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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일상생활사역주간2024 에 전하는 507주년 종교개혁기념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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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 건 조회 505 회
작성일 24-10-1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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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사역주간2024 에 전하는

507주년 종교개혁기념주일 메시지

 

본문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제목 개혁과 사랑

 

마틴 루터의 개혁 1517년을 기점으로 볼 때 이번 주일이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역사적 종교개혁의 의의를 다시 강조하면서, 더불어 역사적 종교개혁의 아쉬움을 다시금 오늘 우리 시대의 아젠다로 생각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역사적 종교개혁의 부정적인 결과, 과오를 통하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개혁의 아젠다를 말씀속에서 찾아가 보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2024년 종교개혁기념 주일, 무엇인가 방향을 잃은 개혁 과제, 원래 종교개혁의 정신과 그것을 반영한 오늘의 과제를 잘못 잡은 깃발을 들고 외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같은 정신에 서서 지난 천년간 말씀에서 엇나간 강줄기를 원래 제대로 찾는 일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획일적인 가톨릭 교회의 지배정신을 극복하는 데 각 지역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개혁운동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다양한 갈래가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불신하고, 이전 가톨릭교회를 향한 잣대와 같은 잣대로 진리를 판가름하려는 역동이 지속되자 이 운동은 유럽 전체를 전쟁의 상황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진리를 향한 열정이 평화를 삼켜 버렸고 사랑보다는 신학적 엄중함, 엄격함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종교개혁직후 유럽의 30년 전쟁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조약 이후에도 사보이아 발도파 전쟁(1655년-1690년) 삼왕국 전쟁(1639년-1651년), 9년 전쟁(1688년–1697년), 스페인 계승권전쟁(1701년–1714년)등이 종교전쟁으로 거론될 수 있습니다. 이런 종교전쟁은 기독교 신앙과 공동체가 가졌던 사랑과 평화의 정신이 올바름과 정통의 이름으로 상실되어 버린 결과입니다.

 

