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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일상생활사역연구소 &amp;gt; TGIM 운동 &amp;gt; TGIM 자료실</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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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람을 위한 영성 11장 몸을 길들이다 - 기독교 영성과 몸의 훈련</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9</link>
<description><![CDATA[<p>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부산대 모임<br />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 부대 앞 오이코스</p>

<p><strong>로드니 클랩, “사람을 위한 영성”, IVP, 2006</strong></p>

<p><strong>11. 몸을 길들이다 - 기독교 영성과 몸의 훈련 </strong></p>

<p><strong>운동과 식이요법</strong><br />
  <br />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이 지탱하는 사회적 유기체인 교회에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은 운동 감각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br />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몸으로, 운동 감각으로 배운다. 예컨대, 기도에 관한 이론을 배우기 전에 기도의 자세와 언어를 익힌다. 우리는 몸으로, 몸을 통하여 배운다. 또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여서 배운 것을 생생히 간직한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의 운동, 특히 몸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br />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이런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잦은 기도, 성경 읽기, 자선 행위, 그 밖의 영성 훈련은 상당히 별난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다. 사실 성경의 인물과 기독교 전통을 들여다보면, 영적 훈련 및 죄와의 싸움에 대한 태도가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br />
  하지만 우리가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꼼꼼한 태도를 버렸을지 모르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꼼꼼한 강박관념까지 갖고 있다. 다이어트와 규칙적인 운동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식생활과 운동을 생사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유명한 뉴스 잡지들이 요즈음에는 종교란을 없애고 건강 코너를 신설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br />
  건강과 관련하여 사소한 잘못된 습관들이 결국 건강을 악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영성의 전통이 우려하는 바는 사소하게 보이는 죄를 하나씩 짓게 되어 그것이 습관화되고 마침내 영(그와 더불어 영적인 몸도)이 뚱뚱해져서 둔해지는 것이다. 영적 선배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라고 한다. 현재의 신체적 몸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영적인 상태와 장차 부활한 다음에 입을 영적인 몸에 주목하라고 한다. 우리 현대인은 디모데전서 4:7-8의 말씀을 거꾸로 뒤집곤 한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우리가 점차적으로 개발하는 습관과 성품이 결국에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하나님과의 교통)이나 영원한 죽음(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에 걸맞는 존재로 만들 것이다.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일은 지속적인 운동과 비슷하다. 의사들은 2주에 한번씩 하는 운동은 전혀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리에게 일러 준다. 자주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한 달에 한 번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영적 운동과 다이어트를 소홀히 하면 영적 건강이 나빠지고, 교회 참여와 성품 개발에도 지장이 많을 것이다. 몸의 동맥과도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 및 동료 피조물과의 관계도 막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극단에 도달하면 결국 죽음과 파멸을 당할 것이다.</p>

<p><strong>인내와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strong></p>

<p>  기독교 영성은 운동 감각의 영성이다. 기독교 영성과 성품을 배우고 유지하는 일은 몸의 습성과 태도에 많이 달려 있다. 훈련된 몸이 정신 상태를 좌우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br />
  이런 각도에서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인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내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정통 기독교를 따르는 우리의 선배들이 우리를 고통당하는 놀라운 존재, 곧 두 세계에 낀 중간적 피조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숭이와 천사 사이에 있으며, 또한 두 시기 사이에 끼어 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때에는 만물이 온전한 모습을 되찾고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빌 2:9-11). 한 평론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p>

<p>  “초대 교회는 우리가 중간기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든가, 일찍이 기권해서 두 손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의 힘 이외에 다른 힘이 있다고 믿는 믿음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런 확신은 하나님을 그 힘의 원천으로 보고 장차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것이 완성될 것을 바라보는 포괄적인 비전에 근거하고 있다. 신자의 마땅한 본분은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하시도록 허용하고 그 능력을 신뢰하는 일이다. 거기에는 현재의 악을 견디면서 장차 그 악을 이기고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일도 포함된다.”</p>

<p>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통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훈련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분은 삼위 하나님 뿐이다. 신자의 일차적 관심사는 성실함이고, 유능함은 이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현재 살아계셔서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다고 믿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완전히 다스리실 것임을 신뢰한다. 그 중간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그 선한 통치를 무시할지라도 인내하는 법, 고난받는 법, 성실함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br />
  19세기에 블룸하르트 부자는 교회와 기독교 영성의 실천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증언이라고 생각했다.<br />
  “죄가 완전히 저지되기까지, 오랜 세월 쌓여 왔던 어두움이 사람들 가운데서 해체되고 사라지기까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버틸 힘을 주는 도움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고 자기 힘과 재주로 처신하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 또 이 세상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돕기보다 오히려 가릴 때가 많다. 우리가 저항과 한계에 부딪힐 때, 위대하신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하나님, 곧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엡 3:20) 이상으로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분께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논리적 개념과 인간의 재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것을 통해 온다.”<br />
  하나님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것이 오리라고 고대하는 삶은 곧 기쁨과 소망이 충만한 삶이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런 놀라운 것을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처럼 상처투성이인 깨어진 세상에서는 우리가 자주 고통을 받을 것이고, 자신만을 위해서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이웃과 원수의 상처까지 감싸 주도록 부름을 받았다. “구주를 믿는 우리는 우리가 고난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안으로 들어가도록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두움을 이기도록 돕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리의 고난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서 그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돕는 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br />
  블룸하르트 부자는 고난을 견디는 인내에 공동체적 성격이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온 세상을 구속하기로 결심하셨다. 그리고 이 깨어진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한 개인의 생애 동안 구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 사역이 시작된 지 이미 여러 세기가 흘렀고, 앞으로도 몇 세기가 더 지나야 할지 모르므로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p>

<p>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열매를 후세대가 처음으로 맛볼지도 모른다. 그 때 우리는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릴 것이다. 그런데,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튼튼한 성벽을 돌파하려면 얼마나 많은 공격을 해야 하겠는가? 우리의 기도는 어두움의 왕의 요새를 망치로 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주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돌파구가 열릴 때까지 여러 해가, 아니 여러 세대가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번의 타격도 낭비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한다면, 가장 든든한 벽이라도 결국에는 무너질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황무지에 치유와 복을 선사하면서 뻗어갈 것이다.”</p>

<p>  이런 유의 인내가 우리 시대에는 얼마나 환영받지 못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때로는 느릿느릿하고 고집스러운 우리의 몸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조바심을 극복하고 즉각적인 결과가 없더라도 오랜 시간 계속할 수만 있다면, 아주 힘겨운 과업과 운동과 연습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성품을 낳고, 성품은 소망을 낳으며,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롬 5:3-5). 사도 바울이 가리키는 소망은 구원의 소망, 곧 “썩어짐의 종노릇”(롬 8:21)에서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의 구속적 치유다. <br />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비교적 작은 인내를 발휘하는 가운데 더 큰 인내를 배울 수 있고, 마침내 하나님의 시온이 이 갈급한 세계에 내려오는 길을 예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는데’ 거기에는 지극히 작은 나도 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주신’ 대상인 그 세상이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또한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p>

<p>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몸의 습성과 태도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과 ‘영적 예배’와 서로 연계시키는 방식이다. 몸의 ‘산 제물’이 ‘영적 예배’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그것이 곧 ‘영적 예배’다. 바울이 여기서 사회적 몸(교회)과 관계지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런 맥락에서 그는 교회 지체들의 구체적인 몸을 언급하면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 낯선 자를 대접하는 일, 기뻐하고 우는 일, 비천한 자와 사귀는 일,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등 여러 가지 가시적이고 신체적인 실천 사항을 인용한다. 바울은 몸과 마음을 적대 관계에 놓기는커녕, 그 둘을 분리시키지도 않는다. 손님을 대접하고 원수를 먹이는 일 등 몸으로 해야 할 여러 행위가 ‘영적 예배’의 실례들이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을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br />
  야고보서도 이와 비슷하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여기서 우리는 좋은 의도와 인사와 신체적 필요의 공급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작용을 볼 수 있다. 행함없이 의도뿐인 믿음은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며 ‘죽은’ 것이다. 몸의 습성과 태도(여기서는, 음식을 주고 옷을 입히는 일)가 믿음을 온전케 하고 살아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몸의 행위를 떠나서는 진정한 의도도 있을 수 없다. 몸으로 그런 행위를 하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그런 소리는 쓸데없는 빈말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을 몸으로 뒷받침하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진정한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예배와 믿음을 참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p>

<p><strong>기도와 몸</strong></p>

<p>  기독교 영성은 기도할 때의 몸가짐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도의 자세는 서서 팔을 위로 뻗은 모습이다. 그것은 진정한 기도를 몸으로 구현하는 자세다. 존경의 표시로 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팔을 벌리면 가슴이 무방비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타인에게 취약한 자세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세를 형성한다. 끝으로, 이런 자세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손과 팔로 아무것도 잡지 않고 우리의 짐을 모두 풀어 놓는다. 서서 팔을 열어젖힌 모습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린 자세다. 이런 몸짓은 우리의 영이 예수님의 뜻과 모범을 따를 준비를 갖추게 한다.<br />
  이 외에도 기독교 영성이 지닌 다른 중요한 차원을 부각시키는 기도의 자세들이 있다. 무릎을 꿇거나 엎드린 자세는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움직이는 형태의 찬양의 기도도 있다.<br />
  이처럼 기도하는 자세가 무척 다양할 수 있지만, 몸가짐이 언제나 중요하다는 점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음의 훈련뿐 아니라 몸의 운동을 통하여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성숙해 간다. 기독교 영성은 운동 감각의 영성이다.</p>]]></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Fri, 19 Jul 2024 09:04:56 +0900</dc:date>
</item>


<item>
<title>사람을 위한 영성 10장 섹스에 미친 현대인 - 기독교 영성 안에 성을 자리매김하다</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8</link>
<description><![CDATA[<p>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부산대 모임<br />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 부대 앞 오이코스</p>

<p><span style="font-size:1.25rem;"><strong>로드니 클랩, “사람을 위한 영성”, IVP, 2006</strong></span></p>

<p><strong><span style="font-size:1.5rem;">10. 섹스에 미친 현대인 <br />
- 기독교 영성 안에 성을 자리매김하다</span></strong></p>

<p>  한 기독교 철학자가 지혜롭게 말한 것처럼, 성과 관련하여 우리 가운데 누구도 완전히 정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성에 정당한 자리를 부여할 수 있고, 성욕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p>

<p><span style="font-size:1.1rem;"><strong>베아트리체와 성적인 아름다움</strong></span></p>

<p>  성욕을 포용하고 품으려면 먼저 성적 쾌락을 잘 정돈하고 적절한 위치에 두는 일부터 해야 한다. 정통 기독교 영성은 성적 쾌락 자체를 하나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의 다른 모든 측면과 마찬가지로 성도 그 나라를 증거하는 데 맞춰져야 하고 그것을 보완해야 한다. 성도 하나님의 선한 질서 안에서 올바른 목적을 섬기는 데 사용될 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당연하다.<br />
  성경 창세기 2장과 아가서는 성을 기뻐하고 성적 아름다움과 욕망을 즐거워하며, 성욕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br />
  기독교 전통 가운데 이와 같이 에로스가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변화되어 가장 아름답게 꽃피는 모습을 가장 탁월하게 그린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라고 생각한다. 단테는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를 향한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바른 질서와 균형 가운데 두어 그것을 찬미하고 더욱 풍성하게 한다.<br />
  인간의 욕망이 욕망의 근원이자 그것의 궁극적인 실체이신 그리스도께 맞추어질 때, 그 굽은 것이 바르게 되고 희미한 것이 명료하게 되어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곳에 도달하면, 우리의 욕망도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돌아가는 바퀴처럼 질서 잡힐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참된 빛을 받을 때에만 인간 욕망의 대상은 모두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게 된다. 하나님의 빛이 비칠 때 우리가 좋아하고 갈망하는 것들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연의 상태가 된다.</p>

