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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상생활사역연구소 &amp;gt; ETT 3191 &amp;gt; ETT 3191 게시판</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tt_002</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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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ETT 3191 이 무엇인가요?</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tt_002&amp;amp;wr_id=5</link>
<description><![CDATA[<p>ETT 는 Experiencing The Trinity 의 첫글자를 딴 연구소의 학습공동체를 말합니다.</p><p>이 학습공동체는 우리 연구소의 존재이유인 일상생활의 신학과 </p><p>미션얼(Missional)운동의 토대가 되는 삼위일체신학과 영성을 탐구합니다.</p><p><br /></p><p>3191 은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p><p>91은 통상 "구원"이라고 읽는 바 연구소가 지향하는 통전적 구원을 의미합니다.</p><p>숫자 31은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3은 "삶(Life)"을 1을 "일(Work,Labor)과 발음이 같으므로 일상생활사역이 삼위일체신학과 영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4가지 숫자모음으로 생각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p><p><br /></p><p>ETT는 처음 일종의 대안신학교육의 의도로 시작했습니다.</p><p>강의실 세팅에서 가르치는 자 중심으로 교수하기 보다 </p><p>학습자 중심의, Action-Reflection 방식의. Learning community 를 지향합니다.</p><p><br /></p><p>ETT는 삼위일체신학과 영성에 기초를 두고</p><p>다양한 제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시도를 계속 할 것입니다.</p><p><br /></p>]]></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2 Apr 2019 15:32: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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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신앙-제자도의 기초</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tt_002&amp;amp;wr_id=4</link>
<description><![CDATA[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신앙-제자도의 기초&nbsp;  <br/><br/>그리스도인으로서의 출발이 가시적으로 세례를 기점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면 그리고 세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안으로 잠기게 되는 삼위일체적 신앙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안으로 잠겨 충만해진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그 성화의 과정에서도 역시 삼위 하나님안에 잠겨 충만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생각하였습니다. 전자를 &#039;전도&#039;와 &#039;회심&#039;으로 본다면 후자를 &#039;제자도&#039;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를 이야기할 때 대개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039;예배&#039;, 수평적으로 공동체안에서 공동체 구성원과의 관계로서의 &#039;공동체&#039;,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039;선교&#039; 이 세가지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제자도에 있어서 중요한 세가지 훈련인 &#039;예배&#039;와 &#039;공동체&#039;와 &#039;선교&#039;에 있어서 그 뿌리와 기반을 제공합니다. <br/>&nbsp;<br/>데럴 존슨은 그의 책 「삼위하나님과의 사귐 」에서 토렌스 형제(토마스, 제임스)가 쓴 삼위일체신앙에 관한 책들을 통해 얻게 된 감격을 기반으로 이 사실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034;사랑이신 하나님이 나에게, 죄인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내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그분께 다가오게 하십니다. 내가 사랑하시는자, 사랑 받으시는 자,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의 원 안으로 다가오도록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039;함께 사랑하는 자&#039;가 되는 것입니다.(p.62)&#034; 데럴 존슨은 여기에 복음이 있고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의미이며 이것이 하나님과 친구된다는 것의 의미이며 이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라고 말합니다. &#034;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원 안에서 &#039;함께 사랑하는 자&#039;가 되기 위해 창조되고 구원받은 존재라는 조명 안에서 모든 것을 보게(p.63)&#034; 될 때 &#034;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는 자이며(예배), 서로를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는 자이며(공동체), 세상을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는 자입니다(선교).&#034;<br/>&nbsp;<br/>예배의 참된 의미는 &#039;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039;가 되는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성자는 성부를,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예배하시고 예배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합당히 영광과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는 삼위 하나님안으로 성령을 통해 초대 받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조바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배는 삼위 하나님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초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br/>&nbsp;<br/>공동체인 삼위일체의 원안에서 우리는 공동체로서 다른 사람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공동체안에서의 사랑 역시 변덕스럽고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034;우리는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서로와 관계를 맺습니다.(p.69)&#034; 그렇기 때문에 죽음도 성도의 교통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와 공동체 둘 다에서 우리의 마음이 편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예배하고 우리의 힘으로 공동체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034;하나님과 함께&#034; 사랑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br/>&nbsp;<br/>마지막으로 세상을 그 마음에 품고 계시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알고 느끼게 되고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세상을 사랑하는 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034;우리는 세상을 하나님과 &#039;함께 사랑하는 자&#039;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br/>&nbsp;<br/>예배, 공동체, 선교, 제자도의 훈련중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자원에 의지하여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가능한 것입니다. 삼위하나님안에 잠기고 충만함 없는 예배와 공동체와 선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이벤트일 뿐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공동체와 우리의 세상을 향한 선교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 지 재확인하여야 할 때입니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30 Mar 2018 23:26: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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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과 균형(均衡)</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tt_002&amp;amp;wr_id=3</link>
