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예배 : 제2장 이 따위 직업 관두겠소 사표나 받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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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작성일 08-02-28 15:55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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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이 따위 직업 관두겠소 사표나 받으시오
요약 : 이창용
일,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얼굴
돈, 사장, 체제
일에 있어서 무엇인가 분명 잘못된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꾼으로 삼으셨지, '상처투성이인 채로 걸어 나가는 자'로 만들지 않으셨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사람됨의 필수 요소로, 선물과 복으로 일을 주셨다. 우리가 살기 위해 일하지 않고 일하기 위해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로 일은 우리가 살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다양하다. 우리가 듣는 대답의 대부분은 돈, 사장, 혹은 체제와 관련이 있다. 낮은 임금, 형편없는 작업 환경, 얼간이 같은 감독관 혹은 지루하고 의미없는 업무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단 한 가지 답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죄이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다른 모든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대답 모두에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죄가 그 모든 것의 뿌리이다. 나머지는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의 일부이다. 죄가 질병이라면, 돈이나 사장이나 체제는 그 증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죄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일에 영향을 미치는가? 잠시 창세기의 첫 장으로 돌아가서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 일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자.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 땅을 다스리고 돌보라고 명령하신다. 즉 하나님의 재산을 맡아 주인의 이해 득실에 맞게 그것을 경영해야 할 책임을 받은 것이다.
특별한 나무 두 그루-하나님의 위대한 모험
하나님이 이 두 청지기에게 주신 첫 번째 일은 동산을 가꾸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자라는 많은 나무들 가운데에는 동산의 중앙에 나란히 서 있는 특별한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하나는 생명 나무였으며,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아담과 하와가 그 동산을 가꿀 때 하나님은 생명 나무의 실과는 먹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 생명 나무는, 하나님이 일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대로 일을 마침으로 말미암는 생명과 성취를 나타낸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가꾸는 나무, 즉 그들이 그 곳에서 하는 일은 그 안에 생명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 다른 나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나무에 대하여 "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너희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신다. 이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여 일하거나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일하는 두 개의 선택이 있음을 말해 준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자. 아담이 일하는 청지기로서 돌보아야 할 많은 것들 중에는 두 개의 놀랍고 신비스러운 나무가 있었다. 두 나무는, 삶과 죽음, 선과 악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일의 선물에 포함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람은 이 양극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존재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위대한 모험의 대상이다. 그들만이 하나님을 따르느냐 하나님을 거역하느냐 하는 선택의 자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일이라는 신성한 선물에는 신성한 힘과 가능성 곧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 '예'나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따른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후손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지 말라 명하신 나무의 과실을 따먹었다고 말한다. 바꿔 말해서 그들과 우리가-모두 다 함께-하나님께 '아니오'라는 대답으로 우리의 자유를 행사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로 이것이 죄다. 그리고 또 한 마디로 말해서 바로 그 점에서 일이 잘못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담과 하와의 이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불순종을 '타락'이라고 불렀다. 모든 피조물은 죄와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이 최초의 불화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중요한 점은 이 균열이 네 가지의 근본적인 인간관계의 중심을 가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 인간 상호간의 관계, 그리고 "일에 있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우리의 물음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으로 땅과의 관계와 그 땅에서 하는 우리의 일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7-19)
사람들이 말하다시피 그 나머지는 역사이다. 그것도 한 가지 면에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러하다. 성경은 이 첫 부부의 이야기가 또한 바로 우리의 이야기임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타락성'은 조건 즉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현실이다. 인간의 조건을 분석하는 현대 세속 분석가들은, 인간과 일을 '아직' 선하지 않지만, 개선되고 완성될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하여 인간과 일을 '더 이상' 선하지 않으며 따라서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본다.
타락성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조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 각 사람은 모두 죄를 지었다. 우리 모두는 일이 타락한 데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하는 일에서 우리의 길을 가겠다고 선택했으며 그리하여 일과 함께 우리도 타락하게 되었다.
그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이 본래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일은 여전히 큰 기쁨과 성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일이 선하다고 할지라도 그 일은 온전치 못하고 망가진 것이다. 일은 투쟁과 허탄함, 탐욕과 불안 같은 죄의 표지를 가지고 있다.