<p><span style="font-size:1.1rem;"><strong>성과 그 목적</strong></span></p>

<p>  그러므로 우리는 성을 그늘에서 끌어내어 정통 기독교 영성의 빛 가운데 둘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성욕을 배제시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고 포용할 수 있다.<br />
  그런데 성욕과 쾌락의 온당한 위치와 관련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없을까?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욕망이 방향을 제대로 잡아 제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br />
  기독교 영성은 이에 관해 두 가지 목적을 제시해 왔다. 쾌락은 성의 최종적 혹은 최고의 목적이 아니다. 성적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생산성과 동반자 관계를 겨냥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된다.<br />
  먼저, 섹스는 생명을 낳은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섹스를 통해 새로운 사람이 태어날 경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생명을 주는 일이다. 부부가 성교를 함으로써 관계가 깊어지고 확장되고 풍요롭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부가 더 풍성한 생명과 더 풍부한 사랑을 알고 구현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에서 부부의 존재 이유는 부부 자체를 위한 것이거나 서로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 생긴 더 풍성한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손대접, 가난한 자 돕기, 격려하기, 사회적 안정, 자녀 양육 등과 같이 생명을 주는 활동으로 나타날 것이다.<br />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됨인데, 이는 동반자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섹스는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결혼 관계에서 동반자 의식을 북돋운다. 서로에게 헌신하고 그 가운데 안전감을 느끼는 배우자들은 섹스를 통하여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서로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다. 섹스에는 신체적․심리적인 개방과 취약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연인은 상대방이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노출해야 한다. 연인들은 그들의 의도 및 자아가 서로에게 더 깊고 완전하게 노출되게 함으로써 아무거리낌 없이 하나가 되게 된다.<br />
  한편 기독교 영성의 주제요 대상인 하나님은 한결같이 성실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및 교회와 언약을 맺고 그들이 성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하신 분이다. 결혼한 부부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평생 헌신하기로 서약한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자기 신부인 교회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다.<br />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성실을 증거하는 표지인 셈이다. 기독교 영성은, 섹스가 성실성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심오하게 생명을 부여하고 동반자 관계를 심화시킨다고 본다. 부부는 다른 모든 이들을 배제하고 서로에게만 배타적으로 헌신하기로 한 만큼 그런 경계를 그은 셈이다. 부부는 공공연하게 헌신을 다짐하고 성령과 교회의 지원을 받아, 결혼식장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온갖 시련과 예기치 못한 기쁨을 통과함으로써 그 관계가 더욱 확장된다. 기독교 영성은 성실함만이 결혼 관계를 완성시킬 수 있고 성적 표현이 그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게 한다고 가르친다.</p>

<p><strong><span style="font-size:1.1rem;">동성애의 문제</span></strong></p>

<p>  정통 기독교 영성이 특정한 성적 행습이나 관행을 고려할 때 사용하는 틀이 바로 생산성, 동반자 관계, 성실성이라는 신학적 목적이다. 동성애 관계는 과연 이런 목적을 촉진시킬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br />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서밖에 온전해질 수 있는 길 즉 ‘한 몸’이 되는 길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르면서도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이며, 그 관계는 참된 인간성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맺는 은혜롭고 한결같은 관계를 반영한다. 동성애라는 것은 적어도 성행위의 측면에서 양성간의 연합을 부인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주제를 반영하고 구현할 수 있을까?<br />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과 동성애 성향을 지닌 형제 자매들의 행복과 명예를 모두 보호해야 한다. 이에 관해서 세 가지 제안을 하겠다.<br />
  첫째, 동성애에 대한 입장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충실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은 아니다. 즉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신실한 자와 배교한 자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br />
  둘째,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이 두 가지(동성애를 철저히 정죄하는 것과 전적으로 허용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 기독교 전통에 더 충실해지고 더 건설적인 논쟁을 촉진할 수 있다.<br />
  셋째, 교회가 심각한 논쟁에 빠졌을 때, 기독교 영성의 대표적인 덕이 인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 동성애를 둘러싸고 논쟁하는 교회가 그것을 지켜보는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증거는 바로 인내라고 생각한다.</p>

<p><strong><span style="font-size:1.1rem;">천국에서의 섹스?</span></strong></p>

<p>  몸은 부활하고 변화되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면 섹스는 어떻게 되는가? 영원한 세계에까지 가져갈 것인가?<br />
  성경에서는 특히 사두개인과 예수님의 논쟁에서 이와 관련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에 따르면 부활할 때에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천국에서 천사와 같이 된다고 하신다.<br />
  성경에서는 성행위를 결혼 관계 내에서만 허용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대답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섹스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응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성교가 몸의 부활에 포함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성이란 성교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여성이나 남성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자아 전체를 규정한다. 우리는 완전하게 된 아름다운 몸으로 부활할 것인데, 그 완전함의 한 측면이 곧 남성이나 여성의 모습이다.<br />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말하는 바는 천사가 출산을 하지 않는 것처럼 부활한 인간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그 밖에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인간 관계가 성실성과 신뢰를 회복할 것이라는 점인데, 성실성은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바는, 만일 성욕이 여기서 삶과 동반자 관계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승화되고 변화된 상태에서는 부활 이후의 삶과 동반자 관계를 훨씬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은 성실성을 세우고 생명과 동반자 관계를 증진시키고 즐거움을 안겨 주는 면에서,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무한히 뛰어넘을 것이다.</p>

<p><strong><span style="font-size:1.1rem;">성과 정의</span></strong></p>

<p>  기독교 영성의 관점에서 육체적 몸을 중심으로 성을 조명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적 몸을 중심으로 이 주제를 살펴보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성욕을 바르게 정돈하고 균형있게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질서를 가리키는 사회적 개념이 바로 정의다. 정의는 적절하고 공평한 인간 관계의 형성과 실천을 지향한다. 크고 작은 면에서, 일상적으고 특별한 차원에서, 우리의 공동체와 사회는 정의에 기초해서 생존하고 작동한다. 올바른 관계와 그 적절한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적 몸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br />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과 성행위에 이런 정의와 불의의 개념으로 접근했다. 그는 무질서한 혹은 부정한 섹스가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불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퀴나스는 이런 관점에서 간통과 강간을 평가했다. 또한 결혼관계 밖에서의 섹스를 불의한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그 행위로 인해 태어난 자식을 키우는데 필요한 적절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난잡한 성행위를 어머니만 자식을 돌보도록 만드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br />
  아퀴나스의 논의는 성과 정의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어떤 사회적 몸이든지 적절한 성행위를 규정하고 여러 방법으로 그것을 권장하는 반면, 부정한 성행위를 배척할 필요가 있다. 성이란 너무나 친밀하고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불의한 성은 사람을 해치고 공동체를 해롭게 한다. 고전적 기독교 영성은 교회가 성욕을 합당하게 규제하도록 안내하고, 그 중요한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된다.</p>

<p><strong><span style="font-size:1.1rem;">올바른 ‘판단주의’</span></strong></p>

<p>  사실상 우리 사회는 한편으로는 성적 과시나 탐닉이 만연된 모습,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통렬히 비난하는 모습으로 이분화되어 있다. 그 결과 우리 문화는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성에 미친 사회인 동시에 성을 지나치게 판단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br />
  이에 비해, 정통 기독교 영성은 적어도 성이 도덕과 관계없다거나 모든 판단을 피할 수 있다고 가장하지 않는다. 즉 기독교 영성은 성의 문제에 접근하고 그것을 ‘다루는’ 작업에 도덕적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판단하는 일도 피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를 세울 목적으로 성을 판단하고 사용한다.<br />
  그러므로 우리는 까다로운 춤을 추도록 부름받은 셈이다. 하나님은 높은 표준을 요구하시므로 우리는 표준을 붙들어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은혜를 붙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동시에 자비와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 안된다.<br />
  성과 관련하여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21세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세 가지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성욕을 길들이려 할 때 인간의 의지력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성령의 능력에 의존했다. 둘째, 사막의 교부들은 성욕의 존재와 위력에 대해 정직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처럼 변덕스럽고 신비로운 성을 완전히 길들일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았으며, 욕정을 ‘어느 정도 묶을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셋째, 그들은 표준을 유지하고 판단하는 일을 피하지 않았지만, 타인보다 자신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울 목적으로 성적 훈련을 했던 것이다.<br />
 </p>]]></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Fri, 19 Jul 2024 09:00:10 +0900</dc:date>
</item>


<item>
<title>사람을 위한 영성 9장 예수와 기괴한 인간 - 땅에 속한 기독교 영성</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7</link>
<description><![CDATA[<p>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p>

<p><strong>사람을 위한 영성<br />
(로드니 클랩, IVP, 2006)</strong></p>

<p><strong>9. 예수와 기괴한 인간 … 땅에 속한 기독교 영성</strong></p>

<p>  예수님도 오줌을 누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br />
  우리는 몸에 대한 기독교 영성을 다루고 있다. 몸은 귀하지만 동시에 지저분하다. 배설과 상처를 우리 몸은 지니고 있다. 영성이 만일 천사처럼 되는 것이고 지저분하고 연약한 몸을 무시한다면, 피와 땀과 배설물을 믿음의 삶에서 떼어놓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기독교 영성은 몸을 강조한다. 그것은 성육신의 진리, 곧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면서 참 사람이었다는 진리를 무시할 수 없다.<br />
  몸은 계속 변하고 그런 몸의 변화는 그 몸을 가진 우리가 영원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한다. 털과 가죽이 떨어져 나가고 액체와 노폐물이 방출되는 것은 우리가 천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 죽을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달리 말하면, 몸은 기괴한 것이라는 뜻이다.<br />
  여기서 기괴하다는 말은 어중간한 상태에 끼어 있는 물체, 어떤 범주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것, 애매모호해서 골치 아픈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놀라운 존재로서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기괴한 존재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꿈꾸고, 기도한다. 그래서 동물 및 나머지 피조물과 다른 별개의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신과 짐승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한계를 가진 피조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짐승과 천사 사이에 있는 중간 존재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삶과 몸과 자아가 기괴한 특징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닮고 어떤 면에서는 동물과 비슷한 우리는, 참으로 일관성 없고 신비로우며 자기 모순을 안고 있는 존재다. <br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중간 상태로 오셔서 그것을 포용하셨다. 그렇다면 참된 기독교 영성은 그런 현실에서 달아나거나 기괴한 면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주방뿐 아니라 화장실과 병상에서도 존재하는 영적 피조물이다. 기독교 영성은 우리 눈의 광채 뿐 아니라 손톱 밑의 때까지 포괄하는 영성이다.</p>

<p><strong>진흙 속의 천국</strong></p>

<p>  예수님은 용변을 보셨을까? 그리고 이를 어떻게 처리하셨을까? 이와 관련해서 영지주의적 대답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몸의 정당성과 선한 속성을 긍정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그 구성요소와 기능을 거부한다면, 이는 일관성 없는 태도다.<br />
  테르툴리아누스는 용변 기관이 더러운 자루와 부패의 빨대가 아닌 ‘자연스러운 액체를 깨끗이 처리하기 위한 출구’라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유대-기독교적 태도에 더 가까운데, 이는 유대인이 화장실을 사용한 다음 암송하는 아침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p>

<p>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당신은 지성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몸속에 많은 구멍과 빈 공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 중 하나가 열리거나 이들 중 하나가 막히면 생존해서 당신 앞에 (단 한 시간이라도) 서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육체를 치유하시고 경이로운 일을 행하시는 당신을 송축합니다.”</p>

<p>  이 기도에 따르면 소화기관과 용변기관은 ‘지성으로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다. 어떤 논평가는 화장실의 변기가 하나님의 보좌와 나란히 놓여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화장실의 사용과 같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신다.</p>

<p><strong>땅에 속한 삶을 위하여</strong></p>

<p>  현대 도시인은 창조 세계 및 우리가 몸담은 ‘생명의 순환’과 동떨어져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주는 창조세계의 그물망으로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영적 훈련인 셈인데, 이는 하나님 아래서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를 수용하는 훈련이다.<br />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인식을 개발할 수 있을까? 우리도 먹고 배설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화장실 청소를 권한다. 이는 자그마한 기독교적 봉사이며 나와 내 사랑하는 식구가 죽을 몸을 가진 존재임을 상기시켜 준다. 일회용 기저귀보다 헝겊 기저귀를 사용함으로써 더러운 천을 직접 헹구는 일을 통해 우리가 현실에 뿌리박은 존재임을 상기하고 우리 아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또한 동물들과 함께사는 방법도 있다. 동물들은 인간에게, 계획을 짜고 계산을 할 때 인생이란 하루씩 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통제나 조작이 불가능한 것임을 무시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즉 우리도 피조물일 뿐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정원 가꾸기, 육체 노동, 환자용 변기 청소, 환자 목욕 시키기 등을 통해 우리의 육체성과 이 땅의 피조물과의 하나됨을 인정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p>

<p><strong>자신의 참 모습을 보기까지</strong></p>

<p>  우리가 기괴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과 이웃과 원수와의 관계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br />
  전통적 기독교 영성은 우리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늘 지적해 왔다. 그리고 우리의 덕이 다른 사람들의 덕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지적해 왔다. 우리는 타인의 죄에 대해 혹독한 반면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거리를 찾는 경향이 있다. 자기를 과장하고픈 충동은 늘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원수를 규정하고 그를 마귀하고 생각함으로써 더 큰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은 천사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br />
  그러나 그리스도는 남을 판단하는 것을 극히 경계하셨고 바울도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자만과 자기 기만을 경계했다.(두 수행자 이야기-책 216페이지)<br />
  오랜 세월 기독교 전통은 참된 성인은 자기를 남보다 더 낫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며, 가장 존경받는 성인과 가장 극악한 죄수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 종(種)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악과 파괴성을 지닌 죄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br />
  체스터턴은 그의 책의 주인공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br />
  “자기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혹은 나쁘게 될 소지가 있는지를 알기까지, 이처럼 잘난 체하며, 남을 깔보고 ‘범죄자들’을 저 멀리 숲 속에 사는 원숭이 취급할 권리가 자기에게 없음을 깨닫기까지, 저급한 놈들 운운하면서 더러운 자기 기만을 일삼는 모습을 모조리 없애기까지, 바리새인의 기름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자기 영혼에서 짜내기까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어떻게든 범죄자인 자신을 붙잡아 감금하는 것이 되기까지는, 아무도 진정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br />
  우리가 남의 허물만 보지 않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뒤틀리고 기괴한 죄의 얼룩을 간파하게 될 때에야 이웃 및 원수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p>

