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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2장 12절 17절 요약정리

작성일 2024-10-26 01:18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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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2장 12절 17절 요약정리 241025

온전함과 균형을 위하여

 

버가모 교회 심부름꾼에게 보낸 편지는 장소성에 대한 언급(13절-어디, 곳, 곳)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버가모(Pergamum)는 현재 터키의 베르가마(Bergama)주변 골짜기로부터 우뚝 솟은 고깔 모자 모양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란 B.C.29년에 건축된 로마제국의 최초 황제 숭배의 성전이 견고한 요새 지형인 이 곳에 위치해 있었는 데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한 안디바는 아시아 지역의 최초 순교자로 일설에 의하면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 끓는 놋가마에서 천천히 죽임을 당한 순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황제 숭배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지 않고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받은 버가모 교회는 당시의 거악이라고 할 종교성을 띤 황제 통치에 저항하는 용기를 가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삶의 윤리, 일상생활의 자리에서 회개를 촉구할 만한 모습을 가졌습니다.

 

버가모 교회 내부의 문제적 가르침을 본문은 “발람의 가르침” 혹은 “니골라당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발람은 큰 강가(유프라데스강)출신 브올의 아들 예언자였고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불렀던 민수기 22장에서 24장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커녕 복을 빌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으로 나오지만 곧바로 민수기 25장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하고 바알브올에게 드리는 제사의 자리에 가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바로 얼마있지 않아 민수기 31장 1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이야말로 브올에서의 그 사건 때에 발람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자손을 꾀어, 주님을 배신하게 하고, 주님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한, 바로 그 사람들이오.” 이 말에 따르면 발람은 분명 외부적으로는 무해했지만 은밀하게 비선을 통해 모압과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전략을 가르친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신약은 발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벧후 2장 15절과 16절은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갔습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한 불의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자기의 범죄에 대하여 책망을 들었습니다.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예언자의 미친 행동을 막은 것입니다.”라고 했으며 유다서 11절은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을 걸었으며, 삯을 바라서 발람의 그릇된 길에 빠져들었으며, 고라의 반역을 따르다가 망하였습니다.”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발람은 (1)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하고 (2)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3)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라고 단언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15절이 “이와 같이”라는 말로 이 구약의 인물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에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많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 본문과 함께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니골라당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할 때 짐작되는 것이 생깁니다. 한마디로 에베소교회의 장점이 버가모교회의 단점이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에 대항해 고난을 견디면서도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뛰어났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일로 나무람을 당하는 데 이 에베소 교회가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6절)”하는 일로 재차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니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것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진리를 수호하고 살아내는 일에 관심이 없는 모양새일 것입니다. 버가모의 경우 거대담론, 거시적인 로마황제숭배는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이겨내지만 구체적인 욕망의 문제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로 진보적인 경향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 거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거시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미시적인 삶의 자리, 욕망의 문제, 윤리의 문제에서 실패하는 사례들이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16절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로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라고 할 때 교회 전체인 “너”가 아니라 “그들”이라고 하신 이유가 놀랍습니다. 계시록 1장 16절에서 이미 계시된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는 분께서 그 칼로 환부를 도려내듯이 공동체 안에서 이런 가르침 혹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말씀의 칼로 친히 도려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기는 이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감추어 둔 만나”와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에 대해서는 특정할 수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과 상상력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람의 이야기의 배경인 광야 생활에서 욕망의 문제를 “만나”를 통해 직접 다루시고 채워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이 만나를 욕구에 매이지 않도록 하시는 자유함과 당당함으로, 혹은 예수님의 감추어진 말씀으로, 혹은 믿는 우리에게만 은혜의 방편이 되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로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일한 자세로 “흰 돌”을 무죄석방의 표시로 혹은 메시야의 이름이 있는 잔치의 초대장으로 혹은 검은 벽돌 집에 소유자의 이름이 쓰인 문패 용도의 흰 돌 그 무엇으로 상상하든지 결핍 가운데서도 마침내 이기는 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좋은 것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균형감각이 중요합니다. 온전한 삶이 중요합니다. 거대 담론에 잠식되어 미시적인 일상의 삶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세밀한 부분, 우리의 욕구까지도 삼위 하나님의 심중에 있으며, 그 이름을 걸고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초대하신다는 사실을 놓쳐 버리면 금방 균형을 잃어 버릴 것입니다. 율법주의, 금욕주의도 율법폐기주의, 신비주의 혼합주의도 우리가 걸어야 할 방향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온전한 말씀의 검, 레이저 수술에 우리의 삶을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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