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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상생활사역연구소 &amp;gt; 미션얼 운동 (Missional Movement) &amp;gt; 평화만사</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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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5월 미션얼사연 | &lt;평화만사&gt; 일교차와 평화</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10</link>
<description><![CDATA[<p>* 평화만사 페이스북 페이지: <a href="https://www.facebook.com/peacemakers10004" rel="nofollow">https://www.facebook.com/peacemakers10004</a></p>

<p>* 다니엘 성경공부 유튜브 재생목록: <a href="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Go0edfto3lNVOVcuo8bD5z2v_a37--F1" rel="nofollow">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Go0edfto3lNVOVcuo8bD5z2v_a37--F1</a></p>

<p> </p>

<p>날씨가 더워지는 것 같아 긴옷을 정리하고 반팔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습니다. 성급했습니다. 일교차가 크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합니다. 평화가 찾아온 것 같지만,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부는 시공간이 남아 있는 우리 일상을 자각하게 하는 찬바람입니다. 최근 의미 있는 모임에 연이어 참석하며 이 차가운 바람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평화의 길을 생각했습니다.</p>

<p> </p>

<p><strong>첫째, "기독 신앙과 한반도 평화"모임입니다.</strong></p>

<p><strong><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59920.527.jpg" alt="1982297825_1777559920.527.jpg" /></strong></p>

<p>4월 24일에 열린 "기독 신앙과 한반도 평화" 모임은 평화만사 홍정환 대표가 사회로 섬기며 진행되었습니다. 강사로 나선 전우택 교수는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극심한 내부 갈등과 높은 자살률의 기저에 분단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남과 북이 나뉘어 대립하는 오랜 시간이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상처를 남긴 것입니다. 통일은 단순히 제도를 결합하는 물리적 통합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남북한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한 황폐함을 온전히 회복하는 사회 정신의학적 치유의 과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59928.5365.jpg" alt="1982297825_1777559928.5365.jpg" /></p>

<p>치유의 과정을 위해 불완전한 파트너인 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오만함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상대를 정죄하고 우리 기준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태도로는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아무런 자격이 없을 때 먼저 은혜를 입었다는 "십자가의 모순"을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구원받았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기 인식이 전제될 때 비로소 상대를 향한 진정한 긍휼을 품을 수 있습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59936.3052.jpg" alt="1982297825_1777559936.3052.jpg" /></p>

<p>분단의 척박한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갈등과 대립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도 폭력과 증오의 방식에 함몰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미움이 피어나는 자리에 화해의 씨앗을 심고 묵묵히 평화를 선택하는 단호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답게 먼저 손을 내밀고 일상의 틈새에서 평화를 일궈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입니다. 구체적이고 작은 화해의 실천들이 모일 때 차가운 분단의 현실 속에서도 굳건한 평화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59942.7329.jpg" alt="1982297825_1777559942.7329.jpg" /></p>

<p> </p>

<p><strong>둘째, "상처, 예술을 만나 별이 되다"라는 주제로 열린 최설화 교수의 브라운백 토크입니다.</strong></p>

<p><strong><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59779.2994.jpg" alt="1982297825_1777559779.2994.jpg" /></strong></p>

<p>4월 30일에 진행된 브라운백 토크에서는 최설화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 삶과 사역의 여정을 나누었습니다. 연극배우인 최 교수의 작품활동은 대중의 박수를 받는 화려한 무대가 아닌, 소외된 삶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기지촌 여성, 보호종료 청소년, 중증 질환 환아 가정 등 사회적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대상이자 주체였습니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해 세상과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던 상처를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아 별처럼 빛나게 만드는 작업이지요.</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59810.8186.jpg" alt="1982297825_1777559810.8186.jpg" /></p>

<p>무대 위에서 펼쳐진 연극은 단발성 공연으로 끝나지 않고 끈끈한 일상의 연대로 이어졌습니다. 10년간 집 밖을 나서지 못한 중증 환아 가정을 직접 찾아가 거실에 돗자리를 펴는 "소풍" 프로젝트, 기지촌 할머니들의 훼손된 존엄을 긍정하기 위해 오디오 산책 지도를 제작하고 화요 예배를 드리는 일은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거창한 사회적 담론을 확산하는 것보다, 소외된 이들 곁에 묵묵히 머물며 세밀한 관계를 맺는 데 사역의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상 속에서 진정성 있게 맺어가는 끈끈한 관계들이 곧 예술이 빚어낸 평화가 아닐까 싶었습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59818.2049.jpg" alt="1982297825_1777559818.2049.jpg" /></p>

<p>인상적인 점이 있었습니다. 창작자로서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최 교수의 윤리였습니다.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의 비극을 자극적으로 소비하거나 대상화하는 방식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워크숍을 통해 수집한 당사자들의 절절한 이야기는 반드시 전문 작가의 섬세한 재창작 과정을 거쳐 작품이 된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주체가 다시금 상처받지 않도록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랍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59793.8892.jpg" alt="1982297825_1777559793.8892.jpg" /></p>

<p> </p>

<p><strong>다시 평화를 생각했습니다.</strong></p>

<p>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 단절된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들이 공동체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구체적인 환대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곁에 머물며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끈끈한 삶의 기반이 곧 진정한 평화입니다. 거대하고 관념적인 구호보다 작지만 진실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 평화의 토대가 됩니다.</p>

