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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 7. 진실성을 배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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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5,307 회
작성일 09-11-1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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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 자료 / 정리 : 정한신

폴 스티븐스,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IVP, 2009

7..

진실성을 배양하라

사업계에서 도덕이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많은 이들은 ‘기업 윤리’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냉소적 태도를 취한다. 이 장에서는 일관된 윤리적 의사결정을 위한 영적 동기 유발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회색 지대에서 일할 때

우리는 날마다 윤리적 결정을 내린다. 그 중에는 뇌물의 문제, 재정 상황의 조작, 거짓 광고, 성적 차별, 차별철폐 조처, 불공정한 보상, 친인척 특혜, 시간 도용, 물건 도둑질, 명예훼손, 가격 조작, 산업 스파이, 거짓말, 유해한 물건이나 서비스, 간부의 연봉, 내부 거래, 사업체 부풀리기 등 어려운 문제들도 있다.

윤리적 문제에 관한 접근 방식

우리는 대체로 기독교 이후 세계에 살고 있다. 가치가 부재하는 사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택, 자기만족, 상대주의 등 새로운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리고 세계적 장터는 다양한 윤리적 기준들이 충돌하는 곳이다. 이 장터에서 어떻게 도덕적 결정을 내려야 하고, 무엇이 그러한 동기를 유발시켜 줄 것인가? 이런 질문은 장터 영성과 관련된 것이다. 이는 개인적, 공동체적으로 일상생활의 맥락에서 하나님을 삶으로 체험하는 문제라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윤리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음 셋 중의 하나였다.

명령적(command) 접근 : 전문 용어로 의무론적 관점이라 불리는 이 접근은, 십계명 같은 것을 무조건 수행해야 할 정언명령으로 삼자는 견해다.

결과론적(consequence) 접근 : 과거에는 목적론적 관점이라 불렀다. 이 공리주의적 접근은 ‘최대 다수를 위한 최상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성품(character)/미덕(virtue) 중심의 접근 : 윤리적 행위란 덕스러운 성품에서 흘러나온다고 주장하는 견해다. 미덕은 찬양할 만한 혹은 바람직한 인격적 자질과 지성을 가리킨다.

세 가지 접근 방식 모두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윤리적 도전에 직면할 때 이것이 바로 성경적 대처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령 - 정언명령

우리 사회의 다수가 절대 명제는 케케묵은 것이라고 말할 테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말씀하신 도덕적 하나님의 부르심 아래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다. 십계명이 하나의 본보기다. 이를 장터에 적용해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1.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다른 신들을 우리 앞에 두지 말 것. 우리는 진정 궁극적 존재이신 그분 말고는 그 어떤 것-소비주의나 경력 등-도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2. 우상숭배자가 되지 말 것.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의 형상들을 만들어 (예: 돈, 섹스, 권력) 그것을 궁극적 관심사로 삼아서는 안된다.

3.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지 말 것. 하나님을 조종함으로 그 이름을 헛되게 만드는 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사람들을 조작하기 위해 하나님의 팔을 비트는 행위, 우리 사회의 대표적 교회나 교단을 들먹여 선거에서 표를 얻거나 물건을 판매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일 등을 해서는 안된다.

4. 안식일을 지키는 것. 일주일 내내 일에 파묻혀, 일에서 정체성을 찾아서는 안된다.

5. 노인을 공경하고 가족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 그리고 나이 많은 직원을 임금이 싸다는 이유로 젊은이로 교체하지 말라.

6. 사람들을 제거하거나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함으로써 혹은 어떤 상품과 서비스로 그들을 해롭게 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살인하지 말라.

7. 순결을 지키고 성적으로 배우자에게 충실함으로 간음을 저지르지 않는 것.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려고 선정적 이미지와 공상을 사용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 것. 타인에게 속한 것을 취하지 말고, 직원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거나 채권자에게 빚을 떼먹지 말라.

9. 광고와 판매 시 거짓 증거를 대지 말고 진실을 말하는 것. 경쟁력을 높일 요량으로 똑같은 내용물에다 ‘신제품’이니 ‘개량상품’이니 하는 딱지만 붙이지 말라.

10. 탐하지 말 것.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 모습과 소유에 자족하는 것. 광고를 통해 과도하고 불건전한 욕구를 자극하지 말라.

