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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상생활사역연구소 &amp;gt; ELBiS Club &amp;gt; ELBiS Club</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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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엘비스클럽 다니엘 6장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92</link>
<description><![CDATA[<p>일곱 번째 모임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국이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일상을 지켜낸 다니엘 6장의 묵직한 서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p>

<p><strong>1. 발제</strong></p>

<p>다니엘 6장은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무너지고 메디아-페르시아 연합 제국이 들어선 지정학적 전환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제국은 바뀌었으나 제국주의적 통제와 억압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리우스 왕은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세금 누수를 막기 위해 전국에 120명의 지방장관과 3명의 정승을 세웠습니다. 패망한 이전 제국의 포로 출신인 다니엘이 뛰어난 능력으로 수석 정승에 오르려 한 사실은 페르시아 기득권층에게 엄청난 정치적 위협이었습니다.</p>

<p>정적들은 다니엘의 국정 운영에서 흠을 찾지 못하자 그가 섬기는 신의 법을 정치적 올가미로 사용합니다. 이들이 기획한 30일의 금령은 왕을 유일한 중재자로 격상시켜 결속을 다지려는 정치적 사상 검증이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왕은 우주적 질서를 대리하는 신성한 존재였으므로, 왕의 이름으로 반포된 법을 철회하는 행위는 왕의 무오류성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정적들은 이러한 제국 법의 경직성을 악용해 왕의 손발을 묶었습니다.</p>

<p>금령 문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다니엘은 타협하지 않고 일상의 영성으로 맞섭니다.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을 열고 기도한 행위는 제국의 중심성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삶을 맞추겠다는 강력한 신학적 저항이었습니다.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은 것은 무너진 성전의 상번제를 기도로 대체한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멈추지 않은 평범한 일상의 루틴이 제국에 균열을 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p>

<p>다니엘이 고발당하자 도리어 절대 권력자인 다리우스 왕이 자신이 승인한 법에 갇혀 절망합니다. 거대한 제국의 시스템이 창조자인 왕을 옭아매는 모순이 폭로됩니다. 혼돈과 폭력의 상징인 사자 굴에 던져진 것은 제국에 반역한 자에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막으심으로써, 고대 근동의 신명재판 방식으로 다니엘의 무죄를 입증하십니다. 제국 대법원의 판결을 하늘의 대법정이 뒤집었습니다. 결국 이방 왕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제국 만천하에 선포되며, 타협하지 않은 한 사람의 일상이 궁극적인 선교적 승리를 이룩합니다.</p>

<p><strong>2. 나눔</strong></p>

<p>발제 내용을 바탕으로 일상 속 신앙의 의미를 묻는 깊고 다채로운 대화를 이어갔습니다.</p>

<p><strong>1) 정치 역학과 다니엘의 탁월함: </strong><br />
새로운 제국이 들어섰음에도 다니엘이 어떻게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을까 질문해 보았습니다. 정권의 변화와 무관하게 묵묵히 책임을 다해온 그의 성실한 이력이 뒷받침되었을 것입니다. 폭력적이었던 전조의 왕들과 달리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고 밤새 끙끙 앓는 60대 다리우스 왕의 모습도 낯설고 흥미로웠습니다. 신하들의 견제 속에서 왕권을 굳게 세워야 했던 다리우스의 입장에서는,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업무 능력이 탁월한 다니엘이 반드시 필요한 파트너였을 것입니다.</p>

<p><strong>2) 함정을 향해 걷는 일상의 기도: </strong><br />
다니엘은 연륜이 깊고 정치적 민감성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뻔히 알면서도 일상의 루틴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30일 동안만 속으로 조용히 기도하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선명한 저항을 선택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lt;침묵&gt;에 나오는 "후미에"(성화 밟기)와 나아만 장군의 림몬 산당 제사 일화가 언급되었습니다. 타협의 문을 한 번 열면 정적들의 또 다른 음모가 계속될 것을 알았기에,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행동으로 인지를 돌파해 낸 다니엘의 결단이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누구도 이끌어주지 않는 이방 땅에서 홀로 신앙의 중심을 지켜낸 그의 외로움과 고뇌를 짐작해 봅니다.</p>

<p><strong>3) 다리우스의 숨은 의도와 신명재판: </strong><br />
다리우스 왕이 금령을 반포할 때 정말 다니엘의 기도를 예측하지 못했을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나이가 들어 잠시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이 사건을 기화로 자신을 흔들던 신하들과 그 일족을 한 번에 숙청하려는 "정치 19단"의 큰 그림이었는지 재미있는 상상도 오갔습니다. 또한 사자 굴 사건이 신명재판(神明裁判)이었다는 해석이 공감을 얻었습니다.</p>

<p><strong>4) 참된 번영과 우리 삶의 적용: </strong><br />
28절은 다니엘이 "잘 살았다(prosper)"고 결론 맺습니다. 무탈하고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잘 사는 삶일까요? 신앙의 색깔을 지키며 하나님 백성답게 자유롭게 예배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번영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각자의 일상 속 고민도 나누었습니다.</p>

<p>- 요리사라는 직업 특성상 주일 예배의 자리를 지키기 어려워 갈등하던 지체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바빌론 포로 시절 다니엘이 성전 제사를 대체할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했듯, 우리도 교회 다니는 사람을 넘어 일상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br />
- 사자 굴에 뛰어들어 믿음을 극적으로 증명하고 싶을 만큼, 끝없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버텨내는 것이 때로는 더 버겁게 느껴집니다.<br />
- 기독교 학교에서 일하면서도 각기 다른 신앙의 결을 가진 지친 동료들과 학생들 틈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살기 위해 더욱 기도의 매달려야 합니다.</p>

<p>다니엘처럼 거창한 업적을 세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생겨나도록 소소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며 살길 원합니다. 인생의 고비가 많고 쉽게 가는 법이 없어 불평이 나올 때도 있지만, 훗날 우리 역시 예수 따르는 사람으로 참 잘 살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p>

<p>-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7 Apr 2026 14:23:48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다니엘 5장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91</link>
<description><![CDATA[<p>새로운 지체들이 함께하며 한층 따뜻하고 풍성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정겨운 인사를 나눈 뒤, 화려한 연회장이 순식간에 심판의 현장으로 변하는 다니엘 5장의 긴박한 서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p>

<p><strong>1. 발제</strong><br />
홍정환 목사가 "저울에 달린 제국"이라는 주제로 다니엘 5장의 역사적 배경을 짚었습니다(유튜브 '일상영성' 채널 참조). 기원전 539년 10월의 마지막 밤, 페르시아 군대가 성벽 앞까지 다가온 위기 속에서 벨사살 왕은 귀족 천 명을 모아 대연회를 엽니다. 적군의 포위망 속에서 성벽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퍼포먼스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 기물을 가져와 술을 마신 행위는 바빌론의 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겼다는 오만한 승리 선언이었습니다.</p>

<p>제국의 교만이 정점에 달한 순간,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자를 씁니다. 미지의 글씨 앞에서 절대 권력자는 무릎이 부딪힐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바빌론이 자랑하던 지식 체계는 계시 앞에서 철저히 파산합니다. 이때 은퇴한 듯 보였던 다니엘이 등장합니다. 그는 벨사살이 제안한 "셋째 통치자"라는 막대한 권력을 거절하고, 역사의 주관자를 거역한 왕의 죄를 단호히 지적합니다.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이라는 판결문은 제국의 수명이 다했고, 왕의 함량이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며, 결국 나라가 나뉘게 될 것이라는 준엄한 심판 선언이었습니다. 이 예언은 그날 밤 벨사살의 죽음과 함께 즉각 실현되었습니다.</p>

<p><strong>2. 나눔</strong><br />
발제 후, 텍스트가 주는 긴장감과 오늘날 우리 삶의 지점을 연결하며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p>

<p><strong>1) 호러 영화 같은 심판의 전조, 그리고 오만한 권력:</strong><br />
벽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와 왕의 창백해진 표정은 마치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풍전등화의 국가 위기 상황에서 왜 왕은 하필 성전 기물을 꺼내 술을 마셨을지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도적인 조롱이자 제국의 오만이 극치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권력자가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고 자기 과신에 빠질 때 공동체가 무너지는 징조가 나타난다는 점에 모두 공감했습니다. </p>

<p><strong>2) 이름을 되찾은 다니엘과 역사의 기억:</strong><br />
선대왕의 역사를 기억하던 태후가 나타나 다니엘을 추천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다니엘을 바빌론식 이름인 "벨드사살"이 아닌 원래의 이름 "다니엘"로 부른 대목은, 세속 제국 한복판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온 한 인간의 실존을 드러냅니다. 4장과 5장 사이의 긴 공백기 동안 다니엘이 현직에서 물러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소환되는 그의 영적 존재감이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p>

<p><strong>3) 하나님의 저울과 반복되는 역사의 교훈:</strong><br />
하나님은 쉬지 않고 역사를 계산하고 재보고 계시지만, 정작 인간은 결과가 닥쳐서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곤 합니다. 벨사살은 선왕 느부갓네살의 추락을 알고 있었음에도(22절) 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트럼프 등 현대 정치 지형을 보며, 한 인물이 사라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악과 역사적 반복성 앞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를 방치하지 않으시고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이끌어가신다는 사실에서 소망의 근거를 찾았습니다.</p>