<p><strong>영성과 방귀</strong></p>

<p>  우리가 고상하고 얌전해지려고 최선을 다해도, 때로 우스운 짓을 하는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도 하나의 영적 훈련이다(예컨대 방귀). 그런 경우에는 유머 감각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스도인은 자칫하면 까다로워지기 쉬운데, 그런 모습은 천사처럼 되려는 것이지 사람다운 존재가 되는 길은 아니다. 우리는 투박한 피조성을 끌어안아야 한다.<br />
  루터는 “나는 마귀를 대적하는데 종종 방귀로 그를 쫓아버린다”고 했다.<br />
  중요한 점은, 몸은 선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고 별로 고상하지 않은 특징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일부와 그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천사처럼 되고 천사의 영성을 추구하려는 주제넘은 태도다.<br />
  전통 기독교의 영성은 땀을 흘리고 방귀를 뀌고 트림을 한다. 몸은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있으며, 장차 변화된 모습으로 영원한 세계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p>

<p><strong>몸의 결함과 아름다운 성화의 상징</strong></p>

<p>  그런데 우리의 투박함과 기괴한 속성이 영원한 세계로 이어질까? 우리가 소망하는 부활된 몸에는 눈뿐 아니라 소화 기관과 성기까지 달려있을까? 주류 기독교는 그것을 긍정한다.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 생선을 섭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몸이 경이롭고 아름답기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몸이 존재할 것이다.<br />
  그런데 상처나 질병이나 절단된 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전통 기독교는 부활시에 이 모든 것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시 창에 찔린 예수님의 상처와 그의 손의 못자국과 같은 것은 부활시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는 결함이 아니라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보여지는 상징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순교자의 상처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상처’이기 때문에 부활시에도 그대로 남아 추한 것이 아니라 존귀한 것으로, 그들의 아름다운 용기를 밝히 드러낼 것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p>

<p><strong>발 씻기에 대한 묵상</strong></p>

<p>  모든 몸의 지체가 귀천이 없지만 대체로 발은 더럽게 되기 쉽고 늘 낮은 위치에 있는 천한 지체로 여겨져 왔다. 이런 발을 씻어 주는 행위는 취약점을 드러내는 행위요 상호 의존 관계를 확인하는 의식이다. 또한 신발을 벗는 행위에 대한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이런 행위는 무력함과 슬픔, 가난, 투옥 등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영적 무력함과 가난함을 모세가 신발을 벗었던 장면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br />
  그런 발을 돌보는 행위는 가장 기본적이고 아름다운 행위이기도 하다. 투터는 육신의 몸과 그리스도의 영적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몸의 한 지체가 그 전체를 구현한다고 주장했다. 즉 한 지체라도 아프면 전체 몸이 그 지체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그 지체가 적당한 보살핌을 받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br />
  영으로뿐 아니라 몸으로도 서로를 보살핌으로 새 예루살렘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이 되자. 거기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잔칫상 아래에서 두 발을 뻗고 편히 쉬게 되리라.</p>

<p><br />
&lt; 일상생활의 영성에 관한 기도문을 만들어 보자 &gt;</p>]]></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Thu, 07 Sep 2023 09:34:10 +0900</dc:date>
</item>


<item>
<title>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후기</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6</link>
<description><![CDATA[<p>[TGIM 자료/ 정리 : 정한신] </p>

<p><span style="font-size:1.25rem;"><strong>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strong></span></p>

<p><strong><span style="font-size:1.25rem;">후기</span></strong></p>

<p>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평일 세계는 불확실성과 딜레마로 가득찬 어려운 세계다. 그러니 그러한 세계에서 단 며칠이나마 해방되는 날이 기쁜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주말이 온데 대해 진정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br />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평일 세계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복음은 우리를 세상적 성공을 쫓아 가야 할 필요에서 자유롭게 하였다. 예수님의 삶은 세상의 그 어떠한 정사나 권세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음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의 인생에는 목적이 있음을 확언해 준다. <br />
  사도 바울은 많은 갈등, 난관, 투옥과 논쟁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기꺼이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들에 정복당하지는 않았다. <br />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매일 펼쳐지는 곳은 바로 평일 세계다. 하나님이 우리더러 와서 창조적인 일을 하라고 부르시는 곳도 바로 평일 세계다.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며 집 없는 자들에게 집을 줄 수 있는 곳도 바로 평일 세계다. 평일 세계는 사랑과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곳이다. 우리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곳 역시 바로 평일 세계다.<br />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교구는 월요일 세계다.<br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월요일입니다!”</p>

<p>(2022년 8월 16일 요약 정리/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정한신)</p>]]></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Tue, 16 Aug 2022 13:39:08 +0900</dc:date>
</item>