<p>예술과 신앙은 상처받은 이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훌륭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리를 튼튼하게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다만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대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먼저가 되어야 하겠지요.</p>

<p>숨겨진 이웃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기꺼이 곁을 내어줄 때 우리의 일상은 곧 사역이 됩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뼈아픈 상처를 직면하고 단절된 세계를 연결할 때 비로소 무너진 곳들이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살 궁리를 멈추지 않는 실천적 발걸음이 지속되기를 소망합니다. 곳곳의 실천들을 통해 "평화가 만사"라는 고백이 우리 사회 곳곳에 온전히 스며들기를 기대합니다. 아직 찬바람이 불고 있지만, 햇볕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습니다.</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Thu, 30 Apr 2026 23:19:13 +0900</dc:date>
</item>


<item>
<title>브라운백 토크 후기</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9</link>
<description><![CDATA[<h2><strong>브라운백 토크 후기<br />
_ 상처, 예술을 만나 별이 되다</strong></h2>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60787.2154.jpg" alt="1982297825_1777560787.2154.jpg" /></p>

<p>4월 30일에 LAMS Korea, 부산외대 교수 신우회, 일상생활사역연구소가 함께 준비한 브라운백 토크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연극배우이자 극단 "프로젝트 타브(Theatre And Value)" 대표, 기지촌 여성 평화박물관 "일곱집매" 관장으로 활동 중인 최설화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 "상처, 예술을 만나 별이 되다"라는 주제로 삶과 사역의 여정을 나누었습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5/1982297825_1777562096.309.jpg" alt="1982297825_1777562096.309.jpg" /></p>

<p><strong>소외된 목소리를 복원하는 예술</strong></p>

<p>최설화 교수의 작업의 중심은 화려한 무대가 아닙니다. 기지촌 여성, 쉼터 및 보호종료 청소년, 중증 질환 환아 가정 등 사회적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삶 한가운데서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없는 이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발굴해 세상과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p>

<p><strong>관계가 빚어내는 연대</strong></p>

<p>연극은 한시적인 공연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의 돌봄으로 이어집니다. 10년간 집 밖을 나서지 못한 중증 환아 가정을 찾아가 거실에 돗자리를 펴는 "소풍" 프로젝트, 기지촌 할머니들의 존엄성을 긍정하는 오디오 산책 지도 제작과 화요 예배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거창한 담론의 확산보다, 소외된 이들의 곁에 머물며 끈끈하고 세밀한 관계를 맺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60886.6898.jpg" alt="1982297825_1777560886.6898.jpg" /></p>

<p><strong>함께 살 궁리</strong></p>

<p>타인의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될 때, 비로소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궁리하게 됩니다. 최 교수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일로 묵묵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애써 외면해 온 세계를 조명하고 단절된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예술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투영하는 훌륭한 사역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타인의 고통 곁에 머무는 진정한 연대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p>

<p><strong>연대가 만드는 평화</strong></p>

<p>평화는 단절된 관계의 회복이자, 소외된 이들이 공동체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는 과정입니다. 기지촌 여성과 쉼터 청소년, 환아 가정의 이야기를 세상과 연결하는 최 교수의 예술 작업은 그 자체로 치열한 평화 운동입니다. 거창한 구호가 없어도 누군가의 곁에 머물며 일상을 나누는 환대의 행위가 삶의 기반을 다지는 진정한 평화임을 잘 보여줍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60899.0152.jpg" alt="1982297825_1777560899.0152.jpg" /></p>

<p><strong>고통을 다루는 창작자의 엄격한 윤리</strong></p>

<p>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점은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비극을 자극적으로 소비하거나 대상화하는 방식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워크숍을 통해 수집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반드시 전문 작가의 재창작 과정을 거칩니다. 이야기의 주체가 상처받지 않을 안전한 거리를 확보함과 동시에, 예술이 가진 은유의 힘으로 사안을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조명하기 위함이랍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1982297825_1777560796.3759.jpg" alt="1982297825_1777560796.3759.jpg" /></p>

<p><strong>평화가 만사</strong></p>

<p>예술이 상처받은 이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면, 그 다리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딛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태도가 수반되어야겠지요. 연극이 끝난 후에도 이어지는 화요 예배와 소풍 프로젝트처럼, 삶의 현장에서 지속되는 구체적인 연대가 평화를 완성합니다.</p>

<p>숨겨진 이웃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곧 사역이 됩니다. 애써 외면했던 상처들을 직면하고 단절된 세계를 연결할 때 비로소 무너진 곳들이 다시 세워집니다.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살 궁리를 멈추지 않는 실천적 발걸음 속에, "평화가 만사"라는 고백이 우리 사회 곳곳에 온전히 스며들기를 기대합니다.</p>

<p>_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Thu, 30 Apr 2026 22:56:29 +0900</dc:date>
</item>


<item>
<title>기독 신앙과 한반도 평화</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8</link>
<description><![CDATA[<h2>기독 신앙과 한반도 평화<br />
_ 통일은 남북한 내면의 깊은 상흔을 치유하는 과정</h2>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3035095911_1777097012.9411.jpg" alt="3035095911_1777097012.9411.jpg" /></p>

