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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하나님의 세계 - 제2장 역사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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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4,989 회
작성일 08-02-2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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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부산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2006 6 19 / 부산대 법학연구소

현실, 하나님의 세계

2장 역사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2)

 

▲ 근거본문(1) : 출애굽기

 

하나님

귀신 축출

 

구원

 

  구원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곡해할 수는 있다. 구원이 어떠해야 한다는 우리 생각을 가지고 구원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도피주의적 환상을 만들어내어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이루고 계시는 실제적 구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구원방식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할 수 있다.

  이야기, 식사, 그리고 노래는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동참을 온전케하며,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시는 일과 생생한 접촉을 유지하게 한다.

 

이야기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텍스트는 정의가 아닌 이야기로 주어진다. 즉 민족의 이야기,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은 바다의 불가사의라는 사건(홍해사건)을 통해 이 구원의 이야기를 전한다.

  바다의 불가사의는 구원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인간의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확립해 준다. 우리는 보고 두려워하며 믿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가가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구원 프로젝트에 익숙하여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거의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문제에서 옮기시기 보다는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다른 무엇을 가져오신다는 것을 말해준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와 어려움, 질병과 중독, 우리의 황폐함과 실망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공격받고 방해받을 때, 우리와 함께 진지하게 일하시면서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 준다.

 

식사

 

  구원을 이해하고 수용하는데 식사가 차지하는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이 이 식사를 영원히 먹으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강조된다. 바다의 불가사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발발시킨 행위가 평범한 식사(유월적 식사)라는 것이다.

  성경적적 영성의 특징은 평범함과 기적이 같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믿는 모든 것은 우리가 평범한 하루를 살면서 하는 모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일을 처리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세부요소에서 우리의 구원을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브로콜리 좀 건네주세요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는 구원받은 자들의 대화 속에서 같은 무게를 지닌다. 성찬의 빵은 부엌과 성단(聖壇) 모두에게 나누인다.

  유월절 식사는 일주일로 늘어나 명령되면서 구원의 주간이 창조의 주간과 연결됨을 보여준다. 창조와 구원은 한덩어리이다.

  또한 구원의 식사가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의 식사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식사는 본질적으로 손대접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신론자 이교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비유대인, 노예와 자유자 모두에게 유월절(구원)은 동일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노래

 

  구원은 하나님의 행위다. 따라서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은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 주의 기울임의 방식이다. 구원의 하나님은 노래를 통해 예배를 받으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을 이루신 것에 대한 노래이다. 노래는 구원의 문제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 일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받아들이고 음미하는 근원적 언어다. 예배로 나아가지 않는 구원에 대한 접근방식은 구원을 우리가 터득해서 통제할 수 있는 개념 혹은 프로그램 혹은 기교로 왜곡하고 축소시켜 버린다.

  구원의 노래는 역사를 재규정한다. 역사는 죄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바다의 불가사의는 우리를 이끌어 구원으로 규정된 역사를 이해하고 거기에 동참하게 한다. 성경 밖에서 고찰되는 역사는 죄와 죄의 결과를 다룬다. 계시로서의 역사는 구원과 구원의 결과를 다룬다. 구원으로 규정된 역사에서 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더 잘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더 이상 죄가 결정적이지 않고 구원이 결정적인 것이 된다. 구원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어떤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지 경계를 그어주고 조건들을 제시해 준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죄의 증거들과 날마다 부딪치게 되는 현실은 구원으로 규정되는 역사를 믿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구원으로 규정된 역사는 모든 죄의 증거를 받아들이지만 그 모든 것안에, 밑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사역을 통찰력 있게 분별해 낸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라는 선언에서 이를 잘 표현한다.

  구원은 영혼의 상태를 다루지만영혼은 모든 것을 합한 단어임을 기억하자. 경제와 정치, 과학과 지리, 문학과 예술이 다 들어가 있는 역사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없다. 구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사적인 일이 결코 아니다.

  악은 편재하고 전능하다는 인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고 흔하게 일종의 도덕적/영적 냉담에 빠지고, 어쩔 수 없다는 질병에 걸리며, 일부는 완전한 불신앙에 빠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하는 확신에 찬 지식을 갖지 못한 채, 즉 구원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갖지 못한 채 소심하게 살 뿐이다. 겁먹은 토끼처럼 종교의 굴로 도망가 자신들의 신앙을 축소된 형태로 유지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영적 경멸과 우월성을 외치면서 밉살스럽게 으스댄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충만하게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즉 우리의 가정과 일터의 상황 속에서, 우리 국가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구원의 행위를 적절하게, 그리고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중단없이, 끈질기게, 효과적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신 세상이며, 하나님의 근본사역은 구원이다. 우리는 구원으로 규정된 역사 속에 몸을 담근 구원의 백서이다. 우리는 역사의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믿음과 동참으로 그 역사에 관여하는 것이다.