그러면 오늘날 십계명을 좇아야 하는가? 루이스 스미드즈는 이를 “인간 공동체를 위한 생존 지침”이라고 한다. 존 라치는 십계명 같은 규약을 따른다는 것이 매번 바른 행동을 보증하지는 않지만 바른 일을 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고 말한다.

한편 예수님은 율법 전체를 두 개의 큰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22:37-39)

그런데 사랑만 있으면 충분한가? 사랑인가, 사랑과 정의인가? 사랑이란 남을 사심 없이 섬기는 것이다. 정의란 공평함과 공정함, 바른 일을 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루이스 스미드즈는 사랑과 정의 둘 다 필요하다는 논점을 편다.

“정의는 우리에게 규율을 지키도록, 특히 ‘그대는 …을 하지 말라’는 명령들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은 부정적 계명들을 긍정적 초대로 바꿔 유익을 창조하라고 한다. 정의와 사랑은 다른 계명들을 가리키고 있는 삶의 절대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 왜 정언명령에 순종해야 하는가? 신구약을 통틀어 순종의 동기가 되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다. 이는 영성의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책무가 있으며, 하나님을 힘입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도에 우리의 삶과 행동을 맞추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레11:44)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분의 법을 우리 마음 판에 기록하리라고 혹은 그 법이 우리의 동인이 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고(렘31:33), 에스겔은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우리 속에 두어 “너희로 내(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라고 예언했다(겔36:27).

결과-목표 혹은 결말

때로 ‘공리주의적’이라 불리기도 하는 목적론적 접근에서는 결과-보통은 최대의 善-가 도덕적 정당성을 좌우한다. 신구약 성경에는 사람들이 결말에 비추어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예: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과 약속을 믿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 및 그 나라의 도래를 바라고 이스라엘 스파이들을 숨겨줬던 여리고의 창녀 라합, 야곱의 여러 행적들, 눅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 등)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결말을 고려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 결말이 하나님의 통치가 뚫고 들어오는 데 기여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목적을 반영하는가? 사회에 정의를 가져오는가?

이글 커뮤니케이션 회사 사장인 피터 차오는 개인적 결과들을 바탕으로 도덕적 행위를 시험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 수면 테스트 : 내가 이 일을 하면 밤에 잠을 잘 수 있을까?

‧ 신문 테스트 : 만일 이 일이 조간신문의 전면을 장식한다면, 내가 하겠는가?

‧ 거울 테스트 : 내가 이 일을 하면, 거울 앞에 섰을 때 나 자신에 대해 거리끼지 않을까?

‧ 어린이 테스트 : 내가 이 일을 하면, 거리낌 없이 십 대 자녀에게 얘기해 줄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우리 행동의 최상의 ‘결말’ 혹은 목적은 사랑을 표현하는데 있다. 라틴어 카리타스(caritas)나 그리스어 아가페(agape)는 무조건적 배려요 남을 위해 최상의 것을 베푸는 행위이다.

성품-덕의 윤리

윤리에 대한 세 번째 접근은 덕 혹은 성품을 중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는 바른 행동이란 의롭고 덕스러운 성품에서 나온다는 생각이다.

덕이란 선을 행하려는 습성이다. 덕은 규율이 아니라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교회의 전통은 오랫동안 정의, 신중함, 중용, 용기를 강조해 왔고, 거기다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신학적 덕들’을 추가했다.

정의는 공평함과 관련이 있다. 이는 권리와 자격을 달아 보고 사람과 조직을 존엄하게 대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사업의 맥락에서, 정의의 덕은 정신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법에 순복하는 것을 하나의 원칙으로 단언한다. 하지만 정의는 이런 공식적 의미에서의 합법성 획득을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서로 상충된 이해관계들을 올바로 가늠해 볼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신중함은 과거로부터 배우는 일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라이트는 신중함이란 “당장의 만족을 차후로 미룰 수 있는 능력과 … 어떤 행위의 즉각적 결과를 뛰어넘어 생각할 수 있는 역량”이라고 말한다. 또한 “신중함은 사업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들-신뢰, 충실, 성실-의 뿌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질들 혹은 미덕들은 정직의 개념으로 요약될 수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중용 혹은 절제는 과도한 자기 탐닉과 탐욕을 피하고 우리가 완성할 수 없는 프로젝트를 맡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제약 조건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트는 “부의 창조행위가 유한한 자연 자원의 소비와 관련이 있을 때, 중용은 자원의 착취를 절제하고 자원 사용으로 이룩될 선과 소비되는 자원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맞출 것을 요구한다”고 언급한다.