<p>4월 24일 오후 7시, 평화만사는 한반도의 화해와 치유를 모색하는 "기독 신앙과 한반도 평화" 모임에 함께했습니다. 강연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이자 사회치유연구원 화평 대표인 전우택 교수가 맡았으며 평화만사 홍정환 대표는 사회를 맡았습니다. 전 교수는 정신과 전문의로서 탈북민과 집단 트라우마를 평생 연구해 왔으며, 한반도 평화연구원 원장과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이 분야의 권위자입니다.</p>

<p><strong>우리 안의 딜레마와 적대적 두 국가론</strong></p>

<p>전우택 교수는 한국 사회가 처한 독특한 딜레마를 짚으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북한으로부터 가장 큰 안보 위협을 받는 동시에, 북한 주민의 고통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지원에 앞장서는 나라입니다. 특히 2023년 12월 북한이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통일과 화해라는 단어를 삭제한 상황에서, 이러한 지원과 대화가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한 남남갈등도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3035095911_1777097034.4165.jpg" alt="3035095911_1777097034.4165.jpg" /></p>

<p><strong>분단 트라우마: 한국 사회의 내면적 황폐함</strong></p>

<p>전 교수는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극심한 내부 갈등의 원인을 분단 트라우마에서 찾았습니다. 6.25 전쟁 당시 이념이 다르면 가족조차 의심하고 제거해야 했던 비극적 경험이 우리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트라우마는 세대를 넘어 전이되며,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사회적 병리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통일은 단순한 제도의 합병이 아니라, 남북한 사람들의 내면세계에 자리 잡은 황폐함을 치유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3035095911_1777097049.0893.jpg" alt="3035095911_1777097049.0893.jpg" /></p>

<p><strong>불완전한 파트너를 대하는 시각</strong></p>

<p>우리는 북한이라는 파트너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넬슨 만델라가 불완전한 상대였던 드 클라르크와 손을 잡았던 것처럼, 파트너의 불완전성은 현실의 불가피한 조건입니다. 또한, 북한을 도울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태도는 '오만함'입니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돕는 것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정상 국가의 기준과 다른 북한의 모습에서 오는 모순을 견뎌내며 큰 그림을 그려나가야 합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3035095911_1777097057.8689.jpg" alt="3035095911_1777097057.8689.jpg" /></p>

<p><strong>기독교 신앙과 십자가의 모순</strong></p>

<p>강연의 핵심은 "십자가의 모순"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분단과 북한의 모순된 모습 속에서도 화해를 꿈꿀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고백은 한반도에서 가장 절실하게 실천되어야 할 신앙적 과제입니다.</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4/3035095911_1777097071.9989.jpg" alt="3035095911_1777097071.9989.jpg" /></p>

<p><strong>치유의 여정, 통일</strong></p>

<p>전우택 교수는 탈북민과의 만남을 계기로 북한 연구를 시작하며, 분단 문제가 북한만의 사안이 아닌 남한 내면의 깊은 병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자살률과 사회적 신뢰 붕괴의 기저에 생존을 위협받아온 분단의 상처가 깔려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일을 단순한 체제 결합이 아닌, 남북한 모두의 정신적 황폐함을 회복하는 사회 정신의학적 치유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p>

<p>이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역할은 세상의 증오에 함몰되지 않고 화해와 용서라는 당당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비록 일부의 배타적인 태도가 우려를 낳기도 하지만, 기독교 역사는 언제나 깨어 있는 소수에 의해 생명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교회는 미래 세대에게 혐오 대신 평화의 가치를 전달하며, "십자가의 모순" 즉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먼저 다가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모순 가득한 현실을 끌어안는 화평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p>

<p>강의 시작전의 대화를 통해, 많은 참석자들의 관심은 "통일"보다는 "평화"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통일을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강연은 통일을 우리 사회의 내면을 회복하는 숭고한 치유의 과정으로 재정의하도록 깊은 울림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고 각자의 일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동역자가 될 것을 다짐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단이 한반도의 온전한 회복과 더 큰 차원의 평화를 일구어가는 마중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p>

<p>_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br />
 </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25 Apr 2026 15:04:34 +0900</dc:date>
</item>


<item>
<title>평화를 깨뜨리는 종교</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7</link>
<description><![CDATA[<p>수요일 아침,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늘 그렇듯 "시냇가에심은나무" 진도에 따른 묵상 나눔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마주한 요한복음 9:24-34 말씀이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마침내 빛을 선물 받았지만, 그 기적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내뱉은 한 마디가 유독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p>

<p>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눈을 뜨게 해주신 사람을 거칠게 몰아세우며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우리가 알기에 그 사람은 죄인이다." 모순 그 자체인 짧은 문장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본디 창조주를 향한 벅찬 감격이자,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찬양의 언어입니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의 입술을 거쳐 나온 이 거룩한 표현은 곧바로 누군가를 옭아매는 무서운 칼날로 돌변했습니다. 은혜를 경탄해야 할 자리에 정죄와 배제의 언어가 이어졌습니다. 거룩한 언어를 빌려 이웃을 찌르는 광경은 인간의 자기 의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p>

<p>원래 종교(religion)가 감당해야 할 진정한 역할은 끊어지고 파편화된 세상을 다시 하나로 묶어주는 데 있습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품어 안고, 무너진 관계의 다리를 다시 잇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참된 목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의 수호자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그들은 교리와 편견에 갇혀,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을 보면서도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몰차게 갈라놓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분을 죄인으로 몰고, 기적을 체험한 이를 공동체 밖으로 내쫓으며 견고한 차별의 벽을 높이 쌓아 올립니다. 눈을 뜬 사람은 진짜 구원자를 알아보았지만, 정작 눈을 뜨고 있다고 자부하던 종교인들은 철저히 눈이 먼 상태였습니다.</p>