<p><strong>4) 심판과 구원, 그리고 우리의 일상:</strong><br />
제국의 협력자들에게는 섬뜩한 심판의 이야기이지만, 억압받는 포로들에게는 통쾌한 구원의 소식이라는 양면성을 살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다니엘이나 바울 같은 인물이 특별한 영웅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OOO님은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는 분"임을 강조하며 세상의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했고, OOO님은 권력자의 교만을 가만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보고 싶다고 전했습니다.</p>

<p><br />
나눔을 마무리하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할 고백들을 모았습니다. OOO님은 "그렇게 되지 않을지라도"의 정신으로 일상을 충실히 살기로 했고, OOO님은 거창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아이들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주는 소박한 사랑을 갱신하기로 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교만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모임을 마쳤습니다.</p>

<p>-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0 Apr 2026 15:01:2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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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엘비스클럽 다니엘 4장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90</link>
<description><![CDATA[<p>어느덧 다섯 번째 모임을 맞이했습니다. 한결 익숙해진 얼굴들이 마주 앉아, 식사를 곁들이며 자연스럽게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퇴근 직전 갑자기 생긴 업무를 처리하느라 택시를 타고 급히 달려온 지체의 열정이 모임에 큰 활기를 더했습니다. 정겨운 교제 후, 교만의 정점에 섰던 제국의 왕이 어떻게 철저히 낮아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지 다니엘 4장의 극적인 서사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p>

<p><strong>1. 발제</strong></p>

<p>먼저 홍정환 목사가 다니엘 4장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썰"을 풀었습니다(유튜브 "일상영성" 채널에서 볼 수 있음). 다니엘 4장은 제국 전역에 하달된 왕의 공식 칙령 형식을 취합니다. 당대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몰락과 짐승으로 전락했던 과거를 공문서로 반포했습니다. 1인칭과 3인칭이 번갈아 등장하는 서술 구조는 왕의 미치광이 행적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바라보게 만듭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방대한 지혜가 파산하고, 지혜의 주도권은 제국 엘리트들을 떠나 다니엘에게 주어집니다.</p>

<p>왕의 꿈은 고대 근동의 신화적 상징을 차용하여 제국의 교만을 고발합니다. 하늘에 닿은 '우주적 나무'는 피조물인 왕이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려는 교만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감시자가 나무를 베어내라고 선고하는 장면은, 지상 권력이 철저히 하늘 법정의 통제 아래 놓여 있음을 선언합니다. 한편 다니엘은 왕의 파멸 앞에서 통쾌해하지 않고 선교적 긍휼을 품고 유일한 생존 조건을 제시합니다. 제국의 지속 가능성은 군사력이 아니라 약자를 향한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통치에 달려 있습니다. </p>

<p>경고를 무시한 권력은 짐승의 상태로 전락합니다. 12개월 후, 왕은 자신이 이룬 도성을 보며 모든 성취를 자신에게 돌립니다. 그 순간 왕은 짐승처럼 풀을 뜯는 광기에 휩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비인간화됩니다. 그리고 정해진 기간이 지났습니다. 땅만 보던 왕이 하늘을 우러러보자 이성이 회복됩니다. 지상의 모든 통치권이 하늘로부터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이방 제국의 통치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온 세계의 주권자로 선포하며 찬양으로 결론을 맺습니다.</p>

<p><strong>2. 나눔</strong></p>

<p>발제에 이어 풍성하고 실제적인 대화를 이어갔습니다.</p>

<p><strong>1) 조서의 목적과 왕의 진정성:</strong><br />
부끄러운 과거를 공공연히 선포하는 조서의 진짜 목적이 무엇일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7년의 공백기 동안 왕권은 심각하게 흔들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조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친히 복권하셨음을 강조하여 권력을 다잡으려는 고도의 정치적 선전일 수도 있습니다. "기꺼이 알리고자 한다"(2절)는 말 역시 표면적으로는 간증 같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을 부각하며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려는 교묘한 화법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다니엘을 "거룩한 신들의 영"을 지녔다고 표현한 대목(9절)을 보면, 왕의 고백이 온전한 신앙 고백인지 다신교적 세계관의 연장선인지, 진정성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한편, 똑똑한 왕이 정말 그 직관적인 꿈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습니다. 어쩌면 "궁에서 평화를 누릴 때"(4절) 찾아온 나태함 탓이거나, 불길한 결말을 직감하고도 외면하고 싶어 "두렵게 하였고 번민"(5절)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p>

<p><strong>2) 우주적 나무와 인간의 보편적 욕망:</strong><br />
왕의 꿈에 등장하는 우주적 나무는 그의 무의식이 투영된 결과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온 세상을 덮는 거대한 나무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업적에 만족하고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보편적인 본성입니다. 우리 역시 수시로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려는 교만에 빠지곤 합니다. 피조물 된 우리의 본래 정체성을 겸손히 돌아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비록 왕의 의도에는 자기 과시가 섞여 있었을지라도, 이 조서가 제국 전역의 모든 민족과 언어권에 전달됨으로써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p>

<p><strong>3) 심판을 유예하는 윤리와 체제 복무:</strong><br />
다니엘은 꿈의 해석을 넘어, 불의한 왕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컨설팅을 제공합니다(27절). 파멸을 앞둔 상대를 향한 이 끈질긴 조언은 소돔의 멸망을 막아보려던 아브라함의 간절한 협상을 연상시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할까 봐 대충 말씀을 전했던 요나의 옹졸함과 철저히 대조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왜 느부갓네살에게 벌써 세 번째나 깨달음의 기회를 주시는지, 또 다니엘은 왜 이런 억압적인 체제에 복무하며 왕을 돕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나누었습니다. 비록 이방 제국의 불의한 지도자일지라도, 우리 역시 다니엘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조언할 때 우리가 속한 세상이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합니다.</p>

<p><strong>4) 짐승이 된 권력과 12개월의 은혜:</strong><br />
왕이 이성을 잃기 전 주어졌던 12개월(29절)은 다니엘의 권면을 듣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답답하고 지체되는 시간들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위해 심판을 유예하고 기다려주시는 은혜의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이 짐승처럼 풀을 뜯고 새의 형상(33절)으로 변한 7년 동안 바빌로니아에서 과연 누가 대리청정을 했을지, 그 조류의 형태가 고대 근동의 특정 신화적 상징인지 호기심 어린 유쾌한 상상도 오갔습니다. 아울러 본문에 묘사된 왕의 광기를 오늘날의 정신 질환과 직결하여 '믿음 부족'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깊이 경계했습니다. 정신적 어려움 역시 몸에 기반한 질병이므로, 말씀을 무리하게 확대 해석하여 상처를 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p>

<p><strong>5) 권력의 한계 인정과 하나님의 소소한 일하심:</strong><br />
일곱 때를 지낸 후 정신을 차린 왕의 권세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회복되었다(36절)는 결말은 묘한 불쾌감을 남겼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등 현재의 세계 정세를 보며, 왜 하나님은 불의해 보이는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허락하시는지,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는 어디에 있는지 깊은 답답함을 공유했습니다. 나라가 망해 포로로 끌려온 당시 유대인 독자들 역시 비슷한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은 마치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의 일상, 우리 교회, 내 이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며 때로는 아주 소소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일하고 계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모순 속에서도 끝내 흔들림 없이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다짐하며 나눔을 마무리했습니다.</p>

<p>-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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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description>
<dc:creator>상선약수</dc:creator>
<dc:date>Tue, 07 Apr 2026 16:14:56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다니엘 3장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9</link>
<description><![CDATA[<p>다니엘 네 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맹렬히 타오르는 제국의 풀무불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세 친구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p>

<p><strong>1. 발제</strong></p>

<p>홍정환 목사의 발제로 3장의 핵심을 짚었습니다. 다니엘 3장은 제국의 전체주의적 강요와 폭력 속에서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사건입니다.</p>

<p>기원전 595~594년경 군사 반란 직후,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60규빗 높이의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우주적 질서를 상징하는 60진법을 사용했지만,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6은 하나님의 완전수인 7에 미치지 못하는 결핍의 숫자였니다. 8단계에 이르는 복잡한 직제의 관료 조직을 총동원한 제막식은 제국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하는 사상 검증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p>

<p>유다 청년들은 훼손된 정체성 속에서 배타적 감시 사회를 견뎌야 했습니다. 제국은 이들의 본래 이름(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을 빼앗고 바빌로니아 신들의 이름을 강제 부여하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사상적 동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신이 너희를 구해 내겠느냐"는 왕의 조롱은 곧 세상 권력과 창조주 하나님의 정면충돌이었습니다.</p>

<p>세 청년은 구차한 변명 없이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을 선포합니다. 구원의 능력을 확신하면서도,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신앙의 이유를 보상이 아닌 하나님 그분 자체에 두었습니다.</p>

<p>제국의 극단적 폭력은 고난 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철저히 무력화됩니다. 일곱 배나 뜨거워진 산업용 벽돌 가마의 열풍은 오히려 제국의 군인들을 태워버렸습니다. 통제력을 상실한 폭력이 스스로를 파괴한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청년들을 화덕 밖으로 빼는 대신, 불타는 화덕 한가운데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신의 아들과 같은" 넷째 사람이 제국에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걸으며 그들을 지키셨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고난의 면제가 아니라 고난 속의 임재입니다. 결국 이들의 결단은 느부갓네살의 찬양을 다시 이끌어내며,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 누구인지 제국의 심장부에서 드러내는 선교적 사건으로 완성되었습니다.</p>