<item>
<title>팀 켈러의 일과 영성 - 3. 일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수단이다</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5</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font-size:15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팀 켈러의 일과 영성</b><span style="font-size:10px;"> </span> </p><p style="text-align:center;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두란노, 2013)</p><p style="text-align:center;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text-align:center;font-size:13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Part 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b></p><p style="text-align:center;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text-align:right;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정리 : TGIM 울산점 박혜진</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 </p><p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Chapter3 – 일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수단이다</b></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1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 일터에서 주님의 매뉴얼을 따라 야심차게 일하라</b></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1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b></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span style="text-decoration:underline;"><b></b></span> </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인간은 일하도록 설계되었고 일을 통해 존엄하게 되며, 일은 창의성, 특히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이기도 하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창조주는 첫 인류를 동산에 두셨다. 그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위해 순종해야 할 말씀을 주시고(16-17절), 문화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개발하도록 정원을 돌보는 육체노동을 시키시는 한편(15절),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작업을 통해 정신적인 역량과 통찰력을 키우게 하셨으며(19절), 하와를 지으시고 짝으로 맺어주셔서 인류가 성장해서 세상에 가득하게 될 길을 열어두셨다(19-24절).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양육은,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막중한 직무(문화 명령)를 맡기시기 위함이다. 이 명령은 무슨 뜻일까?</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첫째로, “땅에 충만하라”는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개체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땅에 충만함은 ‘출산’이 아니라 ‘문명’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세상에 인간 사회가 가득하길 기대하셨고, 인류에게 사회를 발전시키고 세워가는 것을 일로 삼게 하신 것이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둘째로,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더 나아가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이는 폭력적인 의도가 포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청지기나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경작하는 책임을 맡기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물질계를 지으실 때, 이미 준비해 둔 기성품을 꺼내놓지 않으셨다. 온통 “혼돈하고 공허”하던 세상에 뼈대를 세우시고 나누어 정교하게 다듬으셨고, 다양하게 지으셨으며, 공허한 자리에 적합한 구성 요소들을 채워 넣으셨다.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완성되어 그 풍요로움과 잠재력이 최대한 드러나도록 열심히 일하셨다. 그러므로 ‘정복’이라는 말은 세상을 일의 무대로 만드셨음을 암시한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1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하나님의 사역 패턴을 따라 일해야 한다</b></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b> </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면, 주님의 사역 패턴을 따라 일해야 마땅하다. 그 안에 담긴 잠재력이 다 드러나지 않은 정원을 가꾸는 능동적인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원재료를 가지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특히 인류가 번성하고 윤택해지는 방식으로 재배열하는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일을 해야 한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이러한 패턴은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농업, 음악, 재단, 청소, 기술, 교육, 상담, 예술, 연구, 의료, 수집 등. 혼돈을 정리해서 질서를 잡고, 창조적인 잠재력을 끌어내며,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창조 세계를 펼쳐 보일 때마다 하나님의 창의적인 문화 패턴을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원재료를 가져다주시고 함께 만들고 키워 내는 특권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한, 무슨 일을 하든지 메마르지 않는 창의성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것이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키셨다. 인간의 본성과 기질의 폭을 최대한 확장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문명을 건설하게 하시려는 배려였다. 인간은 일을 통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 내고, 창조 패턴을 활용하며, 공동체를 조직한다. 어떤 일이든, 일은 세상의 기본 구조를 더 발전시키거나 유지하거나 고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의 노동은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연결된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1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크든 작든 모든 일이 소중하다</b></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b> </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모든 사업이 공익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투자자와 기업인이라면 다들 공공의 이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수익을 올리는 일에 온 신경을 쓴다고 믿는 것은 옳지 않다. 사역자들이, 비즈니스 역시 문화를 만들고 피조 세계를 가꿔가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을 갖지 않는다면 교인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성경이 가르치는 이런 노동관은 야심을 품고 앞서 나가는 이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대다수 직장인들에게도 비전과 의미를 준다. 날마다 피조 세계를 가꿔나가는 건 누구나 감당해야 할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세상에는 창조주께서 일하신 패턴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존엄성이 떨어지는 일상사도 없고, 주님이 보여 주신 유형과 한계를 초월하는 대형 거래나 공공정책 사업도 없다. 아울러 하나님은 손수 지으신 피조물을 가꾸는 방법과 이유를 저마다 알아서 찾아내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일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시며 뒤를 따르라고 신실하게 부르신다.</p><p style="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Mon, 10 Sep 2018 15:33:0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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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팀 켈러의 일과 영성 - 2.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4</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text-align:center;" align="center"><b><span style="font-size:14pt;">팀 켈러의 일과 영성 </span></b></div><div style="text-align:center;" align="center"><b><span style="font-size:14pt;">(두란노, 2013)</span></b></div><div style="text-align:center;" align="center"><b><br /></b></div><div style="text-align:center;" align="center"><b><span style="font-size:14pt;">Part 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span></b></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right;" align="right"><span style="font-size:11pt;">정리 : TGIM 울산점 권은선/정한신</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span></div><div><b><span style="font-size:12pt;">Chapter2 –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span></b></div><div><b><span style="font-size:12pt;">/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span></b></div><div><br /></div><div><span style="font-size:11pt;">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곳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6-27)</span></div><div><br /></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신들이 일을 시키려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축복으로 보지 않았다. 일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었다.</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그리스 철학자들은 … 인간은 활동적인 생활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색과 명상에 충실하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그렇다면 노동은 최상의 삶을 사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밖에 없다. 일은 세상에 매인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 신들이 지배하는 철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걸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스인들은 이 땅에 사는 한 노동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모든 일이 동등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몸이 아니라 정신에 유익한 일이 더 고상하며 덜 동물적이라고 믿었다. </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리 하디(Lee Hardy)를 비롯한 여러 크리스천 철학자들은 “노동과 일이 차지하는 위치를 바라보는 그리스인들의 자세는 기독교회의 사상과 행위규범 양면에 걸쳐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우리 시대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물려받은 건 이런 사조가 듬뿍 배어든 노동관이다.</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일은 필연적으로 악하다는 인식부터가 그렇다. 그 관점에 따르자면,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여살리며 다른 이들에게 임금을 주어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시키는 것만이 선한 일이다. 둘째로, 지위가 낮거나 수입이 적은 일은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고 믿는다. 이런 관념이 가져오는 폐단 가운데 하나는 너나없이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은사와는 맞지 않더라도 더 높은 봉급과 특혜를 주기만 하면 얼른 그 직장에 들어간다.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천하게 보는 노동을 하기보다는 일을 놓는 쪽을 택하고 있으며 대다수 서비스 직종과 육체노동이 이 범주에 속한다는 점도 큰 문제다. 이른바 식자층에 드는 이들이 경비원, 가사도우미를 비롯해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을 업신여기는 듯 처신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span></div><div><br /></div><div><span style="font-size:11pt;">  <span style="font-size:12pt;">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두 고귀하다</span></span></div><div><br /></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성경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손으로 하든, 머리로 하든 일이란 일은 죄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증표로 인식한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식물과 짐승들은 그저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따름인데 유독 인간은 명확하게 일을 부여받았다. </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할 일을 구체적으로 받았다. 창세기 1장 26절이 ‘다스리라’는 명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런 통치 행위가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규정해 준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일종의 부섭정(vice-regent)으로서 나머지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주님이 창조 과정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 본성을 사용하여 창의적으로 문명을 세우고, 친히 지으신 만물을 보살피는 일들을 나눠 맡게 된 것이다. 창조주가 인간을 지으시며 기대하신 가장 큰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일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셨고 인간이 주님을 대신해서 하는 행위이기에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일 자체가 존엄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일이 고귀하다. </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정원사였으며 신약에서는 목수였다. 주님이 일에 부여하신 엄청난 존엄을 담아내지 못할 만큼 하찮은 일은 없다. 몸으로 하는 단순한 노동도 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활동과 조금도 다름없이 ‘하나님의 일’이다.</span></div><div><br /></div><div><span style="font-size:11pt;">  <span style="font-size:12pt;">일은 사람을 존엄하게 만든다</span></span></div><div><br /></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어떤 일이든 존엄성을 갖는다. 우리 가운데 있는 창조주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살피도록 맡기신 세계가 주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은 ‘만물이 부활하여 새롭게 되는 날’(마 19:28, 롬 8:19-25) 순결해지고 회복되고 비할 데 없이 향상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전조다. 물질과 영혼이 영원토록 통합된 상태로 함께 사는 꿈을 제시하는 종교는 오로지 기독교뿐이다. </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크리스천들은 본질적으로 노동을 가벼이 생각할 수 없으며 물질세계에 깊이 개입해야 마땅하다. ‘세상적인’ 일들도 목회를 비롯한 이른바 ‘거룩한’ 일들과 똑같은 존엄성과 고귀함을 갖는다. </span></div><div><span style="font-size:11pt;">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지음받았으며 지위나 급여와 상관없이 일은 인류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이 원리를 제대로 깨닫고 나면 은사와 열정을 따라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일자리가 줄어들어도 더 많은 기회에 대해 긍정적일 수 있다. 체면과 우월감이 사라지게 된다. 질투나 상대적 박탈감도 사라지게 된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개척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span></div><div><br /></div>]]></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Wed, 21 Mar 2018 15:21:3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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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15.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2</link>
<description><![CDATA[<div>[TGIM 자료/ 정리 : 정한신] </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3">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4">제5부 교회의 역할</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4">15.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font></b></div><div><br /></div><div>  제도적 교회들-보편 교회(universal church)가 아니라 교회에 질서와 구조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종교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들-은 그 자체로는 정사들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처럼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div><div>  지금 평신도와 성직자는 모두, 그들을 종으로 부리고자 하는 종교적 정사들의 포로가 된 것이다. 어떤 조직체든, 그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하고 소유하려 하는 악마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div><div>  그러므로 ‘라오스’(laos)-평신도와 성직자 모두를 포함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헬라어-가 자유롭게 세상을 향해 사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종교 조직체 속의 어떤 권세들이 평신도의 사역을 좌절시키는지 그 정체를 파악하고 다루어야 한다. </div><div><br /></div><div><b><font size="3">신앙과 삶의 분리</font></b></div><div><br /></div><div>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평신도들은 의존성에 빠져 있다. 세상 속에서의 사역이라는 개념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많다 할지라도, 그들 마음 깊은 곳에는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div><div>  어렸을 때 나는, 신앙 생활이란 당연히 교회의 문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라고 여겨 왔다. </div><div>  어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주일 학교 교사, 예배 위원, 교회 식당 봉사자, 안내 위원, 교회 재정 관리 위원, 성가대원 등이 되는 것이었다.</div><div>  평신도 역시 직업, 지역 사회 혹은 가정을 위해 부름받은 사역자라는 생각은 귀로나 눈으로나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다. 사역이란 오직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는 것이었다. </div><div>  ‘부름받았다’는 뜻은 오직 한 가지였다.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div><div>  지금 나와 같은 세대 사람들이 열 살 때 교회에서 이러한 인상을 받으면서 가치관이 형성되었다면, 그들이 주일 오전 11시의 활동과 월요일 오전 11시의 활동을 연관짓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div><div>  종교 조직이라는 정사는,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주일의 신앙과 평일의 삶을 분리시켜 왔다.</div><div> </div><div><b><font size="3">신앙과 삶의 통합</font></b></div><div><br /></div><div>  앞서 말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일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아이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과 신앙을 통합시키기 위해 부모들이 끊임없이 애쓰는 모습을, 아이들로 하여금 직접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직면한 결정 사항과 문제들을 어떻게 신앙과 연관지을지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식사 기도처럼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기도여야 한다.</div><div>  교회 생활을 통해서는 우리 아이들이, 어른들이 직업이나 교회 밖의 다른 활동을 통해서 하는 사역이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봉사자들이 하는 사역과 똑같은 인정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 사역의 모든 면-예배, 교육, 봉사, 교제 등-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모든 구성원을 구비시키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div><div>  우리의 시작점은 예배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따르는 예배 의식에는,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라는 메시지가 이상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모여서, 먼저 우리의 잘못과 실수를 고백한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고, 회복되며, 말씀과 성례를 통해 새로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인도해 주시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이제 섬김을 위해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내진다. 