어주시지 않는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칼 라너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자신을 변호해야 할 상황에서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 당신에게 하나도 득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데도 상대방을 용서해본 적이 있는가?

- 상대방에게 답례나 인사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만족감도 느끼지 못했는데도 상대방을 위해 희생한 적이 있는가? 또 스스로 한 결정은 홀로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그런 사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순전히 양심 때문에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는가?

- 남들은 다 무모하다며 당신 곁을 떠나고 홀로 어둠 속에서 도약하는 듯한 느낌인데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어떤 행동을 한 적이 있는가?

- 상대방의 감사를 기대하거나 스스로 '이타적' 행동을 했다는 만족감을 구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푼 적이 있는가?

 

라너가 제안한 경험들을 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탄생시키는 법

 

하나님은 우리 삶을 폭풍으로 휩쓸어가는 위력적인 슈퍼스타처럼 강력하게 이 세상에 오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똑같은 방법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다. 그리스도는 아주 특별한 임신의 결과로 세상에 태어나서 지식을 습득하고 양육을 받으며 어른이 되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출생과 존재는 특정 인간의 동의와 협력에 달려 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과정(성령님의 수태고지, 마리아 배 속에 잉태된 그리스도, 출산의 고통, 아이를 어른으로 양육함)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패턴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성육신이 지속되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육신을 입으시는지 보여주는 패턴을 마리아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패턴은 먼저 우리가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양선과 신실, 충성과 온유, 그리고 순결로 충만해질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때 찾아오는 입덧과 함께, 우리는 우리 몸에 그런 성품들을 잉태하여 체화하고 적절한 시간이 되면 육신의 고통과 함께 그것들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탄생시키고 양육해야 한다.

 

하나님의 위로

 

요한복음 20장에서 복음서 기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셨는지를 묘사한다. 예수님이 (두 차례나) 닫힌 문을 통과하여 방 한가운데 나타나셔서 평강을 전하셨다. 제자들이 두려워하여”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문을 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잠긴 문을 통과해서 바로 방 안에 들어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 앞에서 성령을 내쉬셨다. 그러고는 두려워마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

그리스도라면 하실 수 있다. 그분이 뚫고 들어가시지 못할 지옥은 없다. 그분은 어떤 문이라도 다 통과하실 수 있다. 두려움과 외로움 한복판에서 공동체와 기쁨의 영을 불어넣으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지옥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과 불건전한 두려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극소수의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최근의 문화적·종교적 정서를 고려할 때, 대다수 사람들은 지옥 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예수님은 지옥은 실재하는 가능성이며,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반드시 병적인 염려일 필요는 없다고 확인해주신다.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인류 대다수가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는 대단한 모욕이니 말이다. 그리스도가 드러내신 하나님이 열정과 인내와 용서가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수많은 사람을 영원히 잃게 되는데도 지켜보고만 있는 하나님은 생각하기 힘들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실 뿐 아니라, 그 일을 성취하실 만큼 능력이 충만하신 분이다. 우리가 창조하고 치유하는 그 사랑의 능력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은 가장 강퍅한 마음을 소유한 죄인이라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도 굳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데, 완벽한 그분의 사랑이 이겨내지 못할 악한 마음이 있겠는가?

 

그리스도께 묶여

우리가 성육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과도 같다. “당신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이생과 내세에서 생명의 공동체, 즉 하나님의 가족과 절대 떨어지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그리스도께 묶여 있으니까요.”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즉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피와 살이라고 알려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재 진행형 성육신이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요,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셨을 때 그분을 만지거나 그분이 어루만져주시거나 그저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영생은 물론 치유와 용서를 받았다. 우리가 그분의 현재 진행형 성육신이라면, 그 사실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성육신의 신비는 무한하다.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 육신에 짊어지고 전달하는 것은 교회 제도만의 몫이 아니다. 은혜에 잠긴 사랑은 모두 육신이 된 말씀이다. 사랑을 만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루만짐을 받는 것이요,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것은 그리스도로 어루만지는 것이다. 사랑이 현재 진행형 성육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리스도가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그는 지옥에 갈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그리스도가 그 사람을 용서하시기에 그는 용서를 받는다. 그들을 향한 우리 사랑과 우리를 향한 그들의 사랑이 그를 그리스도의 몸에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성육신을 믿기 어려운 이유에는 너무 좋아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 하나님은 숨어 계셔서 우리가 도저히 찾기 힘든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용서와 은혜, 구원은 운 좋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인간의 육신과 이 세상은 걸림돌이 아니라,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수단이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 정리 : TGIM 울산점 점장 정한신(greenecho7@gmail.com). 2012.5.24.

 

 

< 일상 영성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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