용기 혹은 인내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성품으로서 불의를 폭로하는데 필요한 덕이다. 라이트는 “용기란 학대, 조롱 혹은 오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잘 버티는 능력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원칙에 충실하려는 태도다. 사업의 맥락에서, 용기는…피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위험부담으로 인한 불안감을 올바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믿음은 우리의 계획 수립에 하나님을 포함시키고 사람들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태도다. 소망은 하나님의 축복을 고대하면서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사람들과 조직체에 충성심을 보여주는 일이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한번 더 상처 입힐 기회를 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모든 덕을 하나로 묶어 주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구현한다. 사랑은 모든 덕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동인이며, 진실성은 덕스러운 삶이 표출된 모습이다. 진실성은 단순한 정직이 아니고 도덕적 부패에서 자유로운 한 사람의 건전성, 온전함, 통합성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나님과 비슷한 의로움을 하나의 포괄적 성품으로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기에,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미6:8)라는 부름을 받았다.

구약성경의 경우 의로운 삶과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이 가진 사랑과 정의의 성품을 본받는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한 윤리적 삶을 살라고 요청하신다. 팔복(마5:3-12)은 예수님이 선포하고 몸소 구현한 그 나라 안에서 사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천명한다. 팔복을 사업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과 타인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자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하는 사람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람들과 조직이 지닌 죄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

‧ 남이 잘 되는 걸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 일이 바르게 성사되길 뜨겁게 갈구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타인이 자기를 낙심시킬 때 오히려 친절과 은혜를 베푸는 사람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일편단심’으로 삶 전체를 하나님과 그 나라에 맞추는 사람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여러 파당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서로 껄끄러워 하는 사람들 가운데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

․ 올바른 일을 하다가 고통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있을까? 그분은 바로 이 땅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성품을 천명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바로 지금 그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울러 거기에는 약속도 있다. 세상적인 재물과 유명세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삶에 완전히 참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궁극적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자력으로 애쓴다고 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은혜는 인간적 노력으로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을 성취해 준다. 그래서 베드로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하나님]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벧후 1:3)

타협은 불가피한가?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타협하고 그 후에 회개하는가? 아니면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지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기까지 하는가? 혹은 개인 윤리에서는 타협을 하지 않되 사회생활은 그와 달라야 한다고 인식하여 일종의 수륙양용 기능을 발휘하는가?

윤리적 의사 결정의 영성에 관해 다음의 성찰을 살펴보자.

“성찰적인 임원은 ... 일상적인 경험을 회심에의 부르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살아가며, 남을 위해 중보하는 자요, 사업상 결정을 내릴 때 ‘타협적 거래’라는 참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끊임없는 타협의 필요성을 고려하는 자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알면서 움직이는 자요, 날마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조정 현상을 오래도록 열심히, 선지자적 눈으로, 비전을 품고 바라보는 자요, 가능한 대로 편견, 선입견, 오랜 적대감과 분쟁을 제쳐 놓는 자요, 화해와 연대감과 자매 관계와 형제 관계를-그리고 무엇보다 공손한 태도를-갈망하는 자다.”

윤리적 의사 결정의 영성은 네 가지 차원을 갖고 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정언명령, 곧 십계명과 함께 사랑과 정의라는 쌍둥이 법을 귀하게 여기고 가슴에 품는다. 둘째,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취할 행동이 그 목적에 걸맞은 결과를 낳을지 고려한다. 셋째,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숨을 쉬며, 그 영이 우리 속에 덕스러운 삶을 빚어내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도덕적 행위를 습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끝으로, 은혜와 용서에 힙입어 살아간다. 우리는 때로 실수를 할 터이고, 타협도 하며, 때로는 선보다 악을 더 행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말한 것처럼, “담대하게 죄를 짓되 예수를 그보다 더 담대하게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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