그런데 예배 의식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바로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갈 준비를 갖추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를 좀더 강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div><div>  점점 많은 교회들이 예배 의식 중에 창조적인 방법을 통해, 평신도 사역자 승인식이나 임명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예배 시간 중에 교회 직분자나 주일학교 교사를 ‘임명’한다. 심방이나 전도를 감당할 평신도들을 그렇게 임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직장이나 가정이나 지역 사회 등 세상 속에서 평신도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공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div><div>  어떤 교회는 직장 사역을 인정해 주기 위한 방법으로, 특정한 주일을 정하여 그 날에는 모든 사람이 다 직장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예배에 참석하게끔 한다. 그리고 그 날은 예배 전체가 직업을 통한 제사장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진다.</div><div>  복음 안에는 안전, 지위, 생활 양식이라는 이 시대 권세들과 직업, 제도, 정부라는 이 시대 정사들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결정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강단은 우리 사회의 악마적 세력들을 폭로해야 하며,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은 우리가 하는 일에 좌우되지 않으며 사실 이미 보장되어 있다는 이 놀라운 소식을 선포해야 한다.</div><div>  평신도들의 예배 의식 참여를 장려해야 한다. 목회자와 예배 의식 집례 책임을 분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평신도가 쓴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문에는 기도집 같은 데서 뽑은 멋진 기도문과는 달리, 평신도들의 마음에 직접 와 닿을 수 있는 진실한 감사와 관심의 표현이 담긴다.</div><div>  그러나 우리는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평신도 사역의 전부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평신도의 많은 사역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이유로 나는 평신도가 예전 가운을 입는 관행에 반대한다. 예전 가운을 입으면, 그/그녀는 예배 중에 다른 평신도들과 구분이 된다. 이 때 그 가운이 기능상의 차이 이상을 상징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 관행은 예배 중에 하는 사역이야말로 평신도 사역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사역이라는 생각을 심어 줄 위험이 있다.</div><div>  교회의 교육 사역은 평일의 세계를 위해 평신도를 구비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을 제공한다. 교회 교육을 일 주일에 주일 아침 한 시간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저녁 공부 프로그램, 지원 소그룹, 점심 식사 모임, 아침 식사 모임, 회사 식당 모임 등, 다양한 종류의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주말 수련회는 성인 교육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한다. </div><div>  모임을 통해 얻은 경험에 따르면, 평신도들은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에 대해 가장 절실히 도움을 받고 싶어한다. 따라서 모든 교육 프로그램은 신앙을 표현하는 법, 변화를 일으키는 법, 정치 활동을 조직하는 법, 상담하는 법, 남의 말을 잘 듣는 법, 소그룹을 잘 운영하는 법 등 구체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과목들을 제공해야 한다. 은사 확인은 누구나 반드시 들어야 할 과목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재능 즉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으며, 이 은사를 개발하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데 중요하다. 평일 세계와 신앙을 연결하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은사 확인 과정이 필수적이다.</div><div>  모든 교회는 구성원들에게 지원 소그룹에서 교제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야만 한다. 소그룹은 기도, 책 나눔, 주제 토론, 교제, 프로젝트, 성경 공부 등 다양한 활동을 중심으로 조직될 수 있다. 하지만 소그룹의 우선적인 목적은 구성원들이 삶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사역을 지원하도록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div><div>  우리 교회는 교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인정하는 수단으로 커다란 교회 게시판을 사용한다. 교인들과 관계된 일과 업적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신문에서 그 기사를 오려 내어 게시판에 붙여 놓는다. 교회 인명록에는 모든 교인의 직업도 기록된다. 여기에는 단지 ‘보수를 받는’ 직업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한 자원 봉사 활동이나 학생들의 학년도 기록된다.</div><div>  어떤 교회들은 모든 사람은 다 사역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간단한 표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내가 방문한 어떤 교회에는, 외부와 통하는 문마다 ‘사역자 출입문’이란 표식이 붙어 있었다. 그 교회 회보에는, 모든 교인들 이름 앞에 ‘사역자’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다.</div><div>  교회 소식지를 통해,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어떤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 알려 주는 교회들도 있다. </div><div>  우리 교회에서는 연초마다, 평신도들에게 사순절 묵상집에 실릴 간단한 묵상의 글을 적어내라고 요청한다. </div><div>  지역 교회는 예배, 교육, 봉사, 친교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laos)을 해방시키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div><div>  사람들로 하여금 주일과 월요일 사이에 다리를 놓게끔 돕는 일에서 교단이 해야 할 역할은, 세상을 향해 신뢰성 있는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교단 차원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성명서를 내거나, 세상 문제에 대해 입장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세상 기관들과 맞서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변호하려 할 때 그 현안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큰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천명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 성명서 내용이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파악하고 있다거나 모든 측면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못하다면, 세상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div><div>  과거에는 사회적 성명서, 입장 선언문 등이 대개 소수의 성직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러다 보니 작성자의 무지나 편견이 쉽게 드러나 보이는 성명서들이 발표될 때가 많았다. 교회의 선언서가 불신을 받으면, 신앙이란 일상적인 삶과 무관하다는 평신도들의 생각은 더 굳어질 뿐이다. </div><div>  그러나 교단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이들-평신도들_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 문제는 쉽게 바로잡을 수 있다. </div><div>  그렇다고 교회가 특정 문제에 대해 평신도 대다수의 여론을 그저 따라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그러한 여론이 교회가 견지하는 성경적·신학적 입장과 분명한 마찰을 보일 경우, 교회는 평신도들의 생각을 거스르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만일 성명서에 현안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그에 관련된 분명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면, 평신도는 평일 세상 속에서 그것에 관해 진지하게 고려하게 될 것이다.</div><div>  교단 차원에서 교회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는, 어떤 문제에 관해 편견 섞이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믿음직한 원천이 되어 주는 것이다.</div><div>  다만, 많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 교회가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div><div>  </div><div><b><font size="3">신학교와 지역 교회의 분리</font></b></div><div><br /></div><div>  지역 교회가 평일 사역을 위해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훈련소라고 할 때, 그 코치 격인 목회자들이 그 일을 하기에 충분히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나 내 의견으로는 신학교들 역시 학술 기관이라는 정사에 사로잡혀서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일을 위해 목회자를 충분히 준비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 신학에 대해 얕보는 시각을 갖고 있기까지 하다.</div><div>  우리 신학교들은 그들의 최종 목적을, 안수 받은 사역자들을 학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라고만 본다. 사실은 그 수준을 넘어, 평신도들을 세상 속에서의 사역자로 구비시키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인데도 말이다.</div><div>  평신도에 관계된 신학은 신학자의 주된 임무에 딸린 부수적인 것 정도로 여겨진다. 이는 신학자들이 사실상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무심코 드러내는 셈이다-직업적인 봉사자들만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자체를 유지시켜 가는 하나의 내부 지향적 정사, 바로 그것이다.</div><div>  최근 들어 많은 신학교들이 평신도들을 학생과 강사로서 받아들인다. 그런데 평신도를 위해 개설된 과정들은 대개 교회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게다가 많은 경우, 그러한 과정을 개설하는 실제 이유는 신학교의 어려운 재정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div><div>  어떤 신학교들은 가끔씩 평신도 강사를 초빙해, 학생들과 교수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관점, 필요, 관심사들을 접해보게끔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러한 강의는 빈도수도 적고 일과 시간 이후에 개설되며 대부분의 교수는 거기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결국 평신도 신학이란 교회 기관의 부수적인 사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낳는다. 평신도 신학이 정규 교과과정의 일부로 대우받지 않고는, 학생들은 자신의 사명이 교회를 넘어 세상을 향한 사역을 위해 평신도를 인정하고 구비시키고 지원하는 것임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div><div>  똑똑한 이들을 이용해 결국 종교적 정사를 섬기는 신학을 고착시키는 것, 이는 순전히 악마가 고안해 낸 천재적 전략이다.</div><div><br /></div><div><b><font size="3">신학교와 지역 교회의 통합</font></b></div><div><br /></div><div>  만일 제도적 교회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비시키려는 비전을 갖는다면, 우리의 신학교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할까? 성직자를 훈련시키는 일은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 내가 일상 생활 속에서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학, 성경 지식, 상담, 의사소통 그리고 공동체 형성에 전문성을 갖춘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지역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 말씀과 성례, 성인 교육, 지원 소그룹, 나의 소명에 대한 지속적인 인정 등을 통해 사역을 위한 힘을 지속적으로 부여받아야 한다.</div><div>  그러나 만일 신학교가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그 목적을 위해 지역 교회 목회자들을 훈련시키려 한다면, 신학교의 커리큘럼과 철학에는 상당한 변화가 따라야 할 것이다. 사회의 세속적 기관에서 사역하는 평신도를 키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신학교라면 평신도와 함께 그리고 평신도를 위해 신학을 하고자 할 것이다. 문화 속에서 우리 모두가 직면한 이슈와 딜레마에 관해 평신도와 신학자가 함께 모여 집중적인 공동 연구를 한다면, 이 얼마나 고무적인 일이겠는가?</div><div>  제도적 교회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구비시키는 일을 자신의 사역으로 삼을 때, 신학교는 참으로 커다란 흥분이 약동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div><div>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길은 분명하다. 먼저 평신도들이 종교적 제도주의의 감옥 문을 박차고 나와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사역을 주장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한 이 일은, 오늘의 세계 속에서 평신도를 통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줄 아는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해방될 수 있고 또 해방되어야 한다.</div><div><br /></div><div>(2018년 1월 5일 요약 정리/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정한신)</div>]]></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Fri, 05 Jan 2018 16:27: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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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14. 평신도 사역을 위한 지침</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1</link>
<description><![CDATA[<div>[TGIM 자료/ 정리 : 정한신] </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4">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font></b></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3">제5부 교회의 역할</font></b></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3">14. 평신도 사역을 위한 지침</font></b></div><div><br /></div><div>  평신도 사역을 주제로 한 주말 연구 모임에서 나누는 세 가지 질문이 있다.</div><div>  (1) 당신은 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2) 그 일을 하면서 직면하는 어려운 결정 사항과 문제는 무엇입니까? (3) 그러한 문제와 결정 사항과 당신의 신앙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div><div>  어려운 것은 세 번째 질문이다. ‘그러한 문제와 결정 사항과 당신의 신앙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은 삶 속의 구체적인 상황과 자신의 신앙이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 평상시 많은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우리의 신앙 공동체-교회-에서조차 제기되지 않는 질문이다. </div><div>  신학자들은 이 모임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상황화 신학 작업’(contextual theologizing)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구체적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고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탐구하게끔 한다.</div><div>  주일에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신학과, 주중에 삶으로 드러내는 신학 사이의 가장 큰 괴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행위 의’(works righteousness)에 놓여 있다. 주일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온전하게 받아들여졌노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월요일부터의 삶은, 사람의 정체성과 가치는 오로지 그가 무슨 일을 하며 그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실제 믿음을 드러내 준다. </div><div>  주일에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온다고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주중의 삶 가운데서는 구원은 오로지 내가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div><div>  리처드 마우가 「거룩한 세속성으로의 부르심」(Called to Holy Worldiness)에서 한 지적에 따르면, 우리는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평신도 주체 신학’(theology by the laity)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학은 우리의 문화, 우리 삶의 여러 사건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하는 구체적인 상황들로 인해 형성되고 조건지어진다.</div><div>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는 방식과 우리가 삶의 구체적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방식 사이의 간격을 해소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나는 상황화 신학이야말로 평신도로 하여금 주일과 월요일을 연관짓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또 우리 입술의 신학과 실제 삶의 신학이 더 잘 일치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월요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div><div><br /></div><div><b>모임과 수련회</b></div><div><br /></div><div>  주말 모임 혹은 수련회는 신앙과 삶을 연관 짓는 일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다. 한적한 곳에서 40시간 내지 48시간 정도 진행되는 이 모임 동안, 평신도들은 자신의 삶의 상황과 그것이 신앙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볼 기회를 얻는다. </div><div>  보통 이러한 모임은 금요일 밤에 시작해서 주일 점심 때나 저녁 때쯤 끝난다. 장소로는 수련원이나 심지어 모텔 등, 가정 일로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외딴 곳이 가장 좋다. ‘왔다갔다하는’ 수련회도 가능하다. </div><div>  이러한 모임의 지도자로는 평신도가 더 바람직하다. 이유는 분명하다. 평신도가 평신도의 필요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신학 강의를 듣는 것도 필수적이다. 많은 평신도들이 성경 지식이 빈약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학자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div><div>  모임의 규모는, 평신도 지도자 두 명-가능하면 남녀 한 사람씩-과 신학자 한 명을 포함하여 최대 서른다섯 명 정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 모임의 목적상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역을 아주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따라서 개개인에 대한 충분한 관심이 필요한데, 큰 규모의 모임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div><div>  일정은 주제 발제, 소그룹 연구, 개인적 묵상, 레크리에이션, 예배 등 균형이 잘 잡혀 있어야 한다. 시설은 간소하지만 편리해야 한다. 식사는 검소하지만 정성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div><div>  주말 수련회의 효과를 지속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모임에서 ‘고조된 흥분’을 경험한 것으로 그만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무런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모임이 마칠 때쯤, 아마도 폐회 예배를 드리기 한 시간 전쯤에 참석자들이 모여 이제 돌아가면 어떤 일부터 실천할 것인지 결단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다 같은 교회나 단체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그룹으로 모일 것을 결정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 역시, 집에 돌아가면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뚜렷이 결단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돌아가면 당장 어떤 신앙적 실천을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 없이 집에 돌아가서는 안 된다.</div><div> </div><div><b>지원 소그룹</b></div><div><br /></div><div>  신앙과 삶을 통합하는 과정에 들어선 평신도들은 지원 소그룹(support group)에 참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보통 지원 소그룹은 여섯 명에서 스무 명까지 다양한 수로 구성된다. </div><div>  지원 소그룹의 주된 목적은 소속된 각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신앙 성장을 돕는 데 있다. 이 목적이 달성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함께 삶을 나누는 공동체 속에 있을 때 각 개인은 자신의 ‘상황화 신학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즉 한 주간의 경험과 문제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신앙과 일상적인 삶을 연관짓는 일에 도움을 받는다. 지원 소그룹 회원들이 나의 문제에 시간을 투자하며 관심을 보일 때, 나는 무언가 책임감 있게 결정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해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div><div>  둘째, 지원 소그룹은 그룹 스터디와 아이디어와 주제 토론 등을 위한 환경을 제공한다. </div><div>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지원 소그룹은 각자가 삶 속에서 경험한 기쁨과 상처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제공한다. </div><div>  지원 소그룹은 구체적인 목적, 즉 성경 공부, 기도, 토론, 책 나눔, 혹은 난민 후원 같은 특별 프로젝트 등을 위해 조직될 수 있다. 지원 소그룹은 한 지역 교회나 한 단체 사람들로만 구성될 수 있다. 또 성인들로만 구성될 수도 있고 가족 전체가 참여할 수도 있다. </div><div>  직업이나 직장별로 지원 소그룹을 형성할 수도 있다. 격주로 화요일 아침마다 모여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일에 대해 토론하는 의사들도 있다. 또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 점심 시간에 모여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나누고, 그 일과 신앙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에 대해 토의할 수 있다.