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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하나님의 세계 - 제1장 창조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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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5,481 회
작성일 08-02-28 17:03

본문

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부산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네 번째 모임(2006. 5.22.월 부산대 법학연구소)

 

현실, 하나님의 세계

1장 창조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2)

 

▲ 근거본문(1) : 창세기 1-2장

 

* 성경은 물질성을 벗어난 엘리트주의적인 자기영성에 대항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기본이 되는 책은 창세기와 요한복음이다.

* 창세기 1-2장을 지금 “생존 세계”에서 일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고 인도하는 본문으로 재인식하자.

 

1. 현재의 창조

 

○ 현재로서의 창세기 이해

  우리가 일하고 있는 문화적영적 조건은 주전 6세기에 히브리인들이 살았던 유배 조건과 유사하다. 뿌리뽑히고 살 곳을 잃은 모습, 예배의 전통과 단절된 모습, 이방과 이교사회에 파묻힌 느낌 등. 창세기와 이사야서의 유배설교에 등장하는 창조의 이야기는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자신은 창조되지 않은 존재, 미숙하고 부적당한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즉각성과 강력함,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보여준다.

  창세기는 창조라는 위대한 선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관을 위해 잘 사는 삶, 잘 놀이하는 삶으로 우리를 형성하고 인도하는데 근거가 되는 본문이다.

 

2. 시간이라는 창조의 선물 - 창세기 1장

 

  시간을 이해하고 높이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는데 가장 기본이 된다. 신성한 시간을 침해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과 가지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모독하는 것이다. 시간은 거룩함 그 자체의 것들이다.

  시간에 대한 모독은 서두름과 꾸물거림이다. 서두름은 그것이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추상적인 것들을 강박적으로 붙잡느라 시간의 선물에 등을 돌리게 한다. 꾸물거림은 우리가 ‘시간의 충만함’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순종과 경배의 삶에 대해 게으르고 부주의하여 시간의 선물로부터 마음이 흐트러지게 한다.

 

○ 시간을 거부하는 영적 문화

  평범한 시간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개입하셔서 시간을 끝내기고 영원의 도래를 알리실 때까지 그저 ‘시간을 채우는 것’에 불과하며, 시간은 그것 자체로 경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시간의 유일한 가치는 오직 마지막 때를 위해 준비하는데만 있다는 태도가 있다. 따라서 신성화된 프로젝트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어떤 목표를 위해 그 시간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시간이란 우리가 현재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나날의 일에 참여하는 통로가 되는 선물이다. 마지막 때는 현재, 평범한 시간에 영향을 미친다. 평범한 시간을 축소시키거나 모독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시간을 충전시키고 채움으로써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 때는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가 경배와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의 충만이라는 선물이다.

 

3. 리듬

 

  시간의 본성은 바로 리듬을 가지는 것이다. 방관자처럼 그저 시간을 구경하며 시계로 그것을 재는 대신, 시간 안에 머물면서 박자를 맞추며 계속 참여하고 현존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리듬이다.

  우리는 창조의 리듬 안에서 리듬감 있게 살도록 창조된 존재들이다. 리듬은 우리가 속한 우주와 우리 자신의 신체에도 존재한다. 창세기에서는 창조의 리듬이 여실히 드러난다.

 

4. 리듬의 회복

 

  창세기 1장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는 경험은 삶의 현장에 쳐져 있는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주일과 주일 사이에 집밖에 나와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고 계시는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시간이라는 창조의 선물을 설명하는 창세기 1장 본문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이지만 만약 우리가 주일을 기다리는 동안 블라인드를 계속 쳐 놓고 있다면 실제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과 아무런 접촉이 없는 셈이다. 예배의 장소를 떠나 밖으로 걸어나올 때 우리는 새롭게 인식하는 눈과 재장조된 순종의 마음을 갖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맛보는 모든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어... 좋았더라”의 리듬을 갖고 있다.