<p><strong>2. GIBS(Group Inductive Bible Study)</strong></p>

<p>네 단락으로 본문을 나누어 풍성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p>

<p><strong>1) 전체주의와 충성 맹세 (1-7절):</strong><br />
2장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했던 느부갓네살이 금세 모든 것을 잊고 금 신상을 세운 모습을 보며 인간의 간사함을 짚어보았습니다. 8단계의 관료 직제와 최소 6개 이상의 악기 편성이 반복해서 서술되는 대목은,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이 보여준 대중 선동의 스펙터클을 강렬하게 연상시켰습니다. 극단적인 왕의 분노가 다혈질적인 기질 때문인지, 공포 정치를 위한 정교한 연출인지 흥미로운 토론이 오갔습니다. 또한 이때 모인 관료들이 지방 관리들이었을지 묻는 질문도 있었습니다(지방 관리들만 모였다면 다니엘의 부재가 일견 이해되기 때문이었습니다).</p>

<p><strong>2) 정체성을 탈취하려는 제국의 시스템 (8-15절):</strong><br />
과거 다니엘의 해몽 덕분에 목숨을 건졌던 갈대아 점성가들이 유다 사람들을 앞장서 고발하는 대목에서 인간의 배은망덕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목숨 걸고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친구들의 모습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던 옛 고신 교회의 역사가 오버랩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이렇게 중대한 위기의 순간에 정작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 어린 질문도 남았습니다.</p>

<p><strong>3)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 (16-18절): </strong><br />
이름을 잃어버린 세 청년은 구차한 변명 없이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활활 타는 화덕과 왕의 손에서 자신들을 충분히 구해 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무엇보다 다니엘서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라는 고백이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기적적인 구원이 일어나지 않고 불타 죽게 될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입니다. 신앙의 이유를 결과나 보상에 두지 않고 하나님 그분 자체에 두는 철저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성경의 거대한 서사 속에서 다니엘의 뒤에 서 있던 조연들, 세 친구의 흔들림 없는 헌신이 무척 감동적이고 흐뭇했다는 고백이 나눔의 온기를 더했습니다.</p>

<p><strong>4) 고난 속의 임재와 선교적 성취 (19-30절): </strong><br />
느부갓네살을 "연쇄 신앙 고백마"라고 부르며 웃었습니다. 2장, 3장, 4장에 걸쳐 거창한 고백을 쏟아내면서도 매번 제자리로 돌아가는 한계 때문입니다. 화덕 속의 넷째 사람이 "신의 아들" 같다는 왕의 말을 보며, 참 신의 영광스러운 형상이 오직 왕의 눈에만 확실하게 달라보였던 것인지, 다른 신하들은 아예 보지 못했는지 상상력을 펼쳐 보았습니다.</p>

<p><strong>나눔을 마치며</strong></p>

<p>우리는 "고난 속의 임재"라는 화두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억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과연 맹렬한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갈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화덕 속에서 하나님은 청년들에게 과연 무슨 말씀을 건네셨을지, 어떻게 그들에게 새 힘을 주시고 위로하셨을지도 묵상해 봅니다.</p>

<p>세 친구가 화덕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넷째 사람이신 주님은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름 잃고 고통받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불길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고난으로부터의 극적인 구출만을 갈망하기보다, 맹렬한 불길 속에서도 곁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은혜를 구합니다.</p>

<div class="youtube-embed-wrapper" style="padding-bottom:56.25%;padding-top:30px;height:0;"><iframe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cOi9qrYhNa0" width="640" alt="cOi9qrYhNa0" /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iv>

<p> </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Mon, 06 Apr 2026 00:31:33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다니엘 2장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8</link>
<description><![CDATA[<p>두 번째 모임보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세 번째 만남을 가졌습니다. 멤버들이 챙겨온 맛있는 간식과 따뜻한 대화로 문을 열며, 제국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시는지 다니엘 2장의 긴박한 서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p>

<p><strong>1. 발제</strong></p>

<p>홍정환 목사의 발제로 2장의 핵심 관점을 짚었습니다. 다니엘 2장은 유명한 해몽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의 주관자가 제국의 왕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거대 담론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악한 권력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순금 머리"로 표상하며 당신의 뜻을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대목이지요.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지어 악한 권력을 통해서도 당신의 계획을 계시하십니다.</p>

<p>한편 본문에서 반복되는 "비밀"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제국의 지혜자들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에게 그 비밀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제국 안에 살면서도 제국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책임입니다.</p>

<p>(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는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p>

<p><strong>2. GIBS(Group Inductive Bible Study)</strong></p>

<p>네 단락으로 나누어 본격적인 나눔을 진행했습니다. 본문이 주는 긴장감만큼이나 깊고 다양한 질문들이 오갔습니다.</p>

<p><strong>1) 왕의 불안과 제국의 위기(1-13절)</strong>:</p>

<p>느부갓네살은 왜 꿈의 내용을 말해주지 않고 해몽을 요구했을까요? 유독 이 꿈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기득권층인 "갈대아 사람들"을 숙청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나왔습니다. 제국의 지혜가 바닥을 드러내고 몰살의 위기가 찾아온 순간, 다니엘은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구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p>

<p><strong>2) 비밀을 여시는 하나님(14-23절)</strong>:</p>

<p>다니엘의 친구들은 함께 기도했지만, 환상은 다니엘만 보았습니다. 왜 다니엘에게만 보여주셨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20-22절에 담긴 다니엘의 기도를 잠시 살폈습니다. 이 기도는 다니엘서 전체의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때와 계절을 바꾸시고 왕들을 폐하고 세우시는 분이 누구인지 명확히 고백합니다.</p>

<p><strong>3) 해몽과 역사의 주인(24-45절)</strong>:</p>

<p>근위대장 아리옥은 창세기의 술 맡은 관원장처럼 다니엘을 왕 앞으로 인도합니다. 다니엘의 해몽 과정을 보며, 이것이 단순한 아첨인지 지혜로운 대처인지에 대해 대화했습니다. 특히 느부갓네살을 "순금"으로 높여 부르는 37절의 표현은 거의 신앙고백에 가까운 극찬으로 보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마음속 생각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음을 밝히며, 제국을 향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p>

<p><strong>4) 엎드린 왕과 하나님의 영광(46-49절)</strong>:</p>

<p>천하를 호령하는 느부갓네살이 포로 소년 다니엘 앞에 엎드려 절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충격적입니다. 왕의 권력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이례적인 반응은 다니엘의 신통력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참 신"을 향한 경외심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왕의 입을 통해 당신이 "신들의 신"이심을 증명하셨고, 다니엘을 높여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서 당신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p>

<p><strong>나눔을 마치며</strong></p>

<p>우리는 일제강점기처럼 암울한 상황에서도 제국에 충성하며 실력을 발휘하는 다니엘의 모습에 복잡한 마음을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1장에서 성전 기물을 넘기신 분이 하나님이셨듯, 잘못된 체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강경한 투쟁만이 제자도가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어른스러운 다니엘'의 포지션도 있다는 사실이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p>

<p>일상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은, 비신앙적인 요소들을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른바 "상전"의 마음을 헤아리는 지혜와 예의를 갖추면서도 끝내 중심을 잃지 않는 것임을 배웁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자답게 살아가기를 다짐해 봅니다.</p>

<p>-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p>

<div class="youtube-embed-wrapper" style="padding-bottom:56.25%;padding-top:30px;height:0;"><iframe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IQQwq9HLLU4" width="640" alt="IQQwq9HLLU4" /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iv>

<p> </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Mon, 30 Mar 2026 15:31:15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다니엘 1장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7</link>
<description><![CDATA[<p>두 번째 모임 시간을 가졌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밥과 커피, 따뜻한 차를 나누며 오늘도 정겨운 대화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만남의 설렘과 기쁨을 품고, 오늘은 본격적으로 다니엘 1장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p>

<p><strong>1. 발제</strong></p>

<p>홍정환 목사의 발제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다니엘을 읽는 관점을 재확인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소년들의 출세 가이드북이 아닙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보여준 좋은 얼굴빛과 뛰어난 지혜는 채식의 결과나 개인의 탁월함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고, 학문과 지혜를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제국 한복판에서 성도가 거두는 승리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p>

<p>한편 바빌로니아는 가혹한 혼혈 정책을 쓴 아시리아와 달리, 핵심 계층만 끌고 가는 엘리트 분리 정책을 폈습니다. 포로들은 1,500km의 험난한 여정을 걸어 압도적인 문명 앞에 던져졌고, 극심한 종교적 정체성 위기를 겪었습니다. 제국은 흠 없고 지혜로운 청년들을 선발해 3년간 갈대아의 학문을 가르치고 왕의 음식을 주는 등 철저한 동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히브리어 이름에 담긴 여호와 신앙의 흔적을 지우고 제국 신들의 이름을 강제로 부여해 소속을 옮기려 했습니다.</p>

<p>하지만 다니엘은 왕의 식탁을 거절하는 거룩한 저항을 선택했습니다. 거짓 주(主)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한 영적 투쟁이었습니다. 그 결과 왕의 음식과 제국의 학문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p>

<p>(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는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p>

<p><strong>2. GIBS(Group Inductive Bible Study)</strong></p>

<p>본문을 네 문단으로 나누어 대화를 진행했습니다. 워낙 유명한 본문이라 다들 익숙한 느낌으로 나눔을 시작했습니다.</p>

<p><strong>1) 넘겨주신 하나님(1-2절): </strong><br />
주님께서 여호야김 왕과 성전 기물 일부를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주셨다는 대목을 살폈습니다. 참담한 현실을 포장하는 일종의 정신승리가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성전 기물의 "일부"만 가져간 이유에 대해서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만 선별했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추측이 이어졌습니다.</p>