</div><div>  같은 교회, 이웃, 직장, 회사 등 무엇에 따라 만들어졌든지 간에 지원 소그룹은 사람들의 현 위치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강한 확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탐구해야 한다. 한 가지 책을 가지고 함께 공부한다거나, 어떤 사회적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것은 평신도 주체 신학 작업을 위한 좋은 자극제가 된다.</div><div>  자신의 신앙과 삶의 관련성을 멋진 말로 진술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당황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div><div>  지원 소그룹의 신학 작업을 촉진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일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각 구성원은 일기에 그 날의 활동과 또 그 사건과 신앙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기록한다. 그리고 지원 소그룹이 모일 때, 일기 중 중요하거나 어려운 사항을 택하여 함께 나눈다. 그러면 나머지 구성원들은 거기에 대해 함께 숙고하며 그로 하여금 그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끔 도우려고 노력한다.</div><div><br /></div><div><b>단기 프로그램</b></div><div><br /></div><div>  지원 소그룹이 정말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사이에 지속적이고 활짝 열린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수록 우리는 함께 더 많은 경험을 나눌 수 있으며, 자신의 깊은 관심사를 더 기꺼이 드러낼수록 우리의 지원 소그룹은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몇 주만에 형성되지는 않는다. 여러 달과 해가 걸린다. </div><div>  지원 소그룹같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관계에 자신을 의탁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너무 깊이 나누는 데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단기 프로그램을 통해서 지원 소그룹에 소속되지 않고서도 상황화 신학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div><div>  우리 교회는 평신도 주체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가장 성공적인 시도 중 하나는, 우리가 ‘… 분야 사역’이라고 이름 붙인 프로그램이다. 1년에 여러 차례 우리는 특정 분야를 선택하여, 4주에 걸친 성인 학습 포럼과 마지막 주일 예배를 통해 그 분야에 교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사람들은 포럼을 통해 그 분야의 평신도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게 되며, 많은 경우 주일 예배 시간에 처음으로 자신의 특정 분야 사역이 교회의 인정을 받는 것을 경험한다. (예: 의료 분야 사역)</div><div>  4주 연속으로 주일 성인 성경 공부 시간에 열린 포럼에서 네 사람이 나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에게는 ‘세 가지 질문’이 주어졌다. 그 직업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문제와 결정 사항에 직면하는지, 하고 있는 일과 그들의 신앙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div><div>  ‘… 분야 사역’ 프로그램은 우리 교회에서 가장 참여율이 높은 성인 교육 과정이다. 이것은 신앙과 직업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의 실제적 문제를 다루어 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사역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더 긴밀한 지원 관계가 생겨났다. 때가 되면, 우리 교회 모든 사람이 다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사역에 대해 공적인 승인을 받게 될 것이다.</div><div>  우리 교회는 또 사순절 점심 식사 모임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사순절 기간 동안 6주 연속으로 수요일마다 시내의 한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식사를 빠른 속도로 간단히 마친 뒤, 다음 15분 동안 한 사람이 세 가지 질문 형식에 따라 – 나는 무슨 일을 하며, 내가 직면하는 문제와 결정 사항은 무엇이며, 또 그것과 내 신앙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 –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다음 30여 분 동안 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 목사님은 보통 듣고 신학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으로 참석한다. </div><div>  이러한 두 가지 ‘단기 프로그램’은 사람들로 하여금 직장이라는 구체적 상황과 연관된 신학을 하게끔 한다. 또 이런 모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사람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지속적인 지원 관계가 형성된다.</div><div>  세상 속에서 행하는 평일 사역(Monday ministries)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구비시키기 위한 출발점은, 다름 아니라 사람들이 현재 갖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어 주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기독교적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은 그 다음에 할 일이다.</div><div><br /></div><div>(2017년 12월 6일 요약 정리/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정한신)</div>]]></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Wed, 06 Dec 2017 14:08: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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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팀 켈러의 일과 영성 - 1.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10</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5">팀 켈러의 일과 영성</font></b> </div><div style="text-align:center;">(두란노, 2013)</div><div style="text-align:center;"><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font size="4"><b>Part 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b></font></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right;">정리 : TGIM 울산점 최명락</div><div> </div><div><font size="3"><b>Chapter1 –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b></font></div><div>/ 행복하고 싶다면, 주님처럼 일하고 주님처럼 쉬라</div><div><br /></div><div>  성경은 입을 떼자마자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노동이 얼마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창세기 저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일로 묘사한다. 이어서 최초의 인류가 낙원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질서정연한 주님의 창조사역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뿌리를 두는 이러한 노동관은 세상의 온갖 종교나 신앙 체계들과 명확히 구별된다.</div><div>  태초에 하나님은 일하셨다. 뒤늦게 추가된 필요악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가 아닌 창조주가 그리신 밑그림이었다. 주님은 순전한 기쁨을 얻도록 일을 지으셨다. 이쯤 되면 일보다 더 행복하고 축하해야 할 게 또 있을까 싶다.</div><div><br /></div><div>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맡기셨다</div><div><br /></div><div>  하나님은 일하실뿐만 아니라 거기서 큰 기쁨을 누리셨다. 또한 피조물들을 돌보시는 일을 계속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신학자들이 ‘공급’이라고 부르는 사역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공급자’가 되어 돌보신다. 마지막으로 일꾼들에게 그 일을 맡기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지만 우리 또한 그분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먹이신다는 말씀은 농부와 다른 일꾼들의 수고를 통해 인류에게 먹을거리를 베풀어 주신다는 뜻이다.</div><div><br /></div><div>  인간은 일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div><div><br /></div><div>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늘 일하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과 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보다 더 선명하게 다른 종교나 문화와 구별되는 차이점이 있을까? 일은 무위도식하는 황금시대가 지난 뒤에 역사에 끼어든 재앙이 아니다. 일을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 역사에 끼어든 상함과 저주의 결과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div><div>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 하면 내면적으로 심각한 상실감과 공허감에 시달린다. 사실 일이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대단히 근본적인 요소여서 해를 입지 않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에 속한다. 성경에 따르면 생존을 위해서는 일해서 버는 돈만 필요한 게 아니다. 하루하루 연명할 뿐만 아니라 온전한 인생을 살자면 일 자체가 필수적이다.</div><div>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하게 짚어 두고 싶다. 아울러 일을 통해 저마다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파악하게 되고 그게 정체성 확립에 핵심 요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이렇게 썼다. “일을 보는 기독교적 관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div><div><br /></div><div>  일은 자유로 이끄는 초대다</div><div><br /></div><div>  자유는 구속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올바른, 다시 말해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부합되는 한계 속에서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명령은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들이다. 창조주께서는 바로 그 계명을 통해 인간을 지으실 때 의도하셨던 존재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명령을 어기면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영광을 돌리지 못 할 뿐 아니라 창조주께서 설계해두신 본성을 거스르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지으셨으며 지금도 분명히 그 설계에 따라 살라고 부르고 이끄신다. 짐스러운 명령이 아니라 자유로 이끄시는 초대다.</div><div><br /></div><div>  일만이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선 안 된다</div><div><br /></div><div>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스스로 일하신 뒤에 쉬셨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에는 일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삶의 으뜸가는 토대는 주님과의 관계다. 주님과의 관계는 삶의 으뜸가는 토대이자 다른 모든 요소들(일, 우정, 가족, 여가, 행복 등)을 값지게 여기고 중독과 왜곡에 이르지 않도록 막아 주는 예방약이다. 장 칼뱅은 크리스천의 삶을 정리한 책에서 무엇이든 ‘쓸모’로만 평가하는 행위에 대해서 주의를 주었다.</div><div>  “하나님이 오로지 필요(영양)를 채우시려고 음식을 지으셨겠는가? 즐겁고 유쾌한 기분을 위해서는 아니겠는가? 옷을 주신 목적 또한 필요(보호)에 그치지 않고 단정함과 품위를 지키게 하시려는 게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꼭 필요한 쓰임새와 별개로 매력적인 구석들을 넣어 만물들을 만드신 것이다.”</div><div>  일을 정기적으로 멈춘 뒤 예배하고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즐기는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체득할 수 없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일은 의미 있는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 요소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삶에 목적을 주는 주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좇는 고유한 역할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기운을 되찾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상과 일상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일손을 놓고 쉬어야 한다.</div><div>  ‘일하기 싫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 만물 가운데 특히 노동이 죄의 대가로 임한 저주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일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받았고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삶이 통째로 빨려들어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 한계를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과 쉼의 균형을 잡는 신학적인 기초를 견고하게 다지는 작업이야말로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발점이다.</div>]]></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Wed, 22 Mar 2017 14:23:1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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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팀 켈러의 일과 영성 - 프롤로그</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09</link>
<description><![CDATA[<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5">팀 켈러의 일과 영성</font><font size="4"> </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4">(두란노, 2013)</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4"><br /></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4">프롤로그 </font></b></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right;">정리 : TGIM 울산점 최명락</div><div> </div><div><b><font size="3">프롤로그 – 일은 단순히 밥벌이가 아니라 소명이다.</font></b></div><div> </div><div>  로버트 벨라는 마음의 습관이란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div><div>  “개인의 신성함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쪽으로 현대사회가 급속하게 기울어 가면서 그 개인들을 한데 묶는 사회구조를 그려내는 상상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개인을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기는 관념과 전체를 보는 감각이나 공동선에 대한 관심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div><div>  하지만 저자는 마음의 습관 말미에서 해체된 문화를 다시 결속시키는 긴 과정을 치러 낼 방법을 제시한다. </div><div>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소명이라든지 부르심 같은 개념을 다시 가져와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야 한다. 노동은 그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div><div>  벨라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일이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소명이라는 관념을 회복하는 것이 해체된 사회를 살리는 소망의 끈이 될 수 있다. ‘개인적인 이해를 초월해서 어떤 존재를 섬기는 사명’으로 일의 본질을 재설정하지 않으면 부르심이란 의식이 자리 잡을 수 없다.</div><div>  따라서 이 책에서는 벨라가 던진 도전을 실마리로 삼아 기독교 신앙과 일터 사이를 혁신적이고 혁명적으로 연결하는 길을 모색하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작정이다. 뿐만 아니라 그 길을 둘러싼 실천 방안들까지 살펴 볼 것이다. 여기서 ‘연결’이라는 표현은 ‘신앙과 일의 통합’을 가리킨다. </div><div>  이런 시도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며 신앙과 일을 통합하도록 도우려는 세력과 집단들은 대부분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복음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쪽이지만 다른 전통과 기독교 종파들도 이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처럼 소명을 다시 붙잡는 문제에 대해 신앙 전통에 따라 다양한 답이 제시되어 있다. 이런 흐름들이 크리스천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들이 아귀가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div><div>  그런 차이들이 이 책에서 모두 해소되길 기대할 수는 없지만 두 가지 인식을 가지고 시작하면 좀 더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제각기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법으로 여긴다면 서로 보완적이 되도록 할 것이며 둘째로 이러한 요소들의 중요도는 직업과 문화, 역사적 상황 같은 변수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다양한 흐름과 견해, 사실들을 저마다의 분야와 시공간에서 신앙과 일을 통합하는 모델을 세워가는 공구세트쯤으로 파악하고 사고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div><div>  성경에는 일을 배우거나 일을 찾거나 일하려 애쓰거나 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지혜와 자료, 소망이 가득하다. 톨킨의 니글의 이파리라는 단편을 보면 하나님이 각자에게 달란트와 은사를 주셔서 인류를 염두에 두고 의도하셨던 일들을 사람들이 서로 도와 해내게 하셨다고 표현한다. 톨킨은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답하기 위해 애쓰는 선한 수고는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하나가 영원무궁한 가치를 갖는다.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 주는 약속이다.</div><div>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진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이 고쳐주실 미래의 새 세상이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걸 부분적으로나마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작업이다. 기껏해야 눈곱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 나라를 실현해가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마음에 새긴다면 평생 나뭇잎 한 두 장 그리는데 그친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만족스럽고 기쁘게 일할 것이다.</div><div>  톨킨이 기독교 신앙에서 위로와 자유를 찾고 다시 작품을 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일을 하자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서 성경이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알아야 한다.</div><div> </div><div> ◉ 왜 일하고 싶어하는가?(만족스러운 삶을 사는데 일이 꼭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div><div> ◉ 왜 그토록 일하기 어려운가?(어째서 열매가 없고 무의미하고 까다롭기 일쑤인가?)</div><div> ◉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발판으로 난관을 이겨내고 노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div><div><br /></div><div>  지금부터 이 질문들을 중심으로 세 영역에 걸쳐 각각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div>]]></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Mon, 13 Mar 2017 14:05:4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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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13. 섬김</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08</link>