 

※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를 존재하게 하는 7일 연속의 시간으로 그 구조가 이루어져 있다. 그 형식적인 효과는 리듬이다. 이 리듬은, 운율이 있고 반복되는 가락의 문구를 사용하여 우리의 산만하고, 불안하고, 때로는 늘어지는 삶을 일으켜서, 연속되는 6일에 걸쳐 신뢰할 수 있고 능력 있는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안정적이고, 확고하고, 서두르지 않는 속도에 맞추도록 해준다. 그러고 나서 이 리듬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 일곱째 날의 안식일로 귀착되는데, 안식일에 우리는 모든 창조의 시간에 현존하게 된다. 바로 이 묵상하는 일곱째 날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는 창조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5. 공간이라는 창조의 선물 - 창세기 2장

 

  창세기 2장은 공간으로 그 구조가 이루어져 있다. 공간은 우리가 방향지워지고, 할 일을 찾고, 순종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타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교제하는 이 땅 위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공간

 

  창세기 2장에서 모든 사건은 지구상의 한 공간, 동산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어난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은 공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삶은 지역적이다. 이 땅, 이 일, 이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 (예배와 삶의 현장이 분리된 사람들의 예)

  우리는 동산 밖에서(수련회나 종교적 행위들) 복음에 대해 흥분하고 열광하기는 쉽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미혹하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아무런 방해나 간섭없이 전적으로 선하고 복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유토피아, 즉 이상적 공간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된 혹은 인위적으로 고안된 공간이 아니라 실제의 공간에서만 삶을 살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가 영적 삶과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사상, 진리, 기도, 약속, 믿음 등이 특정한 사람과 실제공간을 벗어나서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목적은 부엌과 뒤뜰의 너저분함 속에서, 폭풍과 죄, 평범한 삶의 일상적인 일과 꿈들 속에서 이뤄져 간다. 하나님은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와 함께 일하시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 혹은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의 우리와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있는 그 곳에서 우리를 다루시지, 우리가 있고 싶은 곳에서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다.

 

  축소된 현실이 아니라 충만한 현실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온전한 삶,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끌어안는 삶이 이 땅에 기초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진정 복음이다.

 

인간

 

  우리는 우리가 놓인 공간을 구성하는 물질과 같은 원료로 만들어진 존재다. 창조 세계는 우리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것의 일부다. 이 땅이 더럽혀지면, 동물이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면, 강이 오염되면, 사실상 모독당하는 것은 우리를 형성하는 재료인 것이다.

  우리는 이 공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우리가 바로 이 공간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구의 다른 모든 이웃과 공유하고 있는 정체성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일반론적이거나 추상적인 영성, 생각과 감정만 있는 영성 그리고 “이 세상은 내 집은 아니네”라는 식의 영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유와 필수

 

  물론 우리는 흙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 하나님이 이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위대한 존엄성이 우리 주위에 그리고 우리 안에 쌓이게 되었다. 창조 기사의 플롯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 존엄성을 특정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 사역을 지속해 가는데 우리를 끌어들여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쓸모 있는 일을 하게 하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 즉 땅을 일구고 돌보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진 재료 그리고 우리가 놓인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둘째, 창조된 땅에서 일하라는 임무에 이어 하나님은 명령을 주신다.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명령은 우리가 자유를 누릴 능력이 있음을 선언한다. 이 자유는 창조의 전체 기획 안에서 절대적으로 독특한 것이다. 명령은 자유를 누릴 능력이 있음을 가정한다. 우리는 필수(necessity)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의 공간, 이 창조 세계는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필수적 조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필수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 즉 필수와 자유라는 양극 사이에 펼쳐진 나라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은 무엇이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는 사실상, 필수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필수를 무시한다면 우리가 소위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서툴게 아무데나 치고 다니면서 도덕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우리 자신과 남을 다치게 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우리가 자유를 무시하고 필수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나태해지고 인간됨의 독특한 특성을 몰수당한 채 기생하는 소비자와 관객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다만 이 자유와 필수의 변증법은 공간이라는 선물 안에서만 주어지며, 이 변증법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가 창조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와 동창해서 하는 일의 핵심이다.