<p><strong>2) 제국의 선발과 교육(3-9절): </strong><br />
바빌로니아는 몸에 흠이 없고 용모가 잘생긴 지혜로운 소년들을 선발했습니다. 왕을 모실 인재를 뽑는데 외모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전 세계의 인재들을 전리품이나 트로피처럼 수집하여 자신의 성취를 과시하려 한 느부갓네살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이미 능력이 검증된 엘리트 중에서도 다시 엘리트만 선발하는 과정을 보며, 다니엘 일행이 너무 엘리트라 다소 반감이 든다는 솔직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3년이라는 교육 기간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의식과 세계관을 바꾸는 데 필요한 기본 단위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p>

<p><strong>3) 일상의 결단과 역전(10-17절):</strong><br />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거창한 독립 투쟁이 아닌 소소한 영역의 저항이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바빌로니아에 동화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위기감입니다. 이들은 학문과 언어는 배웠지만, 음식은 거부했습니다. 본능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에서의 결단이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작고도 근본적인 저항이었습니다. 인간의 첫 시험이었던 선악과 사건 역시 먹는 문제였음을 상기하며, 제국에 동화되지 않기 위한 경계 표지로 음식을 선택했음을 나누었습니다. 다니엘이 감독관에게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달라고 시험을 제안한 대목은, 피교육생이 오히려 시험 과목을 요청하는 통쾌한 역전의 순간이었습니다.</p>

<p><strong>4)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18-21절): </strong><br />
왕의 면접 결과, 다니엘 일행은 전국의 어떤 주술가나 마술사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났습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을 압도했던 모세가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왕궁에 머물면서 그들은 과연 무슨 일을 했을까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 백성을 위한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빌로니아를 위한 일이었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뛰어난 역량으로 느부갓네살을 섬겼고,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만방에 선포하셨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일들이 더욱 기대됩니다.</p>

<p>나눔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다니엘이 거부했던 음식의 의미를 되짚어 보았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생명과 직결됩니다. 생명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타협이라는 쉬운 길을 거절한 그의 확신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거창한 투쟁에 앞서 당장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역이 무엇인지 질문해 봅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제국의 가치관에 동화되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꿔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바빌로니아와 같은 세상 한 가운데서, 작고 단호한 일상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p>

<p>-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p>

<div class="youtube-embed-wrapper" style="padding-bottom:56.25%;padding-top:30px;height:0;"><iframe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eDUT9urhlKU" width="640" alt="eDUT9urhlKU" /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iv>

<p> </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Tue, 17 Mar 2026 02:52:55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다니엘 첫 모임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6</link>
<description><![CDATA[<p>참 오랜만에 오프라인에서 엘비스클럽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학기는 "다니엘"을 함께 읽고 나누기로 했습니다. 김밥과 오뎅국(어묵탕은 입에 안붙네요), 차를 나누며 서로 소개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진 후 다니엘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진행자인 홍정환 목사가 "다니엘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주제로 발제했습니다. 이어서 함께 다니엘 1, 2장을 소리내어 읽은 후 나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눔 방식은 "아이콘 북클럽"의 네 단계를 이용했습니다.</p>

<p> </p>

<p><strong>1. 발제</strong></p>

<p>먼저 홍정환 목사는 다니엘을 대하는 시선을 살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은 그리스도인의 성공 가이드북이나 미래를 예측하는 시간표가 아닙니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거대한 제국 한복판에서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일하시며, 그 현장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렌즈 삼아 다니엘을 읽자고 제안했습니다.</p>

<p>이어서 다니엘의 독특한 이중 언어 구조와 묵시문학적 성격을 살폈습니다. 묵시는 과거의 기록이나 미래 예언, 혹은 판타지가 아닙니다. 묵시는 제국의 폭압 아래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승리를 약속하며 오늘을 견딜 힘을 주는 소망의 언어입니다. 다니엘은 제국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오늘날,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내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p>

<p>(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는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p>

<p> </p>

<p><strong>2. 아이콘 북클럽</strong><br />
다니엘 1, 2장을 소리 내어 읽은 뒤, 네 아이콘을 따라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나누었습니다.</p>

<p> </p>

<p><strong>! (느낌: 발견과 감동)</strong></p>

<p>포로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낸 다니엘의 용기가 우리를 깨웠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마음을 합칠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는 점이 큰 부러움과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공동체가 주는 힘의 소중함을 다시금 확인하며, 앞으로 이어질 모임에 대한 기대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완벽한 모습에도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흠 없고 단정하며 지혜와 통찰력까지 겸비한 그는 과연 몇 살이었을까요? 겸손하면서도 지혜롭게, '말을 참 이쁘게 하는'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든 시간이었습니다.</p>

<p><strong>"" (한 구절: 집에 가져가고 싶은 문장)</strong></p>

<p>우리 삶과 맞닿은 구절들을 도처에서 만났습니다.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뒤 결국 비밀을 깨닫고 찬송하게 된 순간(2:19)을 보며, 지금의 어려움 뒤에 올 찬송의 때를 소망했습니다. 타국인들에 대한 배려(2:24)와 고대 전쟁의 관례를 깨부수는 전복적인 신앙 고백(2:47)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다니엘이 받은 대우(1:9)가 부럽기도 하고, "간구하자!"라며 친구들을 독려한 모습(2:18)에서 기도의 동력을 얻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기에 일상의 영역, 심지어 주식의 흐름까지도 아시지 않겠느냐는 유쾌한 상상(2:22)부터, 사람의 지혜로 발버둥 치던 사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겠다는 진솔한 고백(2:27-28)까지 이어졌습니다. 다니엘의 담대함(1:12)을 닮아 응답받고 찬양하며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모였습니다.</p>

<p><strong>? (질문: 궁금한 점)</strong></p>

<p>나눔은 더 깊은 물음표로 이어졌습니다. 다니엘의 집안 배경과 교육 과정은 어떠했는지, 묵시 문학인 요한계시록이나 예언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특히 채식을 시험할 때 기도도 하지 않고 제안할 수 있었던 그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왕의 음식은 왜 거절하면서 옷이나 이름은 수용했는지, 그 기준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왕의 음식이 제사 음식이라 해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음식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했는지 의문이 남았습니다. 훈련 중인 포로가 음식을 거절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10배'라는 평가의 기준(1:20)은 무엇인지도 흥미로운 질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바빌로니아에 '넘기셨다'(1:2)는 표현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마음이 궁금해졌습니다. 앞으로 다니엘을 읽고 나누는 과정에서, 주님이 답해주시길 기대해봅니다.</p>

<p><strong>@ (실천: 삶으로의 연결)</strong></p>

<p>우리는 오늘 읽고 대화하며 생각한 것 중 실천할 것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는 나머지 3장 이후의 이야기를 미리 읽어오기로 했고, 누군가는 1장을 다시 정독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기로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2장 20-23절이나, 1장 2절의 '넘겨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며 살겠다는 다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공동체와 정시에 만나기 위해 다음 모임에는 늦지 않겠다는 소박하지만 단단한 약속을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p>

<p>첫 모임의 온기가 한 주간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함께 손잡고 이 믿음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길 꿈꿉니다.</p>

<p>- 평화만사 홍정환 목사</p>

<div class="youtube-embed-wrapper" style="padding-bottom:56.25%;padding-top:30px;height:0;"><iframe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vDe5as4TOuk" width="640" alt="vDe5as4TOuk" /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iv>

<p> </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Tue, 10 Mar 2026 05:01:41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민수기 16장 1절 50절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5</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2/2950087994_1765555341.0984.jpg" alt="2950087994_1765555341.0984.jpg" /></p>

<p><strong>엘비스클럽 민수기 16장 1절 50절 나눔 요약 251212</strong></p>

<p> </p>

<p><strong>광야 순례 공동체 위기와 그 극복</strong></p>

<p> </p>

<p>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돌아야 하는 상황에서 지난 15장은 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이끌어 내셔서 가나안 땅에 결국은 들어가게 하시는 지에 대한 미래지향적, 외부지향적인 하나님의 뜻(미션얼 비전)을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온전한 제사(예배)와 거룩함(소극적, 적극적)이라는 출애굽의 비전이 가나안땅에서 성취되도록 하시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16장의 고라와 250명(그리고 심지어 나중에는 회중)의 반기(거역, 대항, 항거, 규탄)와 그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조치와 하나님의 말씀과 조치는 15장의 맥락과 상관이 있습니다. 그 뜻을 좇는 모세와 아론에 반기를 드는 고라 일당(회중에까지 영향을 미친)은 15장 30절에서 36절에 있는 “일부러(defiantly) 죄를 지은” “주를 모독”하고 주를 “경멸”한 대표적인 예에 해당합니다. 16장 30절에서 모세는 그들을 “주님을 업신여겨서 벌을 받았다”라고 평가합니다. 15장 37절이하 41절에 나오는 일종의 교육을 위한 기억매체인 옷자락에 다는 술에 대비되는 16장 36절에서 40절에 나오는 망치로 두들겨 펴서 제단 위에 씌운 향로 역시 이스라엘을 위한 일종의 소극적(부정적) 기억매체입니다. “아론 자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절대로 주 앞에 가까이 가서 분향할 수 없다는 것과 누구든지 그렇게 하였다가는 고라와 그와 합세하였던 사람들처럼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상기시키려 한 것이다.” (40절)</p>

