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2021-1기
2021-1기 수료 염종열님 피드백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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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우리를 ReFrame하는 이야기”
1) 강의의 내용 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새로운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오래전에 한 청년이 네게 해준 말이 생각난다. “목사님, 교회에서 하는 설교는 동화 같은데, 세상은 통속 소설 이에요.” 사회 초년생인 한 그리스도인이 겪었던 좌절감을 표현해 주는 이 한 마디가 다시 떠오른다. 그 외에도 고민하던 몇몇의 얼굴들과 그들의 이야기들도… 사실 성경 이야기도 통속 소설 같은 내용이 많은데, 그걸 굳이 동화로 만드는, 그 무시무시한 능력이 아직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내 메시지에는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이야기’라는 매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주면 좋으련만, 다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쉽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에게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가르쳐 주셨던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난 곁 길로 빠졌다. 두 제자가 ‘지금 막’ 경험한 사건을 예수님이 ‘오래된’ 성경 이야기로 이해시켜 주신다. 지금도 가능할까?
Episode 2 “우리의 문화에 담긴 이야기”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과는 하나님의 이야기 가운데서 내 자리를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현대 문화의 4가지 특징, 즉 이탈, 자기 창조, 유동성, 제한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들이 우리의 문화적 상황에 모두 다 들어맞는다고 볼 수 없더라도,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서양사람들은 정의하고 분류하는데 참 탁월하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부럽다. 동시에 우리 맥락에서 하나님의 이야기와 경쟁하고 있는 문화 이야기는 더 없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눈이 침침해져서, 자막을 보느라 너무 힘들다. 누가 한국어 더빙으로 만들어주면 좋을 텐데. 그럼 내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아쉽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라고 하면서, 주로 소명 발견을 강조해왔는데 균형을 좀 잡아야 하겠다. 소명 발견은 자기 발견에서 시작하고 그것이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인간은 늘 불가능한 오용과 남용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니… 포스트모던 시대가 정체성 위기의 시대인지라, 여기서도 그걸 강조하는 것 같다. 이 말을 들어야 하겠다.
Episode 3 “창조와 타락”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변호사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에도 관심이 있으시고, 기술자만 아니라 기술에도 관심이 있으시고, 예술가만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있으시다.” 하나님이 정말 일을 도구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내가 그런 것들에 관심이 가는지 이제 알겠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어쩔 수 없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타락을 이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익도 있을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현실은 초월할 수 없기 때문에, 수용 내지는 인정 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을 텐데 침묵해 버린 것이 아쉽다. 그러면, 정신 승리나 긍정의 힘으로 전략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데… 물론 모든 주제를 다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지구가 우주의 성전과도 같다는 설명이 끝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사이에 잠시 Pause가 있고 영상이 깔린다. 아름다운 들판의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모든 인류가 성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인상이 스쳐 지나갔다. 거기가 시장이든, 버스 안이든, 유흥가든, 그들이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이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든, 술 취한 사람이든 다 성전이고 성전 일 하는 사람이다. 아니, 원래는 그랬어야 했다. 그런 눈과 시각이 필요하다.
Episode 4 “이스라엘을 부르심”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심적으로 부담감이 생기면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버리는데, 그러면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특별한 상황 가운데 두시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거기서 소금이 되게 해야 한다. 사람들을 세상에 있게 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톰 스키너 목사의 설교나 리치와의 대화는 성속이 나누어지지 않는 구약의 이야기들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성경을 큰 그림으로 보려고 할 때, 늘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구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우리 이야기와 연관된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큰 그림에서 보면 수박 겉핥기가 되어버린다. 이야기는 길게 했는데, 지금 여기 하고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쓰신다면서 나성찬 교수가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한다. 무릎이 상하도록 기도했던 어머니…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기도는 평범하다.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들으시는 분이 특별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한다. 그리고 평범한 기도를 비범하게 해내셨던 분들이 있다. 하나님이 쓰셨다. 그 유산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텐데.