사실은 이런 일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오늘도 진리의 이름으로, 정통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기독공동체의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올바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분기탱천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게 될 때 평화의 정신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분열을 겪기 쉽고, 타자, 다른 분들을 사랑하는 사랑, 우리의 처음 마음을 잃어 버리기 쉽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부터 지금 21세기 현재 우리 주변에까지도 자주 경험하는 삶의 실재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일곱교회의 심부름꾼(사자)들에게 건네진 일곱교회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이 일곱교회를 향한 묵시의 말씀은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듯 하면서도, 각각 독자적인 내용을 가진 병렬식 구조, 옴니버스방식 혹은 피카레스크식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말씀인 동시에, 이 말씀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 전체 교회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각각의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주목하면서도, 동시에 삼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상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통해 삼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cf.1:16)”이 인정하시는 부분(2-3절, 6절)과 나무라시는 부분(4-5절)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수고”, “인내”, “참고”, “견디어”낸 것과 “낙심한 적이 없다”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이런 것들은 “악한 자들”과 “사도라고 자청하는 자들” 그리고 “니골라 당”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런 존재들을 에베소 교회를 어지럽히는 진리와 관련한 도전으로 일괄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진리 수호에 있어서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듣지만 그들에게는 회개(2회)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4절과 5절의 나무라시는 말씀의 핵심은 “처음(2회) 사랑”“처음에 하던 일”을 버렸기 때문에 회개하고 그것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질문하게 됩니다. 왜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의 단서를 본문에서 추론한다면 아마도 나무람 앞뒤에 있는 거짓 가르침에 대한 에베소 교회의 분투와 인내 속에서 아마도 사랑을 잃어 버리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라고 자청하는 자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미워하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놓치게 될 때 우리는 원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서로 사랑”의 도를 놓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에 집착하다 보면 사랑을 잃어 버리는 경우가 교회의 역사와 경험속에 많이 있기 때문에 저는 이런 추론이 개연성 있는 추론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진리 비진리의 문제로 다툼이 생길 때 이렇게 사람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놓아 버리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가 깨지게 되면, 이것이 내부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7장 21절과 23절이 이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진리의 수호 때문에 원래 존재 자체로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반영하는 하나됨, 서로 사랑하는 것을 놓치게 될 때 세상이 복음을 알고 믿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맙니다. 말하자면 세상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잃어 버린 교회는 그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5절)”라고 강력한 표현으로 경계하십니다. 반대로 “이기는 사람에게는,” 다른 말로 진리 수호로 인해 사랑하는 것을 놓치는 일이 없으면, 창세기 3장 22-24절과 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이미지인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는 약속, 즉 영생을 주님께서 약속(7절)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모든 주권을 가지신 인자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1절)”이신데, 동시에 7절에서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므로, 적어도 이 본문에서 성자와 성령이 동시에 하시는 말씀으로, 즉 삼위 하나님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말씀하시는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교회도 한 몸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다양한 사람의 공동체인 “너(2절이하)”라고 불리는 에베소 교회와, 성령께서 에베소 교회뿐 아니라 “교회들(7절),” 즉, 일곱 교회가 의미하는 전체 교회에게 말씀하신다면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엄격한 법학자인 칼빈의 후예임을 자랑하는 한국 장로교회가 한국교회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에베소교회처럼 잘못된 가르침과 이단 등에 대해서 잘 대처하여 왔고 진리수호에 앞장 서 온 것은 칭찬을 받을만 합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나무랄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체질이 될 때 생깁니다. 대체적으로 한국교회는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죄에 대한 혐오를 죄인에 대한 혐오로 쉽게 치환해 버렸습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 사람에 대한 연민보다 올바름, 진리에 대한 관심이 더 커서 마침내 사람을 사랑하는 교회의 원래의 소명, 처음 사랑을 놓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진리에 대한 판단이 편의적으로 혹은 자기중심적으로 편파적으로 적용되게 될 때 위선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세상의 시각이 부정적인 이유입니다. 사랑할 만한 내부자는 사랑하고 그렇지 않다면 배제하고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기독교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복음을 알거나 믿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려는 열정이 힘 혹은 권력을 가지게 될 때 폭력적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정의라는 이름으로 힘을 행사하면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벌어지기 쉽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여전히 중세 카톨릭과 같이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개혁가들이 저질렀던 역사적 오점들의 이유입니다.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추방하고 심지어 극형에 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와 대조적인 역사적 종교개혁의 흐름이 있습니다. 이 흐름은 권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개혁의 길을 선택하였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의 능력을 놓지 않았던 사례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공동체와 예수 따르는 제자도, 평화를 강조하는 개혁운동이었습니다만 카톨릭 뿐 아니라 심지어 소위 정통 종교개혁 그룹들로부터도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16세기 네덜란드의 아나뱁티스트 순교자, 더크 윌렘스(Dirk Willems)의 이야기는 죽기까지 사랑하며 평화를 지켰던 이야기입니다. 1569년 네덜란드 정부 당국은 재세례신자들을 붙잡으라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더크는 그를 붙잡으러오는 사람으로부터 얼어붙은 강을 건너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라오던 추격자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차가운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더크는 추격자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자 망설임없이 곧장 돌아가서 그를 익사하지 않도록 구해 주었습니다. 건짐받은 그 사람은 자기를 구해 준 더크의 행동에 깊이 감명 받아 그를 놓아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둑에서 지켜보던 그의 상관이 더크를 다시 붙잡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후 더크는 재세례파라는 이유로 처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사람들은 더크를 산채로 불태워 죽이기 위해 말뚝에 묶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도 “오 주님, 오 하나님”이라고만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평화의 사신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17절에서 20절 상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 평화의 복음의 사신이 되어 세상에 화해의 복음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됨, 페리코레시스, 사랑을 공동체안에 반영하여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가능합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 거짓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때도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장 6절을 보면 처음사랑을 회복할 것을 말씀하신 이후에 다시금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라고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여기 주님도 미워하시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가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행동, 하는 일을 지적하며 그것을 위해 분투와 인내를 하면서도 처음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진리 수호에 앞장서면서도 사람에 대한 연민과 관심,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진리 수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화해의 사신으로 여겨야 합니다.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 잘못하는 사람들이나 공동체 바깥의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의 정체성 매김이 매우 중요합니다. 원래 우리는 세상의 복의 통로로 부르심 받고 보내심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을 저주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 아닙니다.

 

“세상에 평화, 복이 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이유를 다시 생각하여야 합니다. 진리에 착념하는 이유는 그 진리를 살아내기 위함입니다.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의 사신이 되어 세상에 복을 끼치는 우리의 원래 소명을 다시 자각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의 개혁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세상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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