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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의 『평화』 읽기(1)

작성일 2026-02-27 05:12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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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Peace: Understanding Biblical Themes)』 머리말(Preface, 2000년판)

1. 텍스트의 기원과 실천적 지향

이 책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저자가 다양한 현장에서 발표한 강연록과 에세이의 모음이다. 브루그만은 이 책이 학술적 엄밀함보다 교회적 실천(Church Practice)과 선교적 적실성에 우선순위를 두었음을 밝힌다.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재출판되는 이유는 복음의 공공성과 교회의 사역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여전히 내포하기 때문이다.

2. 1960-70년대의 사회적 풍경과 낙관적 신학

당시 미국 사회는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정치적 암살,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점철된 대격변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은 역설적으로 기존 권위 체제에 대한 의구심과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개방성을 창출했다. 하비 콕스(Harvey Cox)의 "세속 도시"로 대표되는 신학적 기조는 세속화를 신의 구속사적 진보로 수용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저자가 속한 그리스도연합교회(UCC)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샬롬"을 새로운 신학적 슬로건으로 채택하며 세계의 안녕을 위한 변혁적 의지를 표명했다.

3. 낭만적 샬롬 담론의 한계와 비판

과거의 샬롬 담론은 비판적 성찰이 결여된 신학적 낭만주의의 산물이었다. 당시의 샬롬은 단순히 "모두가 좋게 말하고 행동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적 자유주의에 기댔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 구조 내부에 잠재된 악과 착취의 현실을 간과했다. 특히 에밀 뒤르켐이나 탈콧 파슨스의 유기적 사회론에 기반한 사회적 균형(Equilibrium)을 평화와 동일시함으로써, 기득권층이 설계한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우를 범했다. 저자는 이를 "비판적 날카로움이 거세된 얇은 신학"으로 규정한다.

4. 샬롬(Shalom)과 미쉬파트(Mishpat)의 필연적 결속

참된 평화는 정의(Justice, 미쉬파트)와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서만 실체화된다. 브루그만은 유대적 리얼리즘을 수용하여 샬롬이 현재 진행형의 투쟁이며, 불완전한 파편들의 모임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샬롬은 기득권층에게는 현재의 축복이지만,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현재 질서의 전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화는 조화를 넘어,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정치적 억압의 해소라는 구체적 정의를 요구한다. 예언자적 언어는 안일한 균형을 파괴하고 혁명적 방식으로 불의를 교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5. 성서적 근거를 통한 소망의 재구성

저자는 시편 85편, 예레미야 29장, 미가 5장을 통해 평화의 이중성을 증명한다. 평화는 신이 부여하는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응답해야 할 과제다. 시편 85편은 현재의 위기 속에서 신의 구원을 간구하며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미래를 대망한다. 예레미야 29장은 포로기라는 절망적 현실을 딛고 신의 신실함에 근거한 공동체적 안녕(Welfare)을 약속한다. 미가 5장의 메시아적 통치는 도시 엘리트의 지배 논리와 대조되는 낮은 곳으로부터의 질서 재편을 예고한다. 이 텍스트들은 평화가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를 향한 역동적 활동임을 보여준다.

6. 현대 사회의 마취와 교회의 사명

오늘날 소비자 자본주의는 거대한 재화의 바다를 통해 인간의 비판 의식을 마취시킨다. 현대인은 신자유주의 질서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격차를 인식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교회가 내세우는 다문화주의 역시 경제적 정의에 대한 논의를 배제한 채 정치적 권력 배분에만 집중한다면, 1970년대의 낭만적 실수를 반복하는 행위다. 계급과 분배의 문제를 외면한 평화는 허구에 불과하다.

7. 제자도의 비용

성서의 샬롬은 인간의 선호와 관리 양식을 파괴하는 전복적 성격을 가진다. 참된 평화를 수용하는 과정은 본회퍼가 말한 "제자도의 비용"을 요구한다. 평화는 상상력의 빈곤과 용기의 부재를 딛고, 깨어진 현실을 직시하며 신의 신실한 통치를 기다리는 저항적 실천이다. 지식인과 교회는 소비자 지향적 사회의 유혹을 거부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샬롬의 비전을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

* 감평

첫째, 한국 교회 주류가 주도하는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은 월터 브루그만이 경계한 "사회적 균형(Equilibrium) 이데올로기"의 전형입니다. 브루그만은 머리말에서 샬롬이 기득권층에게는 기존 질서의 지속이지만, 소외된 자들에게는 체제의 해체임을 명시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집단적 저항은 종교적 자유와 도덕적 가치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소수자의 존재 권리를 유보하여 자신들의 안락한 상태를 보존하는 데 집중합니다. 이러한 보수적 평온 상태의 우상화는 평화를 갈등이 소멸한 정적 상태로 오해한 결과이며, 타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구축된 허구적 샬롬입니다. 성서적 샬롬은 안일한 균형을 파괴하고 약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공동체적 결속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배타적 행보는 성서가 증언하는 샬롬의 전복적 성격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실천적 모순입니다.

둘째, 한국 교회의 정치적 투쟁은 경제적 정의(Mishpat)를 거세한 채 특정 윤리적 의제에만 화력을 집중하는 기만적 도덕주의를 노출합니다. 브루그만은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계급적 소외의 해결 없는 평화는 성립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한국 교회 주류는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하는 구조적 가난과 노동의 소외 문제에는 침묵하면서, 차별금지법과 같은 특정 사안에만 종교적 절대성을 부여하며 대립합니다. 계급적 불평등을 외면한 선별적 도덕주의는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누리는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성서 텍스트를 선택적으로 도구화하는 것입니다. 성서 텍스트는 기성의 관리 방식을 파괴하고 제자도의 비용을 지불할 것을 촉구합니다. 교회가 참된 평화를 회복하려면 도덕적 우월감을 폐기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성서적 비전을 향해 자신의 기득권을 해체하는 예언자적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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