<p>본문의 거울 앞에 서면, 그 속에 비친 모습이 비단 이천 년 전 바리새인들만의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신뢰를 잃어가는 한국 기독교의 씁쓸한 단면이자, 저의 부끄러운 민낯이기도 합니다.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나와 다른 이를 너무나 쉽게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의 이름으로 나와 너를 가르고 배타적인 울타리를 치는 데 골몰하지는 않았는지 아프게 돌아봅니다. 우리는 평화를 일구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날 선 잣대로 평화를 해치고 이웃을 밀어내는 사람일까요.</p>

<p>우리 주님은 보좌를 떠나, 차별과 혐오로 갈가리 찢기고 깨어진 이 땅 한가운데로 친히 오셨습니다. 누구도 만지려 하지 않던 사람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발라주시며 하늘의 참된 평안을 선물하셨습니다. 그 따뜻한 손길과 포용의 발자취를 뒤따르기를 원합니다. 거룩한 말로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갈등의 골짜기를 메우며 십자가의 샬롬을 삶으로 빚어내는 진정한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p>

<p>-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Wed, 01 Apr 2026 14:52:32 +0900</dc:date>
</item>


<item>
<title>4월 미션얼사연 | &lt;평화만사&gt; 쓰레기 봉투와 평화</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6</link>
<description><![CDATA[<p>* 평화만사 페이스북 페이지: <a href="https://www.facebook.com/peacemakers10004" rel="nofollow">https://www.facebook.com/peacemakers10004</a></p>

<p>* 다니엘 성경공부 유튜브 재생목록: <a href="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Go0edfto3lNVOVcuo8bD5z2v_a37--F1" rel="nofollow">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Go0edfto3lNVOVcuo8bD5z2v_a37--F1</a></p>

<p> </p>

<p>쓰레기 봉투가 필요해 늘 가던 동네 마트엘 갔습니다. 늘 쉽게 살 수 있던 쓰레기 봉투 하나를 사지 못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작은 리듬이 어긋났습니다. 전쟁 때문에 쓰레기 봉투 원료의 수급에 문제가 생긴 탓이랍니다. 쓰레기 봉투를 사재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뒤늦게 들렸습니다.</p>

<p>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식은 우리 일상을 흔들리게 합니다. 먼 곳의 비극에 마음 아파하며 공감하긴 하지만, 사실 내 구체적인 일상이 흔들릴 때면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그야말로 "평화가 만사"라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p>

<p>평화만사는 3월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길벗들과 함께 구약 성경 다니엘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깊이 배우고 있습니다. 길벗들과 함께 발견한 평화의 메시지 세 가지를 나눕니다.</p>

<p><strong>첫째, 역사의 참된 주관자는 제국이 아닌 하나님입니다.</strong></p>

<p>제국은 거대한 금 신상처럼 영원하고 압도적인 권세를 지닌 듯 보입니다. 무력을 앞세워 모든 것을 통제하며 우리의 일상을 위협합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만 보면 거대한 폭력의 제국이 승리한 것처럼 느껴지기 쉽습니다. </p>

<p>하지만 폭력 위에 세워진 나라는 결국 무너질 운명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날아든 작은 돌 하나가 거대한 신상을 완벽히 해체합니다. 폭력적인 억압이 사라진 그 자리에 보편적인 평화가 임합니다. 제국 한복판,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만이 참된 소망의 근거입니다.</p>

<p><strong>둘째, 평화는 일상의 작고 단호한 선택에서 시작됩니다.</strong></p>

<p>바빌로니아는 강력한 물리력뿐만 아니라 교묘한 문화적 동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포로들의 이름을 바꾸고 제국의 학문을 가르치며 왕의 식탁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억압적인 체제 속으로 그들을 흡수하여 여호와 신앙의 정체성을 지우려 한 것입니다.</p>

<p>다니엘이 채식을 결단한 행동은 패권을 숭배하는 제국의 방식에 투항하지 않겠다는 거룩한 저항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일상의 작은 주도권을 지켜낸 것입니다. 거대한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제국의 방식에 함몰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실천하며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일상의 투쟁이 필요합니다.</p>

<p><strong>셋째, 폭력의 악순환은 비폭력과 기도의 연대를 통해 끊어집니다.</strong></p>

<p>제국은 스스로 통제력을 잃을 때 극단적인 폭력을 드러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지혜자들을 모두 몰살하라는 무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면의 불안을 타인을 향한 학살로 해소하려 한 권력의 민낯입니다.</p>

<p>다니엘과 친구들은 권력의 광기 앞에서도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분노 대신 슬기롭고 조심스러운 말로 대처하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모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제국의 폭력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힘은 더 강한 칼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신앙 공동체가 맺는 기도의 연대와 하늘로부터 오는 온유한 지혜가 진정한 평화를 빚어냅니다.</p>

<p><strong>한편 모임 중 흥미로운 질문도 오갔습니다.</strong></p>

<p>"다니엘 일행을 관리한 총 책임자가 환관장이었는데, 다니엘도 환관이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니엘 역시 환관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제국은 자신들만의 거짓 평화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점령지의 총명한 소년들을 거세하여 곁에 두는 폭력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39:7)의 예언과 유대 전통 문헌들 역시 이를 뒷받침합니다.</p>