 

친밀감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공간에 데려다 놓으신 후에(우리가 사는데 필수적인 조건들) 그리고 우리에게 일을 주시고 명령을 주신 후에(우리를 자유의 삶으로 던져 넣으신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 관계를 소개하시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과 친밀해지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집인 필수와 자유의 동산 안에 또 하나의 인간, 친밀감의 필요를 채울 동료, “알맞은 조력자”를 만드셨다. 이 존재는 단지 이름을 지어 주고 규정하고 돌보아야 할 또 하나의 피조물이 아니라 우리가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에 잠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

  동산에 있는 동물과 나무들, 그리고 동산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창세기의 연관성을 통찰력 있게 발견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우리 눈앞에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남자 혹은 여자와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 사이의 연속성에 경의를 표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과 모든 인간들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하며 이를 끌어안아야 한다. 특히 장애가 있거나 고통받는 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물들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 것이라면,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것이라면, 추상적으로 혹은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구체적 상황들 속에서, 즉 시간과 공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우리 삶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형식들을 보여 준다. 창세기 1장은 형식을 만들어 우리를 시간 안에 두고, 창세기 2장은 형식을 만들어 우리를 공간 안에 둔다.

  우리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최우선적이나 종종 회피되는 임무는 창조의 신성함을 알아보는 것, 그 세부 내용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표시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 근거 본문(2) : 요한복음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자 창조의 계시로서 동시에 제시된 창조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육신이 되는 말씀”이며,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1:14)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창조주(참 하나님)를 보며, 우리도 그 일부인 창조(참 인간)를 보는 것이다.

  인간의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포괄적 계시, 창조를 살아내는 사람의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만약에 다른 곳 혹은 좀더 나은 환경에서 살았다면 보다 영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식의 생각을 요한은 그만두라고 한다. 창조는 우리 뜻대로 채택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저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을 돌보겠다고 창조로부터 걸어나올 수가 없다.

  예수님이 바로 모든 창조를 있게 한 그 말씀이며, 그 예수님이 이제 새 창조가 있게 하시기 때문에 창조는 우리가 시작하는 지점이며, 우리는 이 시작을 건너뛰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신령한 삶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창조를 우회해 가려는 일들 또한 나타난다.

  요한의 이야기에는 주로 예수님의 대화가 많이 들어 있다. 그 이야기에 독특하게 ‘창조’의 성격을 부여해 주는 세 요소가 있는데 ‘에고 에이미’라는 관용적 문구, 표적이라는 용어의 사용, 그리고 영광이라는 말의 빈번한 언급이 바로 그것이다.

 

1. 에고 에이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히브리어 ‘야웨’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에고 에이미이다.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이다”(I am)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가장 개인적인 이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 하나님의 권위적 현존을 이 에고 에이미를 자주 사용하심으로써 자신에게 공공연히 적용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과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 등으로 불렀는데, 이러한 은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 피부에 와 닿는 용어와 상황들 속에서 우리를 그분의 삶으로, 하나님의 삶으로 초대하고 계신다. 또한 요한은 믿다와 사랑하다라는 동사로 대변되는 이야기들을 통해 예수님과 갈수록 친밀해지는 관계 속으로 여유를 가지고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2. 표적

 

  예수님이 표적이라고 하는 주제 전반에 대해 확고하게 냉정한 자세를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은 놀랍다. 기적을 부인하시지는 않으시면서도 예수님은 그것이 진정성의 증거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고 그런 것들에 속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이건 보이지 않건 우리 주변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아채거나 설명하거나, 혹은 통제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초월하여, 초자연적으로 놀이하시는 곳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지금도 붙들고 계시는 예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같은 창조세계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표적을 제시하신다.

  누구도 강제로 우리를 믿게 할 수 없다. 믿음은 그 성질상 동의와 참여, 신뢰와 헌신을 요구한다. 또한 예수님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일을 그분께 강제할 수 없다. 표적은 우리가 예수님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적는데 쓰는 백지 청구서가 아니다. 표적이란 예수님이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표적을 쉽게 알아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그 조건대로 그분을 쉽게 영접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기쁜 소식은, 표적은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 속의 형제자매들과 사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또한 오직 믿음과 사랑이라는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는 삶의 방식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표적이 지시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언제 어디서든 계시되는 대로 예수님께 복종하며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따르며 예배하라. 그리고 영광을 찾아보라.