<p> </p>

<p>일년 여의 광야생활이 더 길어질 것이라는 상황이 이 거대한 회중을 이끄는 지도자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만 세력이 생기고 이런 불만은 전염성이 있어서 전체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16장에도 레위 사람 고라 한사람의 죄(22절)로 시작되었으나 르우벤 사람(cf.26:5-10) 다단, 아비람, 온을 포함한 250명의 유명한 사람들(회중의 대표들로 총회에서 뽐힌 이들이었으며 잘 알려진 사람들 2절)이 합세합니다. 19절에 의하면 고라는 이미 온 회중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여서 “모두 회막 어귀에 모아 두사람(모세와 아론)과 대결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 불만 세력들은 “당신들은 분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소(3절)”라고 항의하지만 본문에서 모세 역시 “당신들이야말로 분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7절)”다라고 대응합니다. 본문은 결국 누가 분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는지를 내러티브를 통해 확인해 줍니다.</p>

<p> </p>

<p>본문을 통해 볼 때 고라와 그 동조자들의 문제는 이렇습니다. 우선 고라는 레위 자손으로 고핫자손에게 회중보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주어진 성물을 살피고 관리하는(4장) 성막일이 맡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직까지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요구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불만을 이용하고 그들과 결속하여 세를 만들었던 것입니다(8-11). 고라와 결속된 다단과 아비람 류는 레위 자손은 아니지만 모세의 지도력에 흠집을 내려고 합니다. “당신은 우리 위에 군주처럼 군림하기까지 할 셈이오”라고 하면서 밭과 포도원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이집트를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면서 제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비전을 성취하지 못하여 구체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을 자신들을 죽이는 것, 혹은 노예로 삼는 것(눈을 뺄 작정이오?)이라고 비난합니다. 늘 온유한 모세였지만 이 말에는 “몹시 화가 나서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자신은 군림한 적이 없다는 것을 “나귀 한 마리도 빼앗은 일이 없”고 “어느 한 사람에게도 잘못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들을 “악한사람들(26절)”,“주님을 업신여겨서 벌을 받(30절)”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p>

<p> </p>

<p>본문에서 모세는 일관되게 문제 앞에서 우선 단계 단계마다 “땅에 엎드려 기도”(4절,22절,45절)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했고, 하나님을 설득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앞에 겸비하기를 원해서였습니다. 두 번째로 모세는 일관되게 “회중”을 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14장에서(11-19절) 본 것처럼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성품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갈대처럼 여론에 흔들리는 회중들을 단호함으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거처 가까이에서 떠나라(24절)”고 했고, 바로 전날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도 이튿날 “당신들이 주님의 백성을 죽였소”라고 지도자를 규탄하는 이들이지만 이들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해 아론으로 하여금 향로를 들고 속죄의 예식을 행하게 하므로 향로의 진정한 의미가 회복되도록 하였습니다. (향로(레16:11-13,출30:6, 시140:2, 계8:3-4)는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고 죄를 가리는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로서 향로를 다루는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세와 아론(엘르아살을 통해)은 250명이 사용했던 향로(“각자 자기의 향로를 가지고 와서 거기에 불을 피우고 그 안에 향을 넣어서”의 표현은 레위기 10장 1절의 “제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불을 담고 향을 피”웠다가 죽은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와 유사함)를 일종의 기억매체로 만들어서 후대가 이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만듭니다(36-40절).</p>

<p> </p>

<p>이 본문을 바로 현대로 가지고 와서 누구든지 지도력에 대한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하는 근거구절로 삼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누가 “분에 넘치는 일을 하고 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이 본문에서 고라와 그 선동에 합세한 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셨다는 이야기가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불렀던 “모든 육체에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22절)”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론의 속죄 예식을 고려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 즉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이 백성을 어찌되었든 끌고 가시겠다는 그 뜻에 이들의 태도와 삶이 합당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선교, 미션얼에 마음이 고정되고 맞추어져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과 당장의 결과물에 마음이 앗겨 있는가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요. 순례의 길에 언제나 공동체는 위기, 특히 지도력의 위기를 겪게 마련입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나 문제를 제기받는 입장이나 중요한 것은 원래 순례를 시작하게 되었던 초심, 그 뜻을 헤아리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경우, 그 초심, 그 뜻은 분별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쉬운 법이 없습니다.</p>

<p> </p>

<p>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p>

<p> </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2/2950087994_1765555363.8236.png" alt="2950087994_1765555363.8236.png" /></p>

<p></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13 Dec 2025 01:02:51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민수기 15장 1절 41절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4</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2/3697059357_1764950005.7592.jpg" alt="3697059357_1764950005.7592.jpg" /></p>

<p><strong>엘비스클럽 민수기 15장 1절 41절 나눔 요약 251205</strong></p>

<p> </p>

<p><strong>예배와 거룩, 미션얼(Missio Dei-하나님의 뜻)</strong></p>

<p> </p>

<p>바로 앞 문맥인 13장과 14장이 설화체이고 뒷문맥인 16장 역시 설화체인데 15장은 강화체(중간의 32-36절은 설화체)중심인 점, 그리고 앞 문맥이 가나안 탐지 이후 원망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실패이고 후 문맥이 고라등의 반역사건인데 그 사이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바칠 제물과 헌납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주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이 본문이 이곳에 있는 이유와 의도가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

<p> </p>

<p>1절과 2절의 내용이 17절과 18절에서 거의 같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줄 땅, 곧 너희가 살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18절은 “내가 너희를 데리고 갈 그 땅에 너희가 들어가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원망으로 인해 40년을 광야로 우회하는 시점이지만 하나님은 의지를 내 보이십니다. “가나안을 너희에게 주겠다. 내가 너희를 데리고 그 땅으로 가겠다.” 마치 부모가 잘못한 아이를 야단치고 벌을 주지만 훈육하고 형성(formation)하려는 분명한 미래지향적인 목적을 가진 것처럼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분명합니다.</p>

<p> </p>

<p>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16절까지는 번제나 희생제를 드릴 때 정착지에 가게 될 때 짐승제물에다가 정착한 땅의 곡물로 곡식제물을 그 땅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로 부어드리는 제물을 합하여 “주를 기쁘게 하는 제사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3,7,10,13,14절). 짐승의 크기에 따라 함께 바치는 소제(곡식제물)와 전제(포도주)의 양이 정해지며 정착지인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사람이든 외국인(사실은 대개는 선주민)이든 같은 법과 같은 규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미래지향적 의지와 뜻(the mission of God)입니다. 원래 출애굽의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출3:18, 8:1,8,27, 9:1,13,10:3,7-8,11,24)”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시는 이스라엘을 내 보내야 하는 이유였고 그것의 온전한 성취의 모습이 일종의 제사의 법과 규례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얻게 될 곡식에서 난 헌(납)물의 규례로 여기 제시되고 있습니다.</p>

<p> </p>

<p>22절부터 31절까지는 이런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반영하는 명령을 실천하지 못하는 두가지 다른 경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9절까지는 “실수로(unintentionally)” 실천하지 못하는 것인 반면 30절부터 31절은 “일부러(defiantly)” 주를 모독하고 주의 말을 경멸하여 명령을 어기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용서의 가능성을 속제제물을 규례대로 바치는 방식으로 열어 놓으나, 후자는 용서받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바로 앞장 14장에서 광야를 떠돌다가 죽게 된 운명의 사람들이 이런 케이스인데, 32절부터 36절의 설화체 에피소드는 어떤 의미에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광야에서는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명확한 설명이 없었”지만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거나 어기는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내지게 되고, 이런 사례를 통해서 공동체가 용서의 가능성 혹은 속죄 시스템을 악용하는 사례(cf.밀양 영화이야기)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단호함을 드러내는 것(cf.사도행전의 아나니아 삽비라의 경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p>

<p> </p>

<p>명령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소극적 방식이 실수로 실천하지 못할 경우의 속죄시스템이라면 적극적인 것은 38절에서 40절이 이야기하는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고 “술에는 청색 끈을 달아” 일종의 복식문화를 통한 기억매체(기억하고 실천,39,40절)를 두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마음내키는 대로 따라가거나,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색욕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39절),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40절)이 그 목적입니다.</p>

<p> </p>

<p>하나님을 예배(제사)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됨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41절) 낸 목적이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여기서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중요한 강조점은 이 예배와 거룩함의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동시대의 외국인(7회 반복)을 포함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대대손손 혹은 오고오는 세대에 대대로 전달되는 것을 통해 확장되고 야훼신앙을 공유하고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뜻을 함께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이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p>

<p> </p>

<p>종종 우리가 경험하는 한계상황, 큰 문제들은 어쩌면 하나님의 큰 은혜, 한계를 넘어서는 변함없는 사랑의 계기입니다. 때로 훈육이 아프리만큼 강력하지만 그만큼 훈육하시는 분의 형성하려는 교육적 의도와 의지가 드러날 때 현재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향할 수 있게 됩니다(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온전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것처럼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온전한 예배와 거룩함이라는 정체성을 위하여 우리가 옛것을 떠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지향적(대대로)이며, 외부지향적(외국인도)인 하나님의 뜻과 의도, 하나님의 선교, 미션얼 비전을 기억하게 하는 오늘날의 기억매체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해 보게 됩니다.</p>

<p> </p>

<p>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2/3697059357_1764950021.4018.png" alt="3697059357_1764950021.4018.png" /></p>

<p> </p>

<p> </p>

<p> </p>

<p></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06 Dec 2025 00:53:44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민수기 14장 1절 45절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3</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1/2950093268_1764345282.175.png" alt="2950093268_1764345282.175.png" /></p>