<description><![CDATA[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 균형(均衡)&nbsp;  <br/><br/>성령 충만은 일상생활에서 경험해야 할 영적 실재(reality)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 받는 데(물에 잠기어 충만한 상태)서 시작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계속되는 여정 역시 끊임없이 처음 받았던 세례를 기억하며 삼위하나님의 실재 안에 잠겨(예레미야의 표현대로 하면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거하여 충만을 경험하는 삶은 ‘관계’속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의(義)’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지난 번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의 삶과 삼위일체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br/><br/>대럴 존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삼위일체에 뿌리를 두고 형성된다는 점에서 다리가 세 개인 의자와 같습니다. 다리 하나를 빼 내면 의자는 흔들리다가 곧 넘어지게 됩니다. 다리 둘을 빼내면 곧바로 의자는 넘어집니다.(「삼위 하나님과의 사귐」,ivp. p.54)&#034;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삼위로 존재하시는 한분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양태론적 하나님이나 혹은 성부하나님에게 예속되는 성자나 성령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므로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혹은 세분의 신이 각각 따로 일하시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각각 다른 신을 구하고 강조하는 삼신론적 경향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부를 강조하거나 성자를 강조하거나 혹은 성령을 강조하다가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계추 경향(pendulum tendency)으로 한쪽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될 때 균형을 잃은 신앙의 모습을 띄게 됩니다. 최근 한국교회가 한 가지 방향으로 달려가는 징후를 보는 데 그것은 성령에 대한 강조입니다. 막혀있는 답답한 개인과 교회의 이런 저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만약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신앙의 균형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신앙의 출발부터 신앙의 지속되는 여정 모두에서 성 삼위 하나님이 늘 춤추듯이 하나로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 없는 성령의 사역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령 없는 성자의 사역이 없으며 성자와 성령이 없는 성부만의 사역 역시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생각하는 균형은 산술적인 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 안의 관계적 역학구도(교회의 역사는 성부는 성자를 나시고 begotten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proceed)를 알고 인정하는 역동적인 균형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br/><br/>지난 세기 후반부 우리들은 소위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에 대해 심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각각 강조하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강조를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로 1984년과 1989년에 있었던 로잔회의는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역설한 대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마치 평균대 위를 걷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늘 배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이라는 것이 늘 이런 한계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를 우리 신앙의 균형의 중심부에 두는 것은 둘 사이의 균형을 구하는 것보다 훨씬 안정된 균형을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평균대는 역동성의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지만 삼발이는 역동적으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30 Mar 2018 22:52: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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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과 관계</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tt_002&amp;amp;wr_id=2</link>
<description><![CDATA[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관계&nbsp;  <br/><br/>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세례를 받음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함으로 이야기한 지난 칼럼에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이를 &#039;성령충만&#039;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저는 데럴 죤슨이 삼위하나님과의 사귐 이라는 책에서 언급하는 &#039;&#034;관계&#034;와 &#034;균형&#034;을 손꼽고 싶습니다. 이 &#034;관계&#034;와 &#034;균형&#034;은 또한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먼저 &#034;관계&#034;의 문제를 생각해 보지요.<br/>&nbsp;<br/>삼위 하나님이 누리시는 관계는 인간의 모든 관계의 원형이요 기초가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관계의 하나님을 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안에 잠기는 &#034;충만&#034;을 경험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삼위 하나님의 관계 속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의 용어로 표현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붙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생명충만, 말씀충만) 요한복음 17장의 언어로 표현하면 &#034;아버지가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안에 있게&#034;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함께 춤춘다는 의미를 가진 perichoresis라고 말하는 데 여기서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속에 잠기고 들어가는 것이 확장되어 제자 공동체가 관계적인 용어로 &#034;하나&#034;가 되는 경험과 연결됩니다. 