 

 

▲ 근거본문(2) : 마가복음

 

  성경 이야기를 우리가 버리는 그 순간, 우리는 실재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경험 속에 축소시켜 버린다. 우리가 그 이야기 자체에 계속해서 새롭게 잠기지 않은 채 자신의 교리를 만들어 내고 자신의 도덕 규칙을 세우거나, 제자도와 사역의 삶에 투신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지역적인 임재와 활동에서 곧바로 벗어나서 자신의 가게를 따로 차리게 된다.

  복음서는 모든 이야기의 성숙한 완성이 되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우리를 초청하고 나아가 우리의 참여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신화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을 감상하는 구경꾼으로 만드는 대신 복음 이야기는 우리가 관찰이나 실험이나 추측으로 생각할 수 없는 무엇을 계시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으면서 수혜자와 동참자로 우리가 그 행위에 참여하게 한다.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는 좀 이상한 이야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궁금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신상, 출신배경, 외모 등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즉 예수님과 그분이 구현하신 구원은 소비재가 아닌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는 예수님이 언제나 주제인 이야기이다. 즉 구원이란 실제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예수님께 우리가 기울이는 주의와 반응인 것이다.

  마가는 특히 베드로 등 제자들을 무자비하게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부분에서 제외해 버리고, 그들의 죄됨과 약함을 부각한다. 이는 모두가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주도하시는 그분의 은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이것이 기독 공동체에서 지키기 힘든 초점이었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의 죽음

 

  마가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최대한 간략하게 말해 보라면예수님의 죽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좀 암담한 사실이다. 특히 자신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영혼을 살찌우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예수님의 죽음은 신중하게 규정된 죽음이다. 그 죽음은 자발적이고, 동의하에 이뤄졌으며,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 죽음은 희생적인 죽음으로 규정된다. 또한 그 죽음은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묘사된다. 이는 죽음을 비참한 것으로 설명하거나 아니면 꾸물거리며 죽음을 지연하는 것으로 다루는 우리 문화와 대조된다. 예수님의 죽음은 비참하지 않다.

  마가의 구원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죽음으로 정확히 이해시켜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우리 문화의 태도에 저항하게 한다.

 

우리의 구원

 

  우리의 구원에 우리가 기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는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예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오를 적절하고 분별력 있게 사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금욕적 차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이러한 금욕적 삶은 예수님과, 죽음으로 가는 그분의 삶을 다룬다.

  구원에는 언제나 강력한 금욕적 요소가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죽음을 질질 끌거나 부인하는 문화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문화는 우상과 이데올로기의 보호하에 강박적으로 생명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생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가치도 없을 정도로 축소되고 감소된 생명만 남길 뿐이다.

  우리가 마가의 본문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결코 금욕을, 생명을 부인하는 것과 연관시키지 않을 것이다. 금욕의 실천은 하나님인체 하는 자아의 소란스러움을 쓸어버리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에게 다가갈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 준다.

 

심미적 차원

 

  구원에는 언제나 강력한 심미적 요소가 있다. 예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율법과 선지자와 복음으로 구성된 이 거대한 세대간의 대화를 주의깊게 듣고, 예수님에게서 계시된 것을 확증해 주는 거룩한 음성을 듣는 것이 수반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영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인식한다.

  구원에서 심미적인 자극은 지각 훈련과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계시되는 것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잘하지 못한다. 죄로 인해 감각이 둔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은 성령, 하나님의 성령의 방문과 출현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반응하는데 적합하도록 치유받고 재활되어야 한다.

  마가의 이야기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다. 구원 이야기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우리가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속죄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자유와 위엄을 가지고 그분의 죽음을 죽고 그분의 삶을 살라고 초대받는 것이다. 즉 믿음과 순종으로 구원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역사 속에서 주 경외함 기르기 : 성찬과 손대접

 

  우리 자신이 처한 지저분한 역사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선언하는 예수님의 케리그마적 죽음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관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도덕주의의 위험, 출애굽기와 마가복음의 위대한 근거본문 등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일상생활의 영성을 위한 기도문을 작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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