 

3. 영광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을 자세히 보면 우리는 영광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수정해야 한다. 무시당하신 예수님, 사람들이 저버린 예수님, 조롱당하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모욕을 당해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다.(요12:23-28)

  우리는 영광을 추구한다. 우리는 올라서고 더 많이 갖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잃는 것,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붙잡는 대신에 다 놓아주는 삶으로 부르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광의 정의를 내려주시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장애 중 하나는 용납과 명예, 성공이나 적절성과 같은 모양새 좋은 대체물들로 영광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우리는 어두움, 거절과 굴욕, 몰이해와 오판, 희생적 삶과 순종적 죽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세상이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역광으로 비춰주는 하나님의 밝은 임재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순종적으로 창조에 참여하도록,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창조의 관람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이 사용하는 두 개의 주요 동사들은 ‘믿다’와 ‘사랑하다’이다. 믿을 때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즉 하늘의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믿음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기도의 삶 속에서 실행된다.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는 것, 즉 땅에 것에 대해 환영하며 반응한다. 사랑은 우리 가족과 이웃과 직장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친밀감과 돌봄의 삶 속에서 실행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의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창조에 다가가기 위한 진입로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물질적인 것에 우리를 담그신다. 사물, 물건, 몸은 거룩하다. 예수님은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임재임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의 증거로서 우리가 표적을 해석하고 말씀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신성을 추적하는 탐정으로 훈련시키신다. 우리는 영광을 알아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의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창조에 다가가기 위한 진입로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의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창조에 다가가기 위한 진입로이시다. 즉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 창조 안에서 주 경외함 기르기 : 안식일과 경탄

  우리가 창조와 친밀해 질 수 있게 해 주는 초점 연습(focal practice)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1. 안식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데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이상의 것이 있음이 곧 드러나게 된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많은 일을 함이라는 맥락 속에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포괄적이고 위엄 있는 사역을 알아보고, 그것을 수행하고, 그것을 듣고, 그것에 동화되며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일 안에서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창조의 실재와 의미를 살아내려면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다. 피터 포사이스는 “시간은 영원의 성례전”이라고 주장했다. 안식일은 영원을 연습하는 연수회다.

 

명령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명령은 두가지 형태로 주어졌는데, 하나는 출애굽기에서 그리고 또 하나는 신명기에서이다.

  출애굽기에서 제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하고 그 날을 쉴 때 우리는 창조의 리듬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또한 시간을 모독하는 서두름에 대한 방어가 된다.

  신명기에서 제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노예상태에서처럼 일의 연속을 통한 억압을 영속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웃과 노예와 가축과 자녀들이 쉬도록 함으로써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창조의 자유 안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안식일을 지킨다.

 

예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창조와 안식일 지키기의 리듬을 우리 삶으로 가져와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일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에 보조를 맞추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예배의 장소로 들어갈 때, 회중과 함께 모일 때 그리고 하나님께 노래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안식일을 가장 잘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로부터의 지혜이며, 이를 무시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일주일 중에 교회에서의 예배는 우리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시간인데, 그것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그냥 내키는 대로 살게 되는 셈이다.

  창조의 리듬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 가지고 있는 리듬과 그 이야기 안에 푹 잠기는 최우선 수단이며, 제대로 된 일, 창조의 일을 익히는 최우선 수단이다. 우리가 일을 하러 갈 때 아무렇게나 하는 즉흥적인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과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 쉬고, 축복하고, 신성하게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예배의 공간에서부터 걸어나갈 때 우리는 새로운 인식의 눈과 재창조된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경에는 이렇듯 창조와 예배를 연결시키는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존재하고 있다.