Episode 5 “왕이신 예수”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분에게서 여전히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니... ‘성육신이 성취한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것들을 열거하려면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를 세는 것과 같다.’는 아타나시우스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그동안 부족한 복음을 가지고 있던 탓에, 소홀히 다루었던 성육신이란 주제가 다시 조명 받고 있어서 다행이다. 오죽하면 거의 이 주제로만 책 쓰는 사람이 있다. 몸뚱이로 사는 삶이 얼마나 거룩한 지 알려준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의미가 개인 구원과 사적 도덕성을 주로 강조하는 쪽으로 오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또한 ‘대속’이 공적, 사회적 의미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대속’이 정말 개인적, 사적 의미만을 가졌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 당시 여전히 타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졌던 의문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회복에 대한 수 많은 약속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등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갖는 의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왜 하나님의 통치는 보이지 않는가?’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언제 완성 되는가?’ 등등. 하지만 그 옛날에도 이런 거대 질문에 빠졌던 사람들이 정작 자기 자신 옆에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오신 그분을 몰라봤다. 그분이 많은 무리들 속에서 세례 받고 성령 받으실 때,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게, 중동의 한 귀퉁이에서 노년의 아브라함을 불러 만인을 위한 일을 시작 하셨듯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이렇다. 그래, 작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서 그분과 그분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Episode 6 “새 하늘과 새 땅”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는 말이 문뜩 생각난다. 그 동안 이 ‘끝’이 성경이 말하는 바와 달라 얼마나 많은 혼돈과 오해를 낳았는지. 지금도 그 여파가 크다. 우리 마음에 담긴 하나님의 이야기가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거기엔 ‘지금, 여기’에 대한 이야기와 상상력이 비어 있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걸 칭송하고 경배할 뿐, 그걸 반영하고 따르지 못했다. 그분의 이야기로 내 이야기를 상상하라고 하신 것인데.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서구 기독교의 주류 쪽에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를 이미 오래전에 언급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좋은 결과도 있었지만, 낭패를 본 측면도 없지 않다. 이에 대한 이해와 반성을 가지고 예수님의 주되심과 부활, 성경의 거대 서사와 성령님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어 다행이지만, 그래도 저쪽과 오버랩 되는 면이 없지 않다. 괜한 불안이겠지. 또한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오는 것이지만, 그걸 강조하려면 개인적인 죽음 이후에 대한 가르침이 빠지면 안 될 것 같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J. I. 패커가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이 온전히 사람답게 살 때 드러난다.’고 말했던 이레네우스의 말을 인용하자, 트램폴린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어린이들의 장면이 이어진다. 그래, 이게 가장 아이다운 모습이지. 나도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5막, 혹은 6막으로 되어 있는 성경의 하나님 이야기를 계속해서 되새김질하고 있다. 내가 그 이야기 속에서 다시 형성되어야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맛 볼 테니까.
Episode 7 “교회와 성령”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구약은 성령님의 강림이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종말의 증표라고 강조한다. 새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보증으로써, 성령님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을 그 일에 참여시키신다. 아버지가 계획하시고 아들이 이루신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하신다. 그래서 새 창조를 이루는 선교의 영이시다. 당연히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이끄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성령님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유익의 차원에서만 이해해 왔다. 물론 그런 면도 필요하다. 다만 거기서 멈춘 것이 문제다. 성령님을 통한 사회변혁을 주장했던 한 재세례파가 떠오른다. 가능한 일이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원래 성경 이야기의 시간 순서 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보다 앞서 ‘교회와 성령’이 나와야 하는데, 결론을 먼저 언급했다.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그래서 우리시대 이야기가 뒤에 나오는 것 같다. 또 그래서인지, ‘만물의 회복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이야기를 자기의 삶에 어떻게 연결시키는가?’라는 화두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변이 그다지 명확하지는 못하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음으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4:13-14, 7:27-29).”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기에 우리에게 계신다.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 강처럼 흘러나오는 생수 같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 나는 믿는다.