<p>구약 율법에 따르면 신체가 상한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제국의 폭력에 의해 몸의 온전함(샬롬)을 무참히 빼앗기고, 종교 공동체에서도 배제될 위기에 놓인 뼈아픈 희생자였습니다.</p>

<p>그럼에도 그는 억압자들을 향해 복수의 칼을 쥐거나 깊은 절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폭력적인 현실 한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과의 언약을 붙들며 내면의 굳건한 평화를 지켜냈습니다. 하나님은 신체의 결함이나 율법의 잣대를 넘어, 상처 입은 그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품어주셨습니다. 제국의 잔혹한 억압을 뛰어넘어, 무너진 삶을 회복시키고 영광스럽게 하는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다니엘의 삶이 묵묵히 증명하고 있습니다.</p>

<p>(함께 공부한 내용은 유튜브 채널 "일상영성"과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웹사이트 "ELBiS Club" 클럽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p>

<p>폭력의 제국에서 평화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고민은 계속됩니다.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은 분들을 위해 모임의 문을 여전히 열어두고 있습니다.</p>

<p>&lt;바빌론에서 살아남기&gt;<br />
(부제: 폭력의 제국에서 평화의 나라 백성으로 존재하기)<br />
(1) 언제: 3월 9일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7시<br />
(2) 어디서: 레인트리 (금정구 중앙대로 2066, 4층)<br />
(3) 진행자: 홍정환 목사<br />
(4) 참가비: 회당 5,000원 (따뜻한 커피와 김밥이 기다립니다!)</p>

<p>참가신청<br /><a href="https://forms.gle/bYEeWaLVpqx8DedC6" rel="nofollow">https://forms.gle/bYEeWaLVpqx8DedC6</a></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20:42:04 +0900</dc:date>
</item>


<item>
<title>굽은 나무와 일상의 평화</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5</link>
<description><![CDATA[<p>오늘 일상생활사역연구소 미팅에서 요한복음 6:60-71(시냇가에심은나무 진도에 따라)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문득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는 말씀을 읽으며 오래전 읽은 비즈니스 서적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구조 조정 정책이 결정되면 시행 전까지 최대한 정보 공개를 늦추라. 정보가 미리 흘러나가면 역량 있는 이들이 가장 먼저 조직을 떠난다. 남은 사람은 이직 역량이 없는 사람들이다. 결과적으로 조직이 약화된다." 어쩌면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잘 알아들어서 떠난 게 아니었을까요? 로마를 뒤집고 새로운 권력이 되실 예수님을 여전히 기대하는 무리 중, 그들만이 예수님 말씀이 은유가 아닌 사실임을 알아차렸다고 상상(!)해보았습니다.</p>

<p>상상을 이어갔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낯선 말씀을 들은 그들은 명석한 두뇌로 빠르게 손익 계산을 끝냈습니다. 이 길의 끝에는 찬란한 옥좌도, 정치적 해방도, 떨어질 떡고물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0절)라고 수군거렸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무얼 말씀하시는지, 그 말씀에 따르면 자기 삶 전체를 내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가장 눈치 빠르고 상황 판단력이 뛰어난 자들, 능동적으로 자신의 활로를 개척할 줄 아는 역량 있는 엘리트들이 가장 먼저 예수라는 위태로운 배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다가올 십자가의 파국을 너무나도 기민하게 읽어낼 수 있는 이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했습니다.</p>

<p>반면 똑똑한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열두 명의 제자들을 상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67절)라고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는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68절)라고 대답합니다. 위대한 신앙고백이지만, 제 상상 속에선 처절하고 솔직한 무능력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유력한 랍비나 정치 세력에게 갈아탈 재주가 없었습니다. 주님 곁이 아니면 도무지 숨 쉴 곳조차 찾지 못하는, 철저히 무력한 자들만이 남은 것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하나 남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악마"라고 부르신 가룟 유다가 섞여 있었습니다(70-71절). 예수님의 공동체는 엘리트들의 순결하고 견고한 결사체가 아니라, 눈치가 없어 떠나지도 못하는 우직한 이들과 배신을 잉태한 어두운 영혼이 한데 엉켜 있는 연약함의 전시장과도 같았습니다.</p>

<p>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65절)고 선언하십니다. 뛰어난 지성과 합리성의 소유자들은 위기 속에서 활로를 기막히게 찾아내지만, 정작 진리의 곁에서는 이탈했습니다. 아무 대안이 없어 빈손으로 서 있는 자들, 자신의 연약함을 끌어안고 덜덜 떠는 이들만이 은혜라는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그 미련한 자리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습니다.</p>

<p>요즘 제 삶을 생각해봅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영리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지요. 최근 전쟁의 소식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하메네이와 트럼프 중 누가 더 악한 존재인지, 파편적으로 쏟아지는 국제 정세의 정보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가려내려 애쓰고 있습니다. 거대한 구조와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쪼개어 분석하는 지적 유희에 몰두하면서, 정작 그 전쟁의 폭력 아래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며 고통받는 구체적인 인간들의 신음 소리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머리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하느라 쉴 새 없이 회전하지만, 상처 입은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데는 게으릅니다.</p>