<description><![CDATA[<div>[TGIM 자료/ 정리 : 정한신] </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4">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3"><br /></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3">제4부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3"><br /></font></b></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3">13. 섬김</font></b></div><div><br /></div><div>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섬김을 실천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 </div><div>  (또한)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div><div>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 </div><div>  예수님에게 섬김이란 실제로 자신의 지위를 섬김받는 자 아래로 낮추는 행위였다고 보는 관점에는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예수님은 힘과 권력이 있는 이들의 활동을 묘사하는 데는 섬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서 당시의 정치, 사회, 종교 조직체들에서 비롯된 힘은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으셨다.</div><div>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섬김 역시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와는 아무런 관련을 맺지 말아야 하는가? 현대의 급진적 그리스도인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사회적인 의식이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섬김을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힘없는 자들과 동일시해야지 결코 권력 기관들과 협조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div><div>  그러한 급진적 그리스도인들이 옳은가? 나는 급진적 제자도에 헌신된 공동체들을 마땅히 존경은 하지만, 예수님의 핵심적 사명에 대한 그들의 시야가 너무 좁다고 생각한다.</div><div>   </div><div><b><font size="3">예수님의 사명</font></b></div><div><br /></div><div>  예수님의 사명은 우리에게 복음을 가져오시는 것,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오직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용납을 확신할 수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다. 사실 예수님의 생활 양식은 그것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관습, 행동 규칙, 종교적 규범, 혹은 정사와 권세에 묶여 있지 않음을 보여 주시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토록 놀라운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모든 정사와 권세를 거부하셨던 것이다.</div><div>  우리는 그분이 사셨던 방식과 우리에게 주신 가치 체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을 본받으라고(be like Jesus) 부르시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으라고(believe in Jesus) 부르시는가?</div><div><br /></div><div><b><font size="3">구급차 운전인가? 구조 변혁인가?</font></b></div><div><br /></div><div>  곤궁에 처한 사람을 일 대 일로 도와주는 섬김은 알아보기 쉽다. 하지만 ‘법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섬김은 상대적으로 덜 눈에 띈다.</div><div>  우리는 ‘기독교적 섬김’이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사회 구조를 통해서 가난한 자를 돕고 부정을 없애는 일을 하는 데 대한 적절한 용어는 ‘세상 도구를 통한 기독교적 섬김’(worldly Christian servanthood)이다. 그것은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섬김은 아니다. 분명 예수님은 섬김이란 용어를, 자신이 섬기려는 사람들의 지위 아래로 자신을 낮추는 일이라는 뜻으로만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섬김의 양식을 그대로 본받는 것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오늘날의 급진적 복음주의자들처럼 모든 재산과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자신의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자유 안에서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라고 느끼는 이는, 세상적인 도구와 영향력을 이용해서 기독교적 섬김을 실천할 수 있다.</div><div>  물론 세상적인 도구와 영향력이 우리를 섬기기보다 도리어 우리를 지배할 위험성도 존재한다. 부와 권력에는 중독성이 있다. </div><div>  어떻게 우리는 자신의 정직함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이 지금 섬김을 실천하기에 필요한 정도만 부와 권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부와 권력의 세상 ‘안에 있지만 속해 있지는 않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세상 도구를 이용한 기독교적 섬김을 실천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만난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질문들 앞에 서야 할 필요성이 있다.</div><div>  그리스도인 지원 소그룹은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일에 대단한 도움이 된다. 세상 도구를 이용한 기독교적 섬김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가까운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함께 나눌 때, 우리는 거기서 어려운 결정에 대한 조언과 우리의 행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정사와 권세의 지배를 거부할 때,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세상 안에서 제사장으로서 살아가는 절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div><div>  그렇게 제사장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 중에 존 울만(John Woolman)이 있다. 존 울만은 미국의 퀘이커 교도였는데, 노예 제도를 바꾸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울만의 설득에 힘입어 1776년이 되자, 노예를 가진 퀘이커 교도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거의 100년 전의 일이었다.</div><div>  섬김을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억압하고 비인간화시키는 정사와 권세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div><div>  세상 도구를 이용한 섬김을 통해, 가난, 불의, 편견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리스도인은, 먼저 제도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럴 때만이 비로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상처 입히는 관행에 도전할 수 있으며, 세상적인 도구를 이용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div><div>  20세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생활 양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삶을 통해 정사와 권세에 도전하는 섬김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 도구를 이용해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정사와 권세에 도전하는 섬김이다. 상처투성이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는 길은, 세상 도구를 이용해 섬김을 실천하는 그분의 제사장들의 치유 활동이다.</div><div><br /></div><div>(2017년 2월 2일 요약 정리/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정한신)</div>]]></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Thu, 02 Feb 2017 15:26: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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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12. 시민의식</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07</link>
<description><![CDATA[<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TGIM 자료/ 정리 : 정한신]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center;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font size="5">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font></b></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center;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font size="4">12. 시민의식</font></b></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span style="font-size:10px;">  </span><font size="3">교회와 국가라는 두 정사는 우리의 충성을 가운데 두고 끊임없이 열띤 경쟁을 벌여 왔다. 국가는 교회가 전적인 충성과 지원을 해주어 국가 정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기를 참으로 바란다. 또 교회는 국가의 도덕성과 가치관 문제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나라의 문화를 ‘기독교적 원칙’에 입각하여 형성하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이것이 가진 악마적인 측면은, 교회와 국가라는 두 정사가 서로 결탁하면 대립 관계에 있을 때보다 서로에게 더 많은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미국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제도적 분리’와 ‘기능적 상호 작용’이라는 말로 묘사되어 왔다. 제도적으로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 있다. 국가의 일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입법 과정을 통해 시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일은 예배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또 이웃과 서로 조화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그러나 기능적인 면에서 교회와 국가는 상호 작용을 한다. 국가는 종교 다원화 사회에서 중립을 지키고, 교회 관련 기관들이나 사회 기여도가 인정되는 프로그램들에게 (세금 면제나 보조금을 통해)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종교 자유를 보존해 준다. 교회는 중보 기도를 통해,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분위기 형성을 통해, 책임성 있는 시민 의식과 참여 의식을 격려함을 통해 국가 조직을 지지해 준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와 국가 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일이 너무 흔했다는 사실이다. 두 제도가 소위 ‘시민 종교’라는 모호한 중간 지대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font size="4">시민 종교</font></b></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span style="font-size:10px;">  </span><font size="3">시민 종교(civil religion)란 교회와 국가의 이익이 서로 겹치는 영역으로서 서로 협조 관계를 맺고 있는 중간 지대이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미합중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나라라는 생각이 미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면면히 흐르고 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하지만 국가에 대한 헌신을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될 정도까지 하나님과 국가를 가깝게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교회나 국가나 모두 큰 소리로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의 의무와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무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국가의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국가를 지지하며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국가의 일에 참여는 하되 국가의 소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이렇게 자유로운 존재가 될 때만 국가 조직과 구조들 속에서 제사장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font size="4">성경적 관점</font></b></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span style="font-size:10px;">  </span><font size="3">아마도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관련해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신약 본문은 로마서 13장일 것이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font size="3"><br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font size="3"><br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대부분의 성경학자는 여기서의 바울의 충고를 모든 부분에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에 동의한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바울이 목자로서 충고한 내용 중에는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 차원의 것이 많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할 때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방해보다는 도움이 더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기독교 운동을,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고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열심당의 정치 운동과 뚜렷이 차별화시킬 필요도 있었다. 이렇게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적 권세에 완전히 순종할 것을 충고한 데는 그럴만한 실제적 이유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목회적 충고였지 신학이 아니다. 반면 바울의 신학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임을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5:1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로마서 13:1-6은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울의 목회적 충고로 보아야 하므로 우리는 그 본문을 모든 시기, 모든 장소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신학적 진술로 여겨서는 안 된다. 특히 그 본문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독재나 불의도 그저 견뎌야 하며 양심을 거스르는 전쟁이라도 참여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이러한 하나님과 국가에 대한 충성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적들이 그분에게 교묘한 덫을 놓았던 일이 있다(마 22:15-22; 막 12:13-17; 눅 20:20-26).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세금 문제를 덫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그분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내야 한다고 말씀하심을 통해서, 단순히 세금 문제를 넘어서 모든 정치적 책임을 다 포함시키셨다. 이것은 가이사의 법을 따르는 것, 가이사의 인구조사에 응하는 것, 가이사의 사법 제도를 이용해 민사 분쟁을 해결하는 것 등을 다 포함한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이 있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가이사라도 유대 민족의 전적인 충성을 받을 권한은 없다. 다시 말해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충성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국가에 대한 순종에 우선하는 때가 언제인지를 결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font size="3">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font size="4">전쟁</font></b></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span style="font-size:10px;">  </span><font size="3">교회와 국가의 요구가 상호 충돌하는 가장 두드러진 예 중 하나는 국가가 우리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할 때이다.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라인홀트 니버는 비폭력주의자였다. 그러나 1932년에 그는 한도를 철저히 지킨다는 조건하에 폭력적 저항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니버는 비폭력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해서 그들은 폭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 죄를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며 비판했다. 니버의 신학적 견해에 따르면, 죄는 보편적이기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버는 대부분의 비폭력주의자들은 전쟁에서 인간들이 겪는 고통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독재정권하에서 인간들이 겪는 고통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마틴 루터 역시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나가야 할 때가 있으며, 또 나가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악한 이들을 저지하고 경건한 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기에,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이나 그분의 대리자들이 요청할 시에는 다른 이들처럼 나가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본회퍼는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독일 개신교 세력의 중심이었던 고백 교회의 대표적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저항 운동에 관여하다가 마침내 아돌프 히틀러 암살 공모에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과 전쟁이라는 문제에 대해 본회퍼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알 수 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font size="3"><br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 원수를 죽이지 않는 것 못지않게 나의 이웃을 보호하는 것 역시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랑의 계명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의무라고 말하며 그것을 위해 나의 구체적인 이웃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완전히 뒤틀린 윤리 의식이다. 원수와 이웃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형제를 죽게하거나 원수를 죽게 해야 하는 구체적인 선택의 상황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 나는 극악 무도한 일인 줄 알면서도 무기를 들 것이다. 다른 선택은 할 수가 없다. 나는 내 형제, 내 어머니, 내 [이웃]을 보호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font size="3"><br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균정성’(均整性, proportionality)이라는 기준이 있다. ‘균정성’이란 소위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을 가려 주는 시금석 중 하나로서 어떤 전쟁이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전쟁에 꼭 필요한 만큼의 병력만 동원되어야 하며 또 승리를 위해 지불되는 대가가 그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보다 크지 않아야 한다는 법칙이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전쟁에 대해 성경학자들이 갖고 있는 관점들이 서로 너무도 다르기에, 그리스도인은 무척이나 어려운 처지에 있다. 무저항주의(nonresistance), 비폭력주의(pacifism), 정의로운 전쟁주의(just war), 예방 전쟁주의(preventive war) 등.</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우리는 나름대로의 성경 이해에 입각하여 주어진 전쟁 상황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난 뒤 각자 입장을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전쟁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국가의 뜻을 따라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국가의 악마적 지배를 받을 수 없는 자유인들이기에, 우리에게는 국가의 전쟁 결정을 지지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b><font size="4">핵으로 인한 대참사?</font></b></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span style="font-size:10px;">  </span><font size="3">핵무기 증강 경쟁으로 인해, 인류는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 절멸이라는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핵무기 증강 경쟁에는 핵 전쟁 억제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에게 상대 편을 전멸시킬 수 있는 충분한 핵무기가 있다면, 절대 상대 편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들을 해하는 데 사용되지 않은 무기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핵 전쟁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우리 문명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핵무기 감축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나는 군비 축소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시민으로서 관여해야 할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믿는다. </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알란 게이어는 군비 축소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시민으로서 수행해야 할 긴급한 도덕적 임무 세 가지를 제시한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1) 실질적인 군축을 점증적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꾸준히 갖는 일 (2) 왜곡된 선전을 거스르고 극복하기 위해 충분한 지식을 쌓는 일 (3) 안전에 대한 국가와 정부의 정당한 관심을 이해하는 일, 즉 군축이야말로 진정한 안전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확실한 길임을 이해하는 일.</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폭격기를 쳐부수어 보습을 만들고 미사일을 녹여 낫을 만들기 위한 이 싸움-하나님이 만드신 무한히 소중한 창조물들의 생존과 건강을 위해 창조 세계의 밭을 갈고 열매를 기르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적 신앙의 핵심이다.” (알란 게이어)</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핵 전쟁은 너무도 심각한 문제이다. 극단적 비폭력주의나 극단적 군비 확장주의로는 그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의 중간 지대를 찾아 우리가 함께 협력할 때에만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font size="3">  핵무기 증강 경쟁 역시 ‘권세’의 일종이다. 즉,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곧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번성하다가 우리가 막지 못하면 결국 끔찍한 재난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국수주의의 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논쟁에 대한 두려움,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들려는 모든 세력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다면 우리는 핵 전쟁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font></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br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
























































