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과 충만(fullness)
작성일 2018-03-27 17:03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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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사역과 삼위일체 신앙
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과 충만(fullness)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이란 책을 함께 읽고 나누면서 삼위일체 신앙이 단순하게 신학적인 사변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전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앙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마28:19)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역시 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즉 삼위하나님의 실재 속에 잠기는 충만(우리는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부릅니다)속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출발에서부터 성화라고 부르는 우리 성도들의 삶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의 신앙이 뿌리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회심과 중생을 경험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으며 성부의 부르심이 없으면 성자를 찾을 수가 없으며,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출발부터 철저히 삼위일체 신앙에 대한 이해, 삼위일체 신앙에 잠기고 충만해 져야 합니다.
거듭남 이후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성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과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 데 힘과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한 것이 별개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계몽주의 이후 개인이 강조되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나’에게 초점이 있기 때문에 ‘나’의 필요를 위해 그때 그때 '성부'가 필요하다가 '성자'가 필요하다가 '성령'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암묵적으로 현대의 신앙생활에 편만해져 있는 데 이것은 세명의 신이 있다고 여기는 ‘삼신론’에 가깝습니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반복적으로 처음 신앙을 고백할 때 받았던 세례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회상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나의 필요 때문에 내가 충만해지고 나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의 위격중 하나가 필요하고 그 중에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구한다든지 ‘성령세례’ 혹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하는 것은 나 중심주의의 반영입니다. 오히려 처음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실재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잠겨 충만을 경험한 것 처럼 계속하여 이 세례가 의미하는 실재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이며 성화인 셈입니다.
내 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을 추구하는 것과 삼위 하나님의 실재 속에 들어가 잠겨 충만한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내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신앙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성취로 이해하는 것이며 올바른 신앙의 균형을 가지지 못하는 모습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의 실재로 세례받음으로 시작하여 삼위 하나님의 실재로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신앙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 중심적인, 자기도야가 아닌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신앙, 관점과 삶과 선교에서 균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항상 삼위 하나님의 실재안에 잠겨 충만을 경험하는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
일상생활사역의 기초: 삼위일체 신앙과 충만(fullness)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이란 책을 함께 읽고 나누면서 삼위일체 신앙이 단순하게 신학적인 사변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전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앙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마28:19)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역시 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즉 삼위하나님의 실재 속에 잠기는 충만(우리는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부릅니다)속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출발에서부터 성화라고 부르는 우리 성도들의 삶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의 신앙이 뿌리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회심과 중생을 경험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으며 성부의 부르심이 없으면 성자를 찾을 수가 없으며,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출발부터 철저히 삼위일체 신앙에 대한 이해, 삼위일체 신앙에 잠기고 충만해 져야 합니다.
거듭남 이후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성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과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 데 힘과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한 것이 별개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계몽주의 이후 개인이 강조되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나’에게 초점이 있기 때문에 ‘나’의 필요를 위해 그때 그때 '성부'가 필요하다가 '성자'가 필요하다가 '성령'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암묵적으로 현대의 신앙생활에 편만해져 있는 데 이것은 세명의 신이 있다고 여기는 ‘삼신론’에 가깝습니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반복적으로 처음 신앙을 고백할 때 받았던 세례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회상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나의 필요 때문에 내가 충만해지고 나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의 위격중 하나가 필요하고 그 중에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구한다든지 ‘성령세례’ 혹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하는 것은 나 중심주의의 반영입니다. 오히려 처음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실재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잠겨 충만을 경험한 것 처럼 계속하여 이 세례가 의미하는 실재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이며 성화인 셈입니다.
내 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을 추구하는 것과 삼위 하나님의 실재 속에 들어가 잠겨 충만한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내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신앙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성취로 이해하는 것이며 올바른 신앙의 균형을 가지지 못하는 모습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의 실재로 세례받음으로 시작하여 삼위 하나님의 실재로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신앙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 중심적인, 자기도야가 아닌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신앙, 관점과 삶과 선교에서 균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항상 삼위 하나님의 실재안에 잠겨 충만을 경험하는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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