<p><strong>엘비스클럽 민수기 14장 1절 45절 나눔 요약 251128</strong></p>

<p> </p>

<p><strong>생각하지않는 사람들 vs. 마음이 남 다른 사람들</strong></p>

<p> </p>

<p>가나안 땅 탐지이후 그 땅에 대한 나쁜 소문(삼키는 땅 13장 32절)과 소위 메뚜기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이야기는 온 회중을 부정적인 파토스로 몰고 갑니다. 민수기 14장은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보여주는 패닉 현상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줍니다.</p>

<p> </p>

<p>1절부터 10절 상반절까지에서 우리는 두가지 대조적인 슬픔을 대합니다. 한 편으로 이스라엘 온 회중은 집단적 패닉 정서를 보이고 있습니다. “소리 높여 아우성”치고 “밤새도록 통곡”하며(1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차라리(3번 반복)” 이집트 땅 노예 생활하다가, 아니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를 이 땅으로 끌고 와서 칼에 맞아 죽게 하는가? 왜 우리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사로잡히게 하는가?” 과거와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은 지나온 것이고 경험한 것이지만, 미래의 고통을 예상하는 것이 사람들을 더 공포로 몰아 넣는 것입니다. 400년 노예생활로 인한 익숙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예상하지 못할 땅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낫겠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두머리를 세우자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가자”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불안과 공포심에서 나오는 통곡과 슬픔입니다. 다른 한 편의 슬픔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6-9절). 위와 대조하여 신뢰와 확신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슬픔입니다. 그 땅 가나안에 대한 정보(매우 좋은 땅 7절), 하나님에 대한 인식(사랑하신다면 인도하실 것 그 땅을 주실 것 8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9절)으로 인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는 신앙에서 나오는 동족을 향한 외침은 오히려 회중들을 더 흥분하게 하고 돌로 치려 합니다(10절a).</p>

<p> </p>

<p>즉각적인 하나님의 영광의 개입이 있었기에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에 주님의 영광이 회막에서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타났다(10절b).” 11절부터 35절까지 주님과 모세의 긴 대화의 기록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온 백성에 대한 진노의 반응(11-12절)과 이에 대한 모세의 설복(13절-19절)에 최종적인 하나님의 판결(20-35절)이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먼저는 이스라엘을 버리고 모세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13-16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cf.출34장 6-7절)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을 분노조절 장애처럼, 모세를 대단한 설득가처럼 생각하기 보다, 절대적 권력을 가지신 분 하나님이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심지어 그 말을 수용하시는 것을 더 주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이 백성의 죄를 용서(19절)”하시지만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판단은 “주의 영광”을 출애굽과 광야생활에서 보고도 원망하는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지만,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너희가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걱정한 너희의 어린 것들”은 그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고향으로 삼게 될 것이라고 판결합니다. 하나 더 40일 탐지에 중하는 40년 광야에서 출애굽 세대(34절)와 그 자식세대(33절)가 동일하게 죄의 짐을 짊어 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6절에서 38절은 위의 내용을 총정리를 합니다.</p>

<p> </p>

<p>39절에서 45절은 이스라엘의 또 다른 두 번째 거역(불순종)의 기록입니다. 마치 자신들의 실패를 더 적극적 과잉행동으로 벌충하려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슬퍼하면서 “일찍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면서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곳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잘못했다.” 이 잘못의 고백은 시의를 놓친 것이며 오히려 청개구리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거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만류했지만(41-43절) 그들은 “더 생각하지도 않고(44절)” 행동을 합니다. 결과는 무참한 패배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일 때 움직이고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데 이들은 자신들의 불안한 마음과 생각없음으로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을 합니다.</p>

<p> </p>

<p>이런 이스라엘 회중의 모습은 어쩌면 항상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원망, 거역, 멸시와 같은 단어는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와 결부시키고, 익숙한 과거와 현재의 비굴한 노예적 삶을 동경하거나 사려없는 무모한 종교적 행동주의를 왔다 갔다하는 모습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삶과 구별되는 갈렙(남 다른 마음, 전적인 따름 24절)과 모세(하나님의 명예(영광)와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에 둠 13-19절)의 모습에서 다른 상상력을 제공받아야 합니다. 대중에 몰려다니지 않고, 익숙한 과거의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 않는, 생각하는 사람, 주체적인 신실함의 사람이라는 정체성만이 가볍고 충동적인 선택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것입니다.</p>

<p> </p>

<p>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1/2950093268_1764345321.8327.png" alt="2950093268_1764345321.8327.png" /></p>

<p></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29 Nov 2025 00:55:24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민수기 13장 1절 33절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2</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1/3547476371_1763741586.5567.png" alt="3547476371_1763741586.5567.png" /></p>

<p><strong>엘비스클럽 민수기 13장 1절 33절 나눔 요약 251121</strong></p>

<p> </p>

<p><strong>가나안 땅 탐지</strong></p>

<p> </p>

<p>가나안 “땅”(20회 반복)을 탐지(정탐)하는 장면에 대한 민수기 13장과 신명기 1장의 기술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명기 1장에서 모세는 요단강 동편에서 그동안의 일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이 탐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겁내어 요구하였고 자신이 그 말이 옳은 말이어서 시행한 것으로 말합니다(신 1:19-25). 그러나 두 본문을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한 편이 옳고 다른 편이 틀리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가나안 일곱 족속이라 불리는 이들이 점령하여 살고 있는 곳을 이스라엘이 들어가려면 합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17절에서 20절에는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할 때 무엇을 보고 와야 할 지를 상세하게 언급하는 것을 봅니다. 말하자면 모세가 백성들의 요구를 듣고 하나님의 재가(?)를 받아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p>

<p> </p>

<p>3절에서 16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의 우두머리들이 땅을 탐지하라고 보낸 사람들인데 1장 6절에서 15절에 나오는 지도자들과 차이가 있는 것은 아마도 40일간(25절)의 탐지를 수행하기에 적당한 체력을 가진 비교적 젊은 이들을 선정해야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과 관련하여 민수기 13장은 16절에서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고 불렀다”라고 특별한 언급을 하는 것과 26절에서 33절의 탐사팀의 보고 중간 30절에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격려하였다.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라는 언급은 이 두 사람이 향후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암시하는 장치인 듯합니다.</p>

<p> </p>

<p>21절에서 25절은 가나안 탐지와 관련한 중요한 지리적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기까지 그 땅을 탐지하였다(21절).”는 것은 가나안땅의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를 탐지하였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22절의 “헤브론”에 대한 언급은 왜 이 가나안땅을 탐지하여서 그 땅을 점령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줍니다. 창세기 23장 19절에서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밭”을 사서 거기에 장사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땅에 대한 약속의 첫 번째 선취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온 이집트의 큰 도시 소안(라암셋)보다 “일곱 해 먼저 세운 곳”이라는 깨알같은(?) 정보 역시 이 가나안 땅에 대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선권(?)을 암시하는 장치일 것입니다. “송이”라는 뜻의 에스골 골짜기는 위에서 언급한 헤브론 근처의 와디지역으로 풍성한 석류와 무화과 및 포도송이등을 통해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27절, cf.출3:8, 17)”이라는 것을, 그리고 출애굽때 모세에게 약속하신 대로 여기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실감케하고 확인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p>

<p> </p>

<p>26절에서 33절은 30절 갈렙의 적극적인 주장을 가운데 두고 전반적으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지만 거기에 사는 백성들이 강하기 때문에 그 땅을 점령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대세인 것은 “그렇지만(28절)”이나 “그러나(31절)”같은 접속사를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32절 이하에서 이들은 적극적으로 일종의 가짜뉴스(“우리는 또 네피림 자손을 보았다”)와 함께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라는 소위 “메뚜기컴플렉스”에 함몰되고 맙니다.</p>

<p> </p>

<p>구약 오경에서 가나안 땅을 적극적으로 점령하는 것에 대한 심정적 거부감이 소위 시오니즘의 가나안 땅에 대한 집착이 낳은 심각한 역사적 부작용 때문에 우리 안에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아브라함과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그리고 모세와 출애굽 시 나누신 대화속에서의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실제적으로 애굽을 떠난 이 집단이 어딘가를 정착해야 한다면 그 당위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당시의 행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손과 땅에 대한 언약의 성취가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구약의 땅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오늘날 현재의 시점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얼마나 그릇되고 위험한 것인지에 대한 확인도 필요할 것입니다.</p>

<p> </p>

<p>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1/3547476371_1763741616.5196.png" alt="3547476371_1763741616.5196.png" /></p>

<p></p>

<p> </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22 Nov 2025 01:13: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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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엘비스클럽 민수기 12장 1절 16절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1</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1/2950093175_1763136674.01.jpg" alt="2950093175_1763136674.01.jpg" /></p>

<p><strong>엘비스클럽 민수기 12장 1절 16절 나눔 요약 251114</strong></p>

<p> </p>

<p><strong>지도력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넘어</strong></p>

<p> </p>

<p>12장은 11장과 출발점과 종착점의 유사점이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을 기록한 1절과 2절에서 미리암과 아론의 문제적 발언(모세에 대한 비방)을 “주님께서 들으셨다(2절)”고 하는 것은 11장의 백성들의 불평을 “주님께서 듣고”와 연결되며, 결말 역시 각각 어디를 떠나 어디에 진쳤다 멈추었다라는 것으로 끝나는 점에서 두 장이 모종의 연결점이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실제로 11장에서 보이던 지도력의 위기가 12장에도 연결되고 있고, 비교적 짧은 12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11장에서부터 연결하여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p>