 

 

  일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은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통해 지속되게 한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며 예수님도 창조 세계를 자신의 일터로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일을 하고 나서야 안식일이 온다. 우리는 일이 없이는 안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안식이 없이는 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터를 넘어서시는 (그러나 일터를 떠나지는 않으시는) 안식일이 없다면 일터에는 곧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일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 바로 안식일 없는 일터를 우상의 번식지로 만든다. 우리가 일을 우리 자아와 통제의 영역으로 축소시킬 때 우리는 일터에서 우상을 만들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능가하는 것,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놀라움에 차서 열린 자세로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주 경외함을 계발하게 된다. 우리 영혼은 우리가 일으킬 수 없는 일 혹은 우리가 떠맡을 수 없는 일에 의해 형성된다.

  만약 안식이 없다면, 규칙적이며 명령받은 일하지 않음과 말하지 않음이 없다면, 우리는 곧 자신이 하는 일과 말에 완전히 빨려들어가고 하나님의 일을 잊거나 주변화시킨다. 안식이 없으면 일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맥락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 하나님에 대한 자각,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는 일을 놓치게 된다.

  안식일을 지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주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기와 말하지 않기를 행하는 날로 생각을 바꾸고, 구조 조정을 하고, 회복하는데서 시작할 수 있다. 나아가 주의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우리 주변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과 회중의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고요함과 잠잠함을 많이 일하기와 많이 말하기로 대체시켜 버린다. 그 의도는 좋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되었다.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 30:15). 고독을 일구어라. 침묵을 일구어라.

 

2. 경탄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계발되는 주의력과 흠모는, 한 주간의 날들 속에 퍼져 있는 창조의 조건들 하에서 경탄하는 능력으로 발전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러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실천하도록 해주는 가장 모범적인 이야기다.

 

부활에 대한 경탄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계발되는 경탄이 부활 이야기에 배어 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삶을 형성시키는 성령의 사역의 중심에 온다면, 경탄의 감각은 우리 생활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즉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당황, 충격. 그것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안에서, 당신 안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경탄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을 자력의 프로젝트로서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술을 동원하고 재능과 잠재력을 분석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과정을 평가하게 된다. 영성 형성(spiritual formation)은 한낱 장식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경탄이 없다면 삶을 잘 살고자 하는 동기부여의 에너지는 불안과 죄책의 지배를 받게 된다. 불안과 죄책은 제한한다. 우리를 자기 자신 안에 가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부적절함이나 무가치함이라는 기분 속에 격리시킨다. 그리고 자신을 최악의 모습으로 축소시킨다. 우리는 성령의 손으로 형성되는 대신에, 도덕적 일중독주의나 철저한 스포츠 정신의 삶으로 기형적으로 형성된다.

 

경탄의 해체

 

  불행히도 우리는 경탄을 촉진하거나 격려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능력이 커지고 우리가 자신과 주변 환경을 더 잘 통제하게 되면서 경탄은 줄어든다.

  일터는 경탄이 가장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감소되는 곳이다. 일터에서는 정보와 능력이 핵심적 가치다. 일터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아주 교묘하게도 하나님과 그분의 일이 우리 삶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느냐 보다 우리 일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더 앞서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했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만하고 쓸 만한 조력자로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기도도 창조/부활의 경탄이라는 맥락을 떠나서는 우상숭배가 되어 버린다. 즉 하나님을 내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조로운 일상과 일터에서 살다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면서 새로운 창조가 일터의 지루함을 대체하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경탄의 세계에 자리잡은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모든 새로운 것에 일터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한 환상을 가져본다. 어떤 사람은 이를 위해 탈출을 시도하나 대개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판에 박힌 일과의 지루함을 걸어간다.

  또 하나의 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로운 삶을 확인하고 가꾸어 갈 방법을 일터 밖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즉 종교시장의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상숭배다. 하나님이 상품으로 포장된 것, 하나님이 비인격화되고 기교나 프로그램으로 이용 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은 우상 숭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우상 숭배의 위협에 늘 노출되어 있는 환경이다. 일터에서는 신비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특징인 조건(일터에서는 정보와 노하우가 요구된다), 우리 능력과 통제력에 프리미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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