Episode 8 “이방인과 나그네”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전에 한 목사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출장’에 비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땅에서 할 일이 있다는 점과 우리는 나그네들이라는 면을 잘 드러내 주었다. 그런데 아쉬운 면은 ‘본향’을 진짜 하늘에 둔다는 점이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동화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고립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우리 정체성이다. 이런 긴장을 잘 다루지 못하고 세상에서 고립되거나 소외될 때, 우리는 이방인이 되고 이 곳은 유배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처럼 덧없는 세상이 되지 않도록,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대사’와 ‘대사관’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성경에 나오는 ‘사신’보다 현대적이고, 이해하기 수월하고, 무엇보다 장기적인 역할이다. 보냄 받은 자의 정체성에도 어울리는 개념이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그렇다고 ‘대사’라는 비유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출장’ 비유처럼 ‘본국’ 개념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설 하나님 나라보다 사후에 갈 곳에 방점을 둘 가능성이 적지 않다. 사실 이것도 개개인에게 너무 중요한 문제다. 다만 새로운 이해와 행동이 다시 회귀할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그럼 어쩔 수 없나? 지금 이 곳에 좀 더 강조점을 둘만한 비유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신’ 비유가 더 낫나? 어떤 비유도 모든 것을 다 말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냥 오해할 소지에 대해서 따로 잘 설명하면 될까?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예레미야 29장을 설명하면서, 바벨론을 저주하고 임박한 심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을 언급하는데, 왠지 동시대 사람들이 떠올랐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심지어,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혐오와 차별이 있는 메시지라면 말이다. 내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과 번영)을 구하고, 그(성읍)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혹은 번영)함으로 너희도 평안(혹은 번영)할 것임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Episode 9 “하나님의 대사”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나라 시민들의 정체성과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대사들의 정체성을 육성하고 후원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가 교회다.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연합 시키는 것, 즉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것인데, 그 결과이자, 참여자가 교회다. 이 점을 아무리 외치고 슬로건으로 삼아도, 여전히 양육 과정의 목표는 구역장 만들기이고, 교회 조직도는 교회내 사역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그건 분열증이다. 좋은 말을 찾아다닐 때가 아니라 자기성찰이 필요한 때다. 하나님의 백성을 풀어놓아 주어야 한다. 모든 피조물, 즉 만물을 돌보라고 하신 처음 소명, 즉 하나님의 선교로 되돌아가도록 말이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으로써 교회는 조직화된 기관의 형태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사실 교회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곳이 직장, 일터, 일상이다. 교회보다 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관계는 시간에 비례하기에, 더 깊은 관계도 가능하다. 거기서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는 것은 어떨까? 그게 만물을 돌보기에 더 쉬워 보인다. 하나의 우주적 교회와 이 땅에 지역 교회들을 나누듯, 그걸 제도적 교회와 구분해서 실질적 교회로 인정하고 권장하는 것은 어려울까? 1세기 전에 한 유명한 신학자가 이와 비슷한 개념을 ‘유기적 교회 the church as organism’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왜 그 생각은 더 이상 개발되지 못했을까?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주로 청년들과 어울리다가 처음 맡은 교회사역이 유년부였다. 의사소통이 힘들어서 고생하다가 읽었던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어린이 사역 하면서, 성경만 연구하고 어린이에 관해서 배우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이때부터 새로운 언어 배우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났는데, 여전히 언어 배우기는 쉽지 않다. 늘 낯설다.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 경청하고 질문하고 늘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언어를 다시 배우려면(relearn), 이전의 언어는 잊어버려야 한다(unlearn). 늘 외부자로 남아 있으려니, 만사가 피곤하다. 그래도 무언가에 시간을 드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시니, 할 말이 없다.
Episode 10 “기쁨이 충만한 삶”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여, 우리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기쁨이다. 그래서 ‘인간의 첫째 되는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즉 영원토록 그분을 온전히fully 즐거워하는 것이다.’ 기쁨이 지속가능성과 회복탄력성을 만든다. 그런데 이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이 바쁨이다. 현대인은 바쁨의 정도와 자기 가치가 정비례한다고 본다. 바쁨을 자랑한다. 창세기(히브리인)의 하루는 저녁에 시작한다. 일이 아니라 안식에서 시작한다. - 물론 일로 하루를 시작한 현대인은 저녁에도 분주하다. - 우리가 안식하는 저녁에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래서 아침에 깰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시작해 놓으신 일에 참여할 수 있다. 그래, 안식, 즉 은혜가 먼저다. 거기서 기쁨,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이 나온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늘 서구가 가진 분석력과 이론화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이해’와 ‘실천’, ‘Being’과 ‘Doing’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태도는 못마땅하다. 언제나 ‘Being에서 Doing이 나온다. 바른 이해에서 바른 반응이 나온다.’는 식으로 강조한다. ‘Doing’이 ‘Being’을 형성할 때는 없는가? 실천해 봐야만 이해되는 경우나, 주로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유형의 사람들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두 측면은 일방적이기 보다 상호적인 듯싶다. 그 일방적 시각이 기독교를 지식 중심적으로 축소하고 탈육신화시키곤 한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기독교의 첫 300년은… 잘 지는 법을 알았다.’는 존 딕슨의 인터뷰가 이어지면서 길거리 장면이 나오고, 그 장면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가 가리고 있다. 문뜩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본회퍼가 나와 다른 형제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생활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젠 나와 세상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두고 생활하라시는 듯하다. 그 모습을 통해 세상을 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우선, 차선 양보가 더 수월해질 것 같다. 그리고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할 것 같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새롭게 리프레임하고, 인간 문화의 모든 부분에 소망, 생명, 그리고 의미를 부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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