<p> </p>

<p>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의 이유는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는 것인데 “주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았느냐(2절)”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질문이 가능합니다. 난하주에는 구스 여인을 “미디안 또는 에디오피아”라고 하는 데 전자는 출애굽기 2장의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이었으니 이미 아이 낳고 살아가고 있는 데 다시 문제 제기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마 모세의 첫 번째 부인이 아닌 새로운 아내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고 구스 여인이 흑인이었기에 비방한다고 보는 해석들이 있지만 그렇게 보는 것 역시 첫 번째 해석처럼 문화적 해석에 가까울 것입니다. 전술한 것처럼 11장과 연결하여 생각할 때 지금 모세는 그간의 지도력 행사의 ‘괴로움’으로 죽고 싶어까지 했고(11:15), 번아웃의 경험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70명의 장로들에게 영이 내려와 예언하게 하신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모세가 경험하게 된 지도자로서의 ‘외로움’이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게 된 이유일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보다 연장자들로서, 그리고 미리암의 경우 예언자(출15:20)였고, 아론은 이미 대제사장이었기에 모세의 흔들리는 지도력을 유약하고 자격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모세의 지도력을 보완하거나 혹은 대체해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이 말에 들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였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틀린 말도 아니고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입니다.</p>

<p> </p>

<p>그러나 3절에서 9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7절)”라고 종합할 만한 이야기를 바로 “당장” 세 사람을 회막에 불러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3절은 NIV가 괄호를 치고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 평가가 아닌 편집자(혹은 저자)의 평가이지만, (영감된 말씀이라는 점에서) 크게 보면 이 단락에서 하나님은 세가지 점에서 모세는 특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3절)이라는 점은 11장에서 보는 지도력의 흔들림속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모세를 두고 질투하여 말할 때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11:29)”라는 말을 할 때 두드러집니다. 본문에서도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한 모세의 반응이 없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모세가 “나의 온 집을 충성스럽게 맡고 있다(7절)”라고 인정하십니다.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집에 대한 혹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 혹은 하나님 보시기에 신실함이 모세의 특별함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8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세는 특별했습니다. 미리암이 예언자였고 아론이 대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은 모세와만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명백하게, 모호하지 않게 말하시며 주의 모습을 보여주실 정도로 친밀하였습니다. 이런 친밀한 관계와 환상으로 알리고 꿈으로 말해 주시는 “너희 가운데 예언자”와의 관계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p>

<p> </p>

<p>왜 하나님은 이렇게 모세를 특별하게 대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저절로 생깁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쉬운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모세는 후일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유독한 신학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cf.요1:17)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즉답에 가까운 해석보다 더 본문의 내러티브와 당시의 정황에 가까운 해석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10절 이하에 미리암과 아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진노의 표였던 “악성 피부병” 때문에 생긴 7일간의 격리와 그 기간만큼의 이스라엘 전체 진의 하세롯에서의 머무는 시간이 단서라고 생각됩니다. 아론은 악성 피부병이 생기지 않고 미리암에게만 생긴 것에 대한 질문이 생기는 데 이것은 아마 1절의 이름의 순서(미리암과 아론)가 암시하듯 주도한 자와 따른 자의 차이이거나, 아론은 지켜보는 자의 패닉반응을 11절과 12절에서 보이는 것으로 그 이상의 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레 동안 미리암은 미리암대로 아론은 아론대로 근신하였겠지만 사실은 진에 7일동안 머무르는 동안 모든 이스라엘에 이 이야기가 회자되었을 것이고 자칫 번아웃과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들의 죽음등으로 어수선하였던 이스라엘에서, 13장 이후 가나안 땅을 앞에 둔 전체 회중안에서 모세 지도력의 특별함에 대한 확실한 확인의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p>

<p> </p>

<p>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런 흔들리는 상황가운데 모세가 한 말이 딱 한마디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3절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어 아뢰었다. “하나님, 비옵니다. 제발 미리암을 고쳐 주십시오.” 겸손과 충성(신실함),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사람, 성품의 사람 모세는 지도력의 괴로움과 외로움(자신의 형제들까지도 비방하는)가운데서도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역으로 이런 모세의 한 마디 기도, 축복과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세가 겸손한 사람이며 신실한 사람이며 정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p>

<p> </p>

<p>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에서 봅니다. 사람들의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일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지도력의 문제가 상존합니다. 가정, 단체, 교회, 국가에서 지도력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혹은 어떤 태도로 나는 지도력을 볼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지혜를 던져 주는 본문입니다. 지도력의 외로움과 괴로움속에서도 성품의 사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사람으로, 그리고 축복과 치유의 통로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할 따름입니다.</p>

<p> </p>

<p>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1/2950093175_1763136688.8745.png" alt="2950093175_1763136688.8745.png" /></p>

<p></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15 Nov 2025 01:11:5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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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엘비스클럽 민수기 11장 1절 35절 나눔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80</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1/2950093175_1762530290.892.jpg" alt="2950093175_1762530290.892.jpg" /></p>

<p><strong>엘비스클럽 민수기 11장 1절 35절 나눔요약 251107</strong></p>

<p> </p>

<p><strong>불평하는 백성 번아웃된 지도자를 다루시는 하나님</strong></p>

<p> </p>

<p>10장까지 시내산을 출발하기 전 여정을 준비할 때, 진과 대열을 하나님이 분부하신 대로 주님의 명령을 지켰다(cf.9:23)는 말이 반복되는 반면 11장부터는 그와 반대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11장 1절부터 3절은 그러한 패턴이 출애굽기 이후 계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패턴은 이렇습니다. 백성의 불평-하나님의 진노-백성의 모세에의 중보요청-모세의 기도-하나님의 반응. “다베라”, 불사름이라는 지명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앞으로 계속될 일종의 패턴의 예고일 것입니다.</p>

<p> </p>

<p>울며(5회-4,10,13,18,20 징징거리며) 불평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1)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었을 때 그것에 영향을 받고 태도가 전염되었기 때문에 (2)이미 출애굽기 16장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때로부터 약1년 동안 만나만 먹다가 물려서(6절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자신들이 종살이에서 풀려나온 것과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은혜로 주신 만나에 대한 감사가 멀어지고 오히려 이집트의 먹을 것과 오이 수박, 부추 파 마늘과 같은 미각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매우 일상적인 욕망이 피어 올랐기 때문에 (3)그리고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20절)이었기 때문에 결국 불평했고 그 불평에 대한 응답은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곧 재앙이 되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p>

<p> </p>

<p>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돌보시는 사랑을 망각하고 일상적인 욕망으로 가득하여 불평할 때 그들은 구체적으로 중재자 혹은 지도자인 모세를 자극합니다. 4절에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라는 문제제기는 곧 지도자의 능력에 대한 문제제기이고 이것이 지금까지의 패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던 모세의 일종의 “번아웃반응”을 만들게 됩니다. 10절에서 15절의 모세의 걱정과 하나님께 드리는 이야기는 번아웃된 지도자의 전형적 반응(cf.왕상19:4절의 엘리야같은)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지도자인 모세 역시 21절과 2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내 하나님의 23절의 정신차리게 하시는 말씀(“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하였느냐? 내가 말한 것이 너에게 사실로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볼 것이다.”)이 모세의 정신(영)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p>

<p> </p>

<p>여호와(주님)는 우선 번아웃된 지도자 모세를 챙기십니다(16절-17절,24-25절). 일흔명의 백성의 장로 지도자들이 회막에 나와 모세에게 내려준 영(정신)과 같은 영을 받고 백성 돌보는 짐을 모세와 함께 지게 하겠다고 조치하십니다. 그 영이 내려와 머문다는 증거가 예언하는 것(25절)이었고 이 일 이후에 “그들은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지만(cf.신18:15-18, 신34:10 “모세와 같은 예언자”) 오직 같은 영, 같은 정신으로 진으로 돌아가 모세의 지도력에 협력하였을 것입니다(엘리야에게 남겨진 칠천명과 같은 존재들?). 26절에서 30절에 나오는 진안에 남아있던 두 사람의 지도자(엘닷,메닷)의 경우 28절에서 여호수아가 “어른께서는 이 일을 말리셔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아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조치에 불만이 있어 소집에 응하지 않은 경우였던 것처럼 보이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같은 영을 내리셨다는 사실을 알고 모세는 이런 사례를 통해 지도자로서 가지는 마음을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부지불식간에 미래적 혁신, 신약적 성취, 요엘2장 28절 이하의 성취를 지향합니다. 번아웃된 모세에게 혼자가 아니라 한 마음을 품게 된 조력자, 동역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되고 앞을 내다보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p>

<p> </p>

<p>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의 기억(일년정도 됨)을 잊어 버리고 현재 하나님의 임재인 성막이 함께 있다는 것의 가치를 거절하고(20절) 자신들의 일상의 즐거움인 미각과 고기에 대한 욕망과 분위기에 휩싸여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은 일차적으로 고기를 먹게 합니다. 그것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이려나?(18절)”라는 이스라엘의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고기를 먹이신다는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대신 그 탐욕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의 “기브롯 핫다아와,”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거기에 묻는 것으로 내러티브가 끝이 납니다.</p>