<p>우리 속담에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했습니다. 곧고 반듯하여 재목으로 쓰기 좋은 나무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 일찌감치 베어져 화려한 기둥이 되거나 값비싼 가구로 팔려 나갑니다. 그러나 이리저리 휘어지고 옹이가 박혀 쓸모없어 보이는 굽은 나무만이 산에 홀로 남아, 마침내 산새들을 품고 비바람을 막아내며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을 묵묵히 지켜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난 유능하고 곧은 나무들과 달리, 열두 제자들은 갈 곳 없는 굽은 나무가 되어 생명의 곁을 지켰습니다.</p>

<p>똑똑하고 영리한 사람, 곧고 아름다운 나무 되기를 포기하는게 참 어렵네요. 머리 덜 굴리고, 트렌드에 조금 뒤처지더라도 우직하게 주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세계의 악을 징벌하고 판별하는 거창한 일은 주님의 주권에 겸손히 맡겨두고, 당장 곁에 있는 이들에게 작게라도 시간을 내어주고 필요한 것을 나누는 일에 힘쓰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굽은 나무로 묵묵히 일상에 평화의 그늘을 드리우는 것을 배우고 실천해야겠습니다.</p>

<p>평화~</p>]]></description>
<dc:creator>상선약수</dc:creator>
<dc:date>Wed, 11 Mar 2026 11:55:33 +0900</dc:date>
</item>


<item>
<title>3월 미션얼사연 | &lt;평화만사&gt; 평화만사의 새로운 여정</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4</link>
<description><![CDATA[<p>'평화만사'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운동에 몸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거창한 업적을 세우기보다, 먼저 우리 곁에 이미 존재하던 평화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걷기 시작한 작은 걸음을 세 가지 공부와 실천으로 나누어 소개합니다.</p>

<h2>1.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평화저널 &lt;플랜 P&gt; 탐독<br /><br /><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2/1930822933_1772283929.866.png" alt="1930822933_1772283929.866.png" /></h2>

<p>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며 제가 가장 먼저 세운 원칙은 겸손한 경청입니다. 제가 앞서서 무언가를 도모하기에 앞서, 이미 이 땅에서 묵묵히 평화의 길을 일궈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먼저 따라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p>

<p>그 배움의 길목에서 만난 것이 바로 평화저널 &lt;플랜P&gt;입니다. 이 저널을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며, 한국 사회의 갈등 구조 속에서 평화가 어떤 모양으로 싹터왔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활자 너머에 담긴 평화 운동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현장의 숨결을 접할 때마다,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게 됩니다. 삶의 고백들을 통해 평화의 지도를 그려나가고 있습니다.</p>

<h2>2. 성서적 평화의 뿌리를 찾아서: 월터 브루그만의 &lt;Peace&gt;</h2>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2/1930822933_1772283959.6759.png" alt="1930822933_1772283959.6759.png" /></p>

<p> </p>

<p>실천적 고민만큼이나 이를 뒷받침할 탄탄한 이론적 토대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약학의 대가인 월터 브루그만의 저서 &lt;Peace&gt;를 곁에 두고 조금씩 공부하고 있습니다.</p>

<p>평화라는 말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먼저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브루그만이 말하는 성서적 평화는 정의와 생명이 충만하게 흐르는 상태입니다. 저자의 글을 읽고 정리하며, 우리 시대가 놓치고 있는 평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곱씹고 있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평화의 가치가 오늘날 파편화된 우리 삶의 현장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뿌리 내릴 수 있을지 탐구하는 이 시간은 저에게 큰 떨림과 지적 자극을 줍니다.</p>

<h2>3. 고난 속에서 꽃피는 평화: &lt;다니엘&gt; 성경 공부의 시작</h2>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2/1930822933_1772283994.2295.png" alt="1930822933_1772283994.2295.png" /></p>

<p> </p>

<p>배움과 성찰은 결국 공동체 안에서 나눌 때 더욱 풍성해진다고 믿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의 일환으로, 오는 3월부터는 평화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lt;다니엘&gt; 성경 공부를 시작합니다.</p>

<p>제국이라는 거대한 힘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평화를 일궈냈던 다니엘의 이야기는, 오늘날 갈등과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lt;다니엘&gt;을 주일학교 아동들을 위한 동기 부여 메시지나 미래를 예언하는 신령한 책으로 보지 않고,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의 태도로 재해석하려 합니다. 이 공부를 통해 각자의 삶터에서 평화의 메신저로 살아갈 힘을 함께 얻기를 소망합니다.</p>

<p>&lt;바빌론에서 살아남기&gt;<br />
(부제: 폭력의 제국에서 평화의 나라 백성으로 존재하기)<br />
(1) 언제: 3월 9일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7시<br />
(2) 어디서: 레인트리 (금정구 중앙대로 2066, 4층)<br />
(3) 진행자: 홍정환 목사<br />
(4) 참가비: 회당 5,000원 (따뜻한 커피와 김밥이 기다립니다!)</p>

<p>참가신청<br /><a href="https://forms.gle/bYEeWaLVpqx8DedC6" rel="nofollow">https://forms.gle/bYEeWaLVpqx8DedC6</a></p>

<h2>평화의 여정을 함께할 길벗들을 기다리며</h2>

<p>공부하며 마주하는 통찰과 소소한 단상들을 앞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공유할 계획입니다. 이 여정이 궁금하시다면 언제든 페이스북 페이지를 방문해 주세요. 페이지를 구독해 주시면 평화의 길을 함께 걷는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동행을 기다리겠습니다.</p>