즉 삼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제자 공동체속의 올바른 관계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br/>&nbsp;<br/>&#039;올바른 관계&#039;를 성경은 의(義)라고 말합니다. 義는 단순히 한 개인의 덕성이나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반드시 관계속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 자아와의 올바른 관계, 일과의 올바른 관계, 생태계와의 올바른 관계..이 모든 관계를 통해 우리는 義를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말로는 성령충만, 성령세례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개인안에 뭔가 채워 넣는 것으로 이해할 뿐, 삼위 하나님의 관계안으로 잠기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034;관계&#034;속에서 의를 추구하는 삶에 대해 무지하고 문외한인 채 특정한 영역에서 &#034;충만&#034;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충만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소위 &#039;영지주의적 혐의&#039;를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br/>&nbsp;<br/>일상생활사역은 관계를 전제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자기자신, 주변 사람들, 일, 정사와 권세들, 동식물과 생태계들과의 관계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올바른 관계 즉 義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위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면 일상생활속에서 전반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034;충만&#034;(성령충만, 말씀충만, 생명충만등)은 이렇게 &#034;관계&#034;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30 Mar 2018 22:45:1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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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과 충만(fullness)</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ett_002&amp;amp;wr_id=1</link>
<description><![CDATA[일상생활사역과 삼위일체 신앙<br/><br/>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과 충만(fullness)&nbsp;  <br/>&nbsp;<br/>「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이란 책을 함께 읽고 나누면서 삼위일체 신앙이 단순하게 신학적인 사변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전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앙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br/><br/>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마28:19)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역시 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즉 삼위하나님의 실재 속에 잠기는 충만(우리는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부릅니다)속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출발에서부터 성화라고 부르는 우리 성도들의 삶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의 신앙이 뿌리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br/><br/>회심과 중생을 경험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으며 성부의 부르심이 없으면 성자를 찾을 수가 없으며,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출발부터 철저히 삼위일체 신앙에 대한 이해, 삼위일체 신앙에 잠기고 충만해 져야 합니다. <br/><br/>거듭남 이후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성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과&nbsp;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 데 힘과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한 것이 별개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계몽주의 이후 개인이 강조되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나’에게 초점이 있기 때문에 ‘나’의 필요를 위해 그때 그때 &#039;성부&#039;가 필요하다가 &#039;성자&#039;가 필요하다가 &#039;성령&#039;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암묵적으로 현대의 신앙생활에 편만해져 있는 데 이것은 세명의 신이 있다고 여기는 ‘삼신론’에 가깝습니다. <br/><br/>바울은 성령충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반복적으로 처음 신앙을 고백할 때 받았던 세례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회상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나의 필요 때문에 내가 충만해지고 나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의 위격중 하나가 필요하고 그 중에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구한다든지 ‘성령세례’ 혹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하는 것은 나 중심주의의 반영입니다. 오히려 처음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실재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잠겨 충만을 경험한 것 처럼 계속하여 이 세례가 의미하는 실재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이며 성화인 셈입니다. <br/><br/>내 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을 추구하는 것과 삼위 하나님의 실재 속에 들어가 잠겨 충만한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내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신앙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성취로 이해하는 것이며 올바른 신앙의 균형을 가지지 못하는 모습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의 실재로 세례받음으로 시작하여 삼위 하나님의 실재로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신앙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 중심적인, 자기도야가 아닌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신앙, 관점과 삶과 선교에서 균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항상 삼위 하나님의 실재안에 잠겨 충만을 경험하는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Mar 2018 17:03:1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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