<p> </p>

<p>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도록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에 응답하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을 망각하고, 사람들의 욕망에 전염되어 다른 사람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되고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필요와 욕망 때문에 우리의 인생길이 탐욕의 무덤에 갇히게 되는것을 주변에서 자주 봅니다. 돈벼락을 맞아 원없이 돈을 써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과 단체들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돈을 써 보기 전에 그것이 화근이 되어 몰락을 경험합니다. 욕망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곧 저주이고 진노인 셈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두 가지 끊이지 않는 문제, 즉 일상적 욕망의 문제와 그것을 지도자에게 전가하여 생기는 지도자의 번아웃의 문제에 대해 본문이 시사하는 바가 크고, 앞으로 민수기가 전개되어 가는 데 있어서의 중요한 두가지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p>

<p> </p>

<p>삶,일,구원 (3191) 지성근 목사</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1/2950093175_1762530320.0494.png" alt="2950093175_1762530320.0494.png" /></p>

<p> </p>

<p></p>

<p></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08 Nov 2025 00:45:26 +0900</dc:date>
</item>


<item>
<title>엘비스클럽 민수기 10장 1절 36절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79</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0/3697059421_1761320810.5287.png" alt="3697059421_1761320810.5287.png" /></p>

<p><strong>엘비스클럽 민수기 10장 1절 36절 나눔 요약 251024</strong></p>

<p> </p>

<p><strong>나팔 소리, 모세의 외침-기억의 매체</strong></p>

<p> </p>

<p>은으로 만든 나팔 두 개의 사용 규칙을 이야기하는 10장 10절까지가 광야 여정을 위한 준비에 대한 말씀과 그것에 대한 순종이었다면 10장 11절부터 이제 기나긴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이 시작됩니다(22장 1절까지). 11절부터 13절까지와 33절부터 36절까지 사이에 14절부터 28절까지의 행군 순서와 29절부터 32절까지 모세가 장인 호밥에게 함께 갈 것을 간청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봉투형 구조가 인상적입니다. 앞뒤로 감싸고 있는 구절은 궤(4회)와 구름(3회)의 움직임과 머뭄이 상징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이미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부대를 이끌고 따르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광야 어디에 진을 쳐야 할지” 아는, 길 안내자(전문가)의 도움을 간청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p>

<p> </p>

<p>은 나팔 두 개가 이만큼의 사람들에게 들렸던 것은 아마 넓은 광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팔은 회중이 모이든지(2개가 한번 길게-3절) 혹은 지도자들이 모이든지(1개가 한번 길게-4절) 아니면 진을 뜰 때(짧게 급히) 불기도 하지만(5-6절), 전쟁에 나설 때나 경축일과 정기모임에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칠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 번에 의사소통을 하려는 의도로 대부분의 군대들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독특한 것은 9절과 10절에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할 것이라는 말이 각각 전쟁과 축일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능적인 용도도 있지만 특히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이 나팔소리를 통해서 서로 소통하고 움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매체로서의 역할도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p>

<p> </p>

<p>사실 매우 강력한 제국의 군대인 애굽과 힛타이트나 아말렉과 같은 군대들과 비교하면 오합지졸에 가깝기는 하지만 법궤를 필두로 제법 틀을 갖추어 부대기를 앞세우고 각 지파의 지도자들의 이끎(12회 반복)을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은 이미 1장부터 4장까지 인구 조사에 근거하여 진과 대형과 할 일을 정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이끄는 모세로서는 29절에서 32절에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으로 떠나면서도 세부적으로 어떤 곳에 진을 쳐야할지 길 안내자가 되어 줄 장인 호밥이 필요했습니다. 모세의 장인의 이름은 여기와 사사기 1장 16절과 4장 11절에서는 호밥이라고, 출애굽기 2장 18절과 21절에서는 르우엘이라고, 출애굽기 18장에서는 미디안의 이드로라고 하여 혼돈이 있습니다. 29절에서는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이라 하고 “그는 모세의 장인”이라고 하니 ‘처남’인지 ‘장인’인지 견해가 다양합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광야시절 40년간 의지했던 광야 전문가인 호밥에게 간청하는 모세의 모습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구할 수 있는 도움과 인간적인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를 빌리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도전이 됩니다. 또한 호밥의 도움을 구할 뿐 아니라 실은 이방인 미디안인인 자기 장인과 그 가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 누리게 되리라고 약속을 받은 동일한 복을 누리게 하려는 의도도 비춥니다. “우리와 함께 가시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장인 어른께 나누어 드리겠습니다(32절).</p>

<p> </p>

<p>분명 이스라엘의 첫 번째 행군은 삼일동안 구름을 따라(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시내산, 시내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물때까지 진행되었습니다(11-13절). 주님의 언약궤(임재)를 앞세웠지만 동시에 “쉴 곳을 찾았다”고 사람의 할 일을 하는 듯한 진술이 인상적입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35절)!” “주님 돌아오십시오(36절)!”라는 모세의 외침은 하나님에게 하는 외침인 동시에 일종의 리추얼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의 들고 날 때마다(Whenever) 들리게 하는 의도를 가진 문장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애를 써서 움직이고 찾지만 먼저 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잊지 않도록 하는 점에서 나팔이 하는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이 외침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p>

<p> </p>

<p>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주제를 이 본문을 통해 생각해 봅니다. 광야의 행진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성만 강조하게 되면 인간이 해야 할 일에 책임을 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반대의 극단도 가능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인간의 노력과 다른 사람,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과 도움마저도 실은 하나님의 도움, 돌보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지금 오랜 공직을 마감하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마당에서, 어떤 이는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처럼 안정적이지 못한 유목적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기의 불안함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과 함께 스스로 애쓰고 노력하며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일의 균형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려울 때도 기쁠 때도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10절)”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는 나팔, ‘하나님이 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습니다.</p>

<p> </p>

<p>삶,일,구원 (3191) 지성근 목사</p>

<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0/3697059421_1761320827.7876.png" alt="3697059421_1761320827.7876.png" /></p>

<p></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Sat, 25 Oct 2025 00:47:1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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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엘비스클럽 민수기 9장 1절 23절 나눔 요약</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LBiS&amp;amp;wr_id=378</link>
<description><![CDATA[<p><img src="https://1391korea.net/data/editor/2510/2009482344_1760715177.1921.png" alt="2009482344_1760715177.1921.png" /></p>

<p><strong>엘비스클럽 민수기 9장 1절 23절 나눔 요약 251017</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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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정체성과 방향성-주의 지시를 따름</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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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장 1절의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이듬해 첫째 달에”는 시간적으로 1장 1절의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이 년이 되던 해 둘째 달 초하루에”보다 먼저입니다. 민수기가 단순하게 시간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갖고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민수기 9장의 유월절 규례(1-14절)와 성막 위 구름을 보고 인도받는 이스라엘(15-23절), 두 이야기는 어떤 의도로 여기 존재하는 것일까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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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율례와 규례(cf.출12장, 레23:4-8)를 따라”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시고 그렇게 했으나(1-5절), 주검에 몸이 닿아 부정을 타서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신들도 참여하고 싶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6-7절), 이에 대해 모세가 “어떻게 지시를 내리실지 들어 봐야”겠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8절).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문제를 가지고 온 자들에게 합리적일 뿐 아니라(다음 달에 똑같이 유월절을 지켜라), 그 외의 예외적 사항들까지 고려하는(먼길을 떠난 사람, 함께 살고 있는 외국인까지) 세심한 배려를 느끼게 합니다(9-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절은 합당한 이유없이 “(정해진 때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셔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백성됨을 지키는 것, 즉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의 중요한 단서임을 밝힙니다. (애석하게도 이 유월절이 두 번째이자 향후 40년동안에 유례가 없는 유월절 규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세 번째 유월절 준수는 여호수아 5장 10절 이하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후일 이 대목을 보게 될 후손들은 어떻게 쉽게 이스라엘이 이 중요한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를 쉽게 떠나는 지를 보고 경계를 삼았을 것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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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절의 모세의 말에 있는 “주님께서 어떻게 ‘지시’를 내리실지”라는 말에 들어 있는 “지시(commands)”라는 단어가 15절 이하에서는 “주님의 지시(Lord’s command-8회 반복)”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성막을 세우던 날부터 “성막(10회)”의 기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14회)”과 “진(6회)”에 머무를지 혹은 “길을 떠(9회)”날지 하나님의 백성의 방향과 인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알고 임재(구름과 밤에 불처럼 보이는 그것)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23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고, 주님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다. 그들은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분부하신 대로, 주님의 명령을 지켰다.” 여정을 시작하는 시점의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매우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얼마 있지 않아 순례의 여정(민수기)에서 실패의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데 이것이 어떻게 출발 지점에서 멀어져 있는지, 시작은 좋으나 과정과 결과까지 좋은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 이를 통해 후일 독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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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떤 점에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방향성에 있어서, 단지 법조문에 얽매이기 보다 문제제기와 질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넓은 마음으로 여러 가능성(심지어 외국인을 포함시킴)까지 생각하시고 반응하시는, 모든 백성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구름과 불구름(야간)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도를 매 순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정의 출발의 시점에 분명하게 확인하는 의도로 두 에피소드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언제나 “주의 지시”를 따라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재확인하여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가나안행이 원래 계획대로 11일(cf.신1:2) 혹은 한 달(직선거리 340Km, 실제거리 640km) 정도였다면 “주의 지시”를 받는 것이 오히려 쉬었을 것이지만 40년이라는 세월은 그 출발부터도 그렇지만 “주의 지시”를 받지 못하거나 받지 않는 수많은 상황과 변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오랜 순종의 걸음을 걷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이런 말씀을 대하고 경각심을 가지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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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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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date>Sat, 18 Oct 2025 00:33:1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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