<p>페이스북 페이지: <a href="https://www.facebook.com/peacemakers10004" rel="nofollow">https://www.facebook.com/peacemakers10004</a></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28 Feb 2026 22:07:23 +0900</dc:date>
</item>


<item>
<title>월터 브루그만의  『평화』 읽기(1)</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3</link>
<description><![CDATA[<h3>『평화(Peace: Understanding Biblical Themes)』 머리말(Preface, 2000년판)</h3>

<p><strong>1. 텍스트의 기원과 실천적 지향</strong></p>

<p>이 책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저자가 다양한 현장에서 발표한 강연록과 에세이의 모음이다. 브루그만은 이 책이 학술적 엄밀함보다 교회적 실천(Church Practice)과 선교적 적실성에 우선순위를 두었음을 밝힌다.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재출판되는 이유는 복음의 공공성과 교회의 사역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여전히 내포하기 때문이다.</p>

<p><strong>2. 1960-70년대의 사회적 풍경과 낙관적 신학</strong></p>

<p>당시 미국 사회는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정치적 암살,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점철된 대격변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은 역설적으로 기존 권위 체제에 대한 의구심과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개방성을 창출했다. 하비 콕스(Harvey Cox)의 "세속 도시"로 대표되는 신학적 기조는 세속화를 신의 구속사적 진보로 수용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저자가 속한 그리스도연합교회(UCC)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샬롬"을 새로운 신학적 슬로건으로 채택하며 세계의 안녕을 위한 변혁적 의지를 표명했다.</p>

<p><strong>3. 낭만적 샬롬 담론의 한계와 비판</strong></p>

<p>과거의 샬롬 담론은 비판적 성찰이 결여된 신학적 낭만주의의 산물이었다. 당시의 샬롬은 단순히 "모두가 좋게 말하고 행동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적 자유주의에 기댔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 구조 내부에 잠재된 악과 착취의 현실을 간과했다. 특히 에밀 뒤르켐이나 탈콧 파슨스의 유기적 사회론에 기반한 사회적 균형(Equilibrium)을 평화와 동일시함으로써, 기득권층이 설계한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우를 범했다. 저자는 이를 "비판적 날카로움이 거세된 얇은 신학"으로 규정한다.</p>

<p><strong>4. 샬롬(Shalom)과 미쉬파트(Mishpat)의 필연적 결속</strong></p>

<p>참된 평화는 정의(Justice, 미쉬파트)와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서만 실체화된다. 브루그만은 유대적 리얼리즘을 수용하여 샬롬이 현재 진행형의 투쟁이며, 불완전한 파편들의 모임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샬롬은 기득권층에게는 현재의 축복이지만,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현재 질서의 전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화는 조화를 넘어,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정치적 억압의 해소라는 구체적 정의를 요구한다. 예언자적 언어는 안일한 균형을 파괴하고 혁명적 방식으로 불의를 교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p>

<p><strong>5. 성서적 근거를 통한 소망의 재구성</strong></p>

<p>저자는 시편 85편, 예레미야 29장, 미가 5장을 통해 평화의 이중성을 증명한다. 평화는 신이 부여하는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응답해야 할 과제다. 시편 85편은 현재의 위기 속에서 신의 구원을 간구하며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미래를 대망한다. 예레미야 29장은 포로기라는 절망적 현실을 딛고 신의 신실함에 근거한 공동체적 안녕(Welfare)을 약속한다. 미가 5장의 메시아적 통치는 도시 엘리트의 지배 논리와 대조되는 낮은 곳으로부터의 질서 재편을 예고한다. 이 텍스트들은 평화가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를 향한 역동적 활동임을 보여준다.</p>

<p><strong>6. 현대 사회의 마취와 교회의 사명</strong></p>

<p>오늘날 소비자 자본주의는 거대한 재화의 바다를 통해 인간의 비판 의식을 마취시킨다. 현대인은 신자유주의 질서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격차를 인식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교회가 내세우는 다문화주의 역시 경제적 정의에 대한 논의를 배제한 채 정치적 권력 배분에만 집중한다면, 1970년대의 낭만적 실수를 반복하는 행위다. 계급과 분배의 문제를 외면한 평화는 허구에 불과하다.</p>

<p><strong>7. 제자도의 비용</strong></p>

<p>성서의 샬롬은 인간의 선호와 관리 양식을 파괴하는 전복적 성격을 가진다. 참된 평화를 수용하는 과정은 본회퍼가 말한 "제자도의 비용"을 요구한다. 평화는 상상력의 빈곤과 용기의 부재를 딛고, 깨어진 현실을 직시하며 신의 신실한 통치를 기다리는 저항적 실천이다. 지식인과 교회는 소비자 지향적 사회의 유혹을 거부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샬롬의 비전을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p>