</p><p style="margin:0px;text-align:justify;font-size:10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min-height:12px;"> </p>]]></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Thu, 01 Sep 2016 15:34:1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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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11. 생활 양식</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06</link>
<description><![CDATA[<div>[TGIM 자료/ 정리 : 정한신] </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4">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font></b></div><div><br /></div><div style="text-align:center;"><b><font size="3">11. 생활 양식</font></b></div><div><br /></div><div>  그리스도인의 생활 양식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div><div><br /></div><div><b><font size="3">아미쉬 사람들</font></b></div><div><br /></div><div>  아미쉬의 기원은 16세기 유럽에서 있었던 재침례교도 박해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메노나이트의 한 분파인 이들은 현대 문명의 생활 양식을 거부한다.</div><div>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생활 양식을 가져야 하는가? </div><div>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생활 양식을 생각해 볼 때 먼저,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또 그것들은 결코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div><div><br /></div><div><b><font size="3">자원 고갈</font></b></div><div><br /></div><div>  우리는 한정된 자원을 가진 한정된 행성에 살고 있다. </div><div>  지구 위의 물과 토지는 제한되어 있다. 인류가 끌어다 쓸 수 있는 광물과 에너지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원들을 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div><div>  </div><div><b><font size="3">자원 배분의 불균형</font></b></div><div><br /></div><div>  세계의 부가 너무도 불균형적으로 배분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div><div>  지구의 부를 좀더 평등하게 분배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다 보면, 여러 종류의 이념(사회주의, 거대 기업에 의한 불균등 문제, 거대 기관들의 탈중심화론, 자유 기업 체제 등)이 생겨나게 된다. </div><div>  ‘체제’를 통해서 부의 분배 문제를 풀려다 보면, 필연적으로 몇몇 진보적 지도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를 낳게 되어 있다.</div><div>  한편, 더 나은 자원 분배에 대한 또 다른 가능한 접근은 부유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검소한 생활 양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인 검소한 생활 양식을 통해 세계의 부의 분배가 얼마나 눈에 띄게 나아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div><div>  풍족한 사회에서 소유와 권력에 중독되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기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생활 양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div><div><br /></div><div><b><font size="3">성경과 생활 양식</font></b></div><div><br /></div><div>  그리스도인들이 나름대로 성경을 근거로 해서 채택하는 생활 양식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부와 권력을 본질적으로 불의라고 보는 관점을 그 특징으로 한다. 두 번째는 부와 권력은 의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철학이다. 이러한 두 가지 양극단 사이에 위치하는 관점은, 그리스도인은 부와 권력의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 문화에 속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족함’(enough)의 생활 양식이라 부를 수 있다.</div><div><br /></div><div><b><font size="4">부와 권력의 불의함</font></b></div><div><br /></div><div>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들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소유하는 것이 바로 악이라고 말한다.</div><div>  이러한 관점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함께 사는 이들이 많다. 보통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의료, 사회 사업, 교직, 공동체 개발 같은 봉사 일을 하며 보수는 아주 적게 받는다. 또 그들은, 보수를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들이 보수 없이 사회 봉사 활동을 하는 구성원들을 부양하는 체제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도 한다.</div><div><br /></div><div><b><font size="4">부와 권력의 의로움</font></b></div><div><br /></div><div>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돈이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돈과 관련된 악은, ‘돈에 대한 사랑’(딤전 6장)이나 돈을 부정직하게 벌거나 사용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돈과 거기서 생기는 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div><div>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이 부자를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을 압제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무관심할 때에 국한된다고 지적한다. </div><div>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은 재산을 소유하는 것과 재산을 사랑하는 것을 구분하셨다고 지적한다. 그분이 부자 청년더러 소유를 전부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 청년이 재산에 집착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div><div>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예수님이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으셨다는 증거라고 이들은 지적한다. </div><div>  그들은 부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층 더 지지하기 위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div><div>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양식의 또 다른 문제는 부를 하나님이 주는 보상이라고 보는 신학적 개념과 관련이 있다. 가난한 자들 중에서 동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들은 매우 적다. 하나님이 죄로 인해 벌을 주고 계신 사람을 동정하는 것이나 도와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재정적인 축복이라는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 ‘단지 믿기만 하라. 그러면 당신도 잘 살 수 있다.’</div><div>  로날드 사이더는 무척 유익한 통찰을 제공한다.</div><div>  “하나님은 편파적이시지 않다. 그분은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바로 그렇기에, 그분은 힘있고 돈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도 돌보시는 것이다. 당신과 나를 포함해, 모든 시대와 사회의 풍족하고 힘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을 대하는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가히 압도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들어 주신다. … 하나님은 지나친 부와 지나친 가난을 둘 다 반대하시기에, 가난한 자들 편에 서신다. 성경의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 편에 서 있는 것은 그분은 편파적인 분이 아니시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분은 공평한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div><div><br /></div><div><b><font size="4">족함의 신학</font></b></div><div><br /></div><div>  구약 지혜서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div><div>  구약 성경에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 준 돈에 대해 이자를 받지 말라는 구절들이 많다(참고. 출 22:25). 왜? 다른 사람에게 빌려 줄 만한 돈이 있다면, 내게는 이미 족한 돈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이미 돈이 족히 있는데, 돈이 부족한 내 형제·자매로부터 이자를 받아야 하겠는가?</div><div>  레위기 25장은 족함의 철학과 관련된 많은 명령이 있다. 일하는 데는 육 일로 족하고 일곱 번째 날은 안식일로 지켜야 하듯히 매 일곱 번째 되는 해에는 땅도 쉬어야 한다.</div><div>  족함의 신학을 따른다면 오늘 우리의 생활 양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이 개념은, 그리스도인을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요 제사장이요 자유인으로 그리는 성경적 이미지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우리는 부와 권력을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여길 수 있는가? 우리는 제사장적 소명을 수행하기에 모자라지 않을 정도만의 부와 권력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가?</div><div>  하나님이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이실진대,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적 역할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의에 관심이 있는 분이실진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들 속에서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병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실진대, 그리스도인들은 보건 영역에서 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죄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형법 제도 안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표현된다. 하나님은 우리 문화의 경제, 정치, 사회 단체에서 활동하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을 통해,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신다.</div><div>  족함의 신학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지위를 통해 봉사하든 우리의 생활 양식은 검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부와 권력만을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한다. 부와 권력은 우리의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만큼만 사용해야지 결코 부를 위한 부, 권력을 위한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div><div>  혼자 힘만으로 이러한 족함의 생활 양식을 실천하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해 있다. 바로 그렇기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부와 권력 사용을 평가할 수 있다.</div><div>  족함의 신학에 기초한 생활 양식을 채택하다 보면, 자원 보존의 필요성과도 만나게 되고 좀더 균등한 자원 배분을 위해서도 노력하게 된다. 또한 족함의 생활 양식은 우리를 눈에 보이는 실효성에 얽매이는 사고 방식으로부터도 벗어나게 한다. </div><div>  족함의 생활 양식을 실천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고 부와 안정이라는 정사와 권세에 도전한다.</div><div>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에 필요한 만큼만 힘과 부를 사용하며, 보통 기대되는 생활 수준 이하로 살며, 동료들의 관습적인 생각에 도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div><div>  직장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조직체의 관습적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만난다. </div><div>  우리의 가치관을 말해 주는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양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과 신앙의 내용을 공부한 후, 어떤 생활 양식을 가질 것인지를 의식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 생활 양식의 통제 없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div>]]></description>
<dc:creator>정한신</dc:creator>
<dc:date>Wed, 27 Jan 2016 21:23: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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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원용일, 직장인이라면 다니엘처럼, 브니엘, 2012 16. 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는 교회와 크리스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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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3pt;">원용일</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font-weight:bold;font-size:13pt;" xml:lang="en-us">, </span><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3pt;">직장인이라면 다니엘처럼</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font-weight:bold;font-size:13pt;" xml:lang="en-us">, </span><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3pt;">브니엘</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font-weight:bold;font-size:13pt;" xml:lang="en-us">, 2012</span></p><p style="text-align:center;">     </p><p></p><p><span lang="en-us" style="text-align:center;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font-weight:bold;font-size:12pt;" xml:lang="en-us">                             16. </span><span style="text-align:center;font-weight:bold;font-size:12pt;">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는 교회와 크리스천</span></p><p><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2pt;">세상을 책임지는 크리스천의 사명</span></p><p>     </p><p></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전에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을 통치하는 치리자로서 침상에서도 장래 일을 고민했고 꿈을 꾼 후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담긴 신탁임을 알고 그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신하들을 다 죽일 결심을 하기도 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아직도 사람들은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하면 폭군의 이미지를 연상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또한 그는 꿈을 꾸면서 세계 제국의 리더가 갖는 고귀한 목표를 보여주기도 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하나님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이렇게 세상의 살림살이를 책임진 사람들의 고귀한 사명감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선지자의 사명을 다해야 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고귀함을 말해서 무엇하겠는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다니엘은 이교 숭배가 만연하던 바벨론과 메데 바사 제국의 고위 관리로 살아가면서 세상 속 하나님의 사람의 사명을 다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왔던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I </span>영성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냈고 그는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였으며 중보기도자이기도 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당당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이미지를 드러냈고 탁월한 영향력으로 뭇사람들의 존경과 시기와 질투<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모함을 유발하기도 하였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결코 얕잡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의 분명한 정직성과 진실함 때문이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다니엘은 정적들이 치밀하게 사찰을 하면서 고발 건수를 찾으려 하였으나 흠결을 찾을 수 없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그가 보여준 경건함은 어땠는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도 돌파하고 당당하게 살아나왔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또한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임팩트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 사람의 마음속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들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이런 다니엘의 모습이 바로 세상 속에 도전을 주는 선지자의 역할이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결국 다니엘은 유대 백성들의 포로 귀환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 감당해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세상 속에서 이런 역할을 감당하게 할 수 있도록 교회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여야 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래서 교회가 성도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할 때 세상 속의 다니엘로 인해 우리의 일터와 세상이 변화되기 시작할 것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어떻게 해야 목회자들이 직장사역에 관심을 갖고 성도들을 세상 속에 파송하는 일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임을 인식할 수 있을까<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크리스천들은 세상 속에서 일하고 가정생활을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사명이요<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흩어진 교회의 역할을 다하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p><p>     </p><p></p><p><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2pt;">모인 교회만이 아닌 흩어진 교회의 중요성을 파악하라</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이전에 어떤 교회의 수련회의 목사님께서 설명하신 말씀이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중요한 세 기관이 있는데 그 기관들은 일터와 가정과 교회인데 그 중에 첫 번째는 가정이라고 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하나님이 세우신 귀한 기관인 가정을 잘 세워가는 일에 힘써야 하며 두 번째는 일터라고 하며 일터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지로 알고 잘 세워나갈 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한 것이라고 강조한 후<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세 번째가 바로 교회라고 하며 교회는 성도들이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하고 훈련하는 기관이라고 정의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종교개혁자들은 주일예배를 마친 후에 교회의 출입문을 잠갔다고 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기물의 도난을 방지하는 조치가 아니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물론 상징적인 행동이었겠으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라는 교회에서 살아야 하니 주중에는 흩어진 교회에서 성도의 사명을 다하라는 뜻이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몇 년 전 미국에서 열린 직장사역 컨퍼런스에 참가한 교회의 홍보 영상을 보면 그 교회의 성도들이 월요일에 출근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일터에서 일하는 다양한 장면을 보여주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끝났다고 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통상 교회 소개 영상이라고 하면 교회에서 어떤 부서와 조직이 있는지 소개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담임목사의 설교가 연상되지만 이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드리는 삶의 예배를 잘 표현한 것으로 모인 교회보다 흩어진 교회를 더 강조했던 것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교회는 어디에 있는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교회는 건물이 아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주일에는 틀림없이 교회당 안에 교회가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러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흩어진 성도들이 머물러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러면 세상에서 성도들은 무엇을 하는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로 우리의 몸을 드리는 영적 예배가 바로 세상 속 크리스천의 삶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의 비중을 결코 약화시키면 안 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중요성을 따지는 것이야 무의미하지만 모인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흩어진 교회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는 결코 다르지 않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주일에 예배를 잘 드리더라도 월요일부터 시작된 삶의 예배를 제대로 못 드리는 이원론적 크리스천들이 많아서 오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 잡지 못 하는 것 아니겠는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이동파출소<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 경찰차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시민들을 지켜주고 치안을 유지하는 파출소의 기능을 한다는 뜻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런 의미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이동교회<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일터와 세상에서 흩어진 교회의 역할을 하면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한컴 소망 M';font-weight:bold;font-size:12pt;" xml:lang="en-us"> </span></p><p><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2pt;">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한컴 소망 M';letter-spacing:0pt;font-weight:bold;font-size:12pt;" xml:lang="en-us">?</span></p><p>     </p><p></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1897</span>년 발간된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In His Steps’</span>라는 소설이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찰스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M </span>쉘돈 목사가 미국 캔자스 주 토페카에서 목회생활을 하며 몸소 실직한 인쇄공처럼 가장하여 시가지를 헤매면서 기독교인들의 무관심과 냉대에 큰 충격을 받아 자신이 섬기는 교회 성도들에게 낭독해 주기 위해 쓴 글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특히 직업인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책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이 소설에서 교회에서 사역하던 목사님이 실직한 인쇄공의 방문과 죽음으로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라는 질문을 던진 후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1</span>년간 그렇게 실천하기로 결심한 성도들을 모집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부조리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내기로 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그렇게 사는 것이 어려움이 될 때가 있었지만 이 운동은 위축되지 않았고 다른 지역에까지 확산되어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기독교 국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의 부활에 관한 꿈을 꾸면서 참다운 교회<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세상 속 교회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으로 마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물론 하비콕스라는 교수는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라는 질문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리라고 믿는 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우리는 지금 예수 시대에는 상상도 못 하는 여러 가지 윤리적 결단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라고 말하였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옳은 안목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하지만 이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면 그분이 성육신하여 가르쳐주신 말씀의 원리는 모든 세대의 윤리적 이슈를 해결할 수 있는 원리이기도 하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p><p><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2pt;">말씀의 원리를 적용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한컴 소망 M';letter-spacing:0pt;font-weight:bold;font-size:12pt;" xml:lang="en-us">.</span></p><p>     </p><p></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100</span>년도 더 된 소설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오늘 우리 시대를 잘 표현해주는 소설 속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첫째<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이런 변화의 과정에서도 새로운 고용이 창출되고 은사가 발견되는 바람직한 결과가 있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소설 속 인물이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일<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것이 사명이고 복음임을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둘째<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주인공인 목사는 직장 목회를 시작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목회자의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 멋진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설교를 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셋째<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동료 전도<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관계 전도의 모델을 잘 보여 주고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함께 일하는 사람이 동료들의 고민과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일터 전도법으로 추천받을 만하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넷째<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세상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의 시금석은 헌신과 결심<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희생을 실천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직장 사역은 지적인 동의 이상의 행동과 결심과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     </p><p></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2pt;">오늘날에도 세상을 향해 날리는 임팩트</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한컴 소망 M';letter-spacing:0pt;font-weight:bold;font-size:12pt;" xml:lang="en-us">, </span><span style="font-weight:bold;font-size:12pt;">얼마든지 가능하다</span></p><p>     </p><p></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이런 일이 소설 속의 일이기만 한 것인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역사 속에서도 얼마든지 실현 가능했고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죽기 전에 노예 해방의 가슴 벅찬 결과를 보지 않았는가<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금주법에 관해서도 실제로 역사 속에서 족적을 남긴 경우가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빌리 선데이로 알려진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20</span>세기초 활발하게 활동했던 복음전도자가 그 주인공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빌리 선데이의 금주와 사회 가치의 회복 메시지는 설득력이 충분했고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1919</span>년에 미국의회에서 통과되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이처럼 한 사람의 복음 사역이 이렇게 한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킨 예가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우리 크리스천들과 교회가 일터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로 온전하게 서기 위해 노력한다면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미치고 세상의 변화를 초래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세상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든 목회자가 노력했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일하는 성도들이 힘을 모은다면 얼마든지 세상을 뒤집을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에 강한 충격과 영향을 주는 임팩트가 얼마든지 가능하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당대 세계 최강 제국의 궁궐에서 고위 관리로 일했던 다니엘을 통해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헌신하고 준비하여 훈련받은 사람은 얼마든지 세상 속에서 복음의 임팩트를 보여줄 수 있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그런 일터 사역자들은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span></p><p>     </p><p></p><p style="text-align:righ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 xml:lang="en-us"> </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TGIM </span>울산점 자료 정리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 </span>최명락 <span lang="en-us"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letter-spacing:0pt;" xml:lang="en-us">2015. 2. 23</span></p>]]></description>
<dc:creator>락사마</dc:creator>
<dc:date>Tue, 24 Feb 2015 12:54:5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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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송인규 교수,&lt; 평신도 신학&gt; 홍성사, 7-8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title>
<link>https://1391korea.net/bbs/board.php?bo_table=main_tgim_data&amp;amp;wr_id=203</link>
<description><![CDATA[<p style="margin:0px 0px 6px;color:rgb(20,24,35);font-family:Helvetica, Arial,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font-size:14px;line-height:19px;"><a class="_58cn" href="https://www.facebook.com/hashtag/%EB%8C%80%EA%B5%AC%EB%8F%99%EC%84%B1%EB%A1%9Ctgim?source=feed_text" style="color:rgb(59,89,152);text-decoration:none;" rel="nofollow"><span class="_58cl" style="color:rgb(109,132,180);">#‎</span><span class="_58cm">대구동성로TGIM‬</span></a> 2월 11일 모임 내용요약</p><p style="margin:6px 0px;color:rgb(20,24,35);font-family:Helvetica, Arial,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font-size:14px;line-height:19px;">송인규 교수님, 평신도 신학, 홍성사, 7-8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p><p style="margin:6px 0px;color:rgb(20,24,35);font-family:Helvetica, Arial,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font-size:14px;line-height:19px;">" 주님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으고도 친밀하며 내 안에 살아계신 분인 동시에, 온 인류의 역사와 전 우주를 섭리하시는 분으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경제학 용어로 주님을 미시적으로 보기도 해야 하고, 거시적으로 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의 결여는 참다운 신앙을 배척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둘의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한다. " (p124). </p><div class="text_exposed_show" style="color:rgb(20,24,35);font-family:Helvetica, Arial,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font-size:14px;line-height:19px;"><p style="margin:0px 0px 6px;">"예수님을 영접할 때 주되심의 범위와 관련하여 그분을 어떤 주님으로 영접했는지 생각해야한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미시적으로도 알아야 하는 동시에 거시적으로도 보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경우 거시적 관점에서 주님을 모르고 있다. 보통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신앙을 형성하는 기초로서 그리스도 십자가나 보혈도, 실은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p141).</p><p style="margin:6px 0px;">-----------------------------------------------</p><p style="margin:6px 0px;">우리의 상황과 선입견으로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br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합니다.</p></div>]]></description>
<dc:creator>열정이</dc:creator>
<dc:date>Thu, 12 Feb 2015 15:18:0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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