<p><strong>* 감평</strong></p>

<p>첫째, 한국 교회 주류가 주도하는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은 월터 브루그만이 경계한 "사회적 균형(Equilibrium) 이데올로기"의 전형입니다. 브루그만은 머리말에서 샬롬이 기득권층에게는 기존 질서의 지속이지만, 소외된 자들에게는 체제의 해체임을 명시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집단적 저항은 종교적 자유와 도덕적 가치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소수자의 존재 권리를 유보하여 자신들의 안락한 상태를 보존하는 데 집중합니다. 이러한 보수적 평온 상태의 우상화는 평화를 갈등이 소멸한 정적 상태로 오해한 결과이며, 타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구축된 허구적 샬롬입니다. 성서적 샬롬은 안일한 균형을 파괴하고 약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공동체적 결속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배타적 행보는 성서가 증언하는 샬롬의 전복적 성격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실천적 모순입니다.</p>

<p>둘째, 한국 교회의 정치적 투쟁은 경제적 정의(Mishpat)를 거세한 채 특정 윤리적 의제에만 화력을 집중하는 기만적 도덕주의를 노출합니다. 브루그만은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계급적 소외의 해결 없는 평화는 성립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한국 교회 주류는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하는 구조적 가난과 노동의 소외 문제에는 침묵하면서, 차별금지법과 같은 특정 사안에만 종교적 절대성을 부여하며 대립합니다. 계급적 불평등을 외면한 선별적 도덕주의는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누리는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성서 텍스트를 선택적으로 도구화하는 것입니다. 성서 텍스트는 기성의 관리 방식을 파괴하고 제자도의 비용을 지불할 것을 촉구합니다. 교회가 참된 평화를 회복하려면 도덕적 우월감을 폐기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성서적 비전을 향해 자신의 기득권을 해체하는 예언자적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Feb 2026 05:12:5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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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평화는 조용한 상태가 아닙니다</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2</link>
<description><![CDATA[<p>늦은 밤의 어두운 거실을 상상해 봅니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고, 가족들은 자기 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집은 완벽하게 평화롭습니다. 어떤 싸움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요의 이면에 다른 풍경이 있습니다. 갈등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쌓아올린 마음의 벽과 대화하기를 포기한 사람의 앙다문 입매가 보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상태를 평화라고 착각하며 안도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살아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적막한 공동묘지의 풍경입니다.</p>

<p>성경이 말하는 평화, 즉 샬롬은 결코 이런 정지된 상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복음 14:27) 예수님이 이 말씀 하실 때의 상황을 떠올려 봅시다. 제자 중 한 명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며, 당신은 십자가라는 가장 가혹한 폭력에 희생 되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순간에 평화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평화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라고 도전하십니다.</p>

<p>우리가 기대하는 평화는 조건부입니다. 통장에 잔고가 넉넉할 때, 건강 검진 결과가 깨끗하게 나올 때,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지 않을 때 우리는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외부의 압력이 제거된 상태를 평화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연주를 멈춘 뒤에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정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수십 개의 악기가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화음을 이루며 격렬하게 공명하는 중에 존재합니다.</p>

<p>이것을 기계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고장나 멈춘 엔진은 조용합니다. 소음도 진동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평화가 아닙니다. 건강하게 작동하는 엔진은 뜨겁습니다. 피스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힘찬 소리를 냅니다. 샬롬은 모든 개별 요소가 제 기능을 다 하며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 아무 아무 문제도 겪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친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항해를 계속하는 역동적인 상태입니다.</p>

<p>우리는 사실 평화를 유지한다는 핑계로 얼마나 많은 진실을 외면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갈등이 두려워 적당히 미소 짓고 입을 다뭅니다. 하지만 곪아 터진 상처를 거즈로 덮어놓는다고 해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평화를 가장한 기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때로 우리를 아프게 찌릅니다. 감추어 두었던 위선을 들추어내고, 억눌러왔던 분노와 직면하게 하시며, 깨어진 관계를 복구하기 위해 먼저 손 내미는 수치스러움을 감수하게 하십니다. 십자가가 평화의 상징이 된 까닭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죄가 충돌하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가장 처절한 대가를 치름으로써 진정한 화해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p>

<p>그래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떠드는 이들의 입을 막는 사람이 아니라, 떠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사람입니다. 떠들며 터져나오는 눈물을 닦아주고, 깨어진 마음의 조각들을 이어가는 작업은 결코 조용할 수 없습니다. 통곡이 있고, 호소가 있으며, 사과와 용서라는 힘겨운 결단이 수반됩니다. 수술실에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메스를 대는 순간 피가 흐르지만, 살을 가르고 뼈를 자르는 과정을 통과해 환자는 다시 일어나는 샬롬을 맛봅니다. 우리가 겪는 소란함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려는 거룩한 수술의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자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선 평화를 맛보기 시작할 것입니다.</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06 Feb 2026 14:12:3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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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평화만사 대표 홍정환 목사님을 소개합니다.</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m_mc_rhi3&amp;amp;wr_id=1</link>
<description><![CDATA[<p>2018년 시작된 평화만사(Peacemakers)가</p>

<p>드디어 전임 담당자를 찾게 되었습니다.</p>

<p>전 독서교육 라 대표이신 홍정환 목사님을 중심으로</p>

<p>(재세(침)례를 받으신 명실공히 재침(세)례파 목사입니다.(실은 남침례파 신학교 출신))</p>

<p>일상의 평화를 필두로 평화이슈를 깊게 다루게 될 평화만사 사역을 위해</p>

<p>기도부탁드립니다.</p>

<p> </p>

<p> </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602/1982297825_1770176232.618.jpg" alt="1982297825_1770176232.618.jpg" /></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Wed, 04 Feb 2026 12:40:3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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