투쟁
죄가 들어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은, 일을 투쟁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지는 더 이상 우리의 수고의 결실을 쉽사리 내어놓지 않는다. 하나님은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말씀하셨다. 타락 이후 우리는 많은 피와 땀과 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린 뒤에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오토바이 엔진을 고치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 또는 수학 문제를 풀거나 오래된 의지를 다시 손보는 일 등에 너무나 골몰하여서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모르는 채 깊이 빠져들어 기쁨과 만족을 느낀 적이 있는가? 타락 이전의 일은 그렇게 느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일은 일종의 선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그러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일은 요구,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 전에 일은 즐거운 명령이었다. "일도 하고 먹기도 하라." 그러나 이제 일은 쓰라린 필수 요건이 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못한다."
분노는 이러한 상태를 표현하는데 쓰인 고전적인 신학 용어이다. 분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표시하는데 쓰인 성경의 용어이다. 우리의 일과 관련하여 분노는, 한때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의 일부였던 일이란 것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저항과 반대를 경험하는 주된 영역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타락 이전에 일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일은 소위 '자연의 법칙'이라는 냉혹한 비인격적 환경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한때 선물과 자유였던 일이 이제는 우리를 속박하는 강요 사항이 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단순히 일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도 우리의 필요에는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힘들게 한다. 억지로 일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리고 흔히 그 사람들이 누리는 일로부터의 자유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부린 대가이다. 앞으로 어떤 종류의 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약간의 자유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역시 소수이다. 톰 샤인의 말대로 나머지 사람들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어깨에 그 짐을 나르느냐 뿐이다. 한때 기꺼이 그 소산을 내주었던 땅은 이제 음식을 얻기 위해 맞잡아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이 되었다.
헛됨
투쟁하는 일과 더불어 거기에는 또한 비극적이고 아이러니한 뒤틀림이 있다. 그렇게 억지로 무관심하게 아담을 먹여 살리는 바로 그 땅이 언젠가 그 아담을 삼켜 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가 "흙으로 돌라갈 때까지" 평생동안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땅과 씨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네가 흙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하여 힘들게 흘린 그 땀과 노력이 어느 날 우리를 죽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과의 싸움은 또한 죽음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사실이 참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굳이 성경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 체스터 톤은 기독교의 모든 교리 중에서 타락의 교리 혹은 원죄의 교리만이 유일하게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교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의 치명적인 영향에 대한 증거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지에서 따온 아래와 같은 광고다.
일에서 오는 압박이 너무 심하십니까? 과로하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시달리십니까? 골치가 아픕니까?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습니까? 위통이 있습니까? 낙심한 상태입니까? 신경 쇠약이나 신경 발작이 있습니까? 가슴에 통증이 있습니까? 부당 해고를 당했습니까? 부당 대우를 받고 있습니까? 즉시 전화하셔서 도움을 청하십시오. 치료와 함께 현금 혜택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전혀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무료입니다. 당신의 고통을 지금 당장 끝내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스트레스를 당장 그치십시오.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
우리가 쓰러졌을 때 일도 함께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 타락은 우리의 일에 허무라는 수의를 덮어 주었다. 우리의 일의 종국이 죽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탐욕과 불안
투쟁과 허무감을 느끼며 일하는 것은 보통 불안을 함께 유발시킨다. 창세기 3장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주제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으며 특히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이 어리석은 사람은 한 해의 풍작을 거둔 후에 스스로에게 "이 풍작으로 무엇을 할까? 알았다! 더 큰 곳간을 더 많이 지어서 거기에 이 모든 것을 쌓아 두자. 그런 다음 나는 물러나서 휴식을 취하면서 편하게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거지"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시간과 힘을 자신만을 돌보며 더 부자가 되는데 썼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더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청중에서 모든 종류의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탐욕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부자의 인생에는 탐욕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이 작용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 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눅12:22)
염려하지 말라니? 다른 모든 불안의 원인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불안은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뱀이 약속했던 사실 즉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려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 으뜸되는 과업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일을 돌봐 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 모든 혼란을 불러 일으킨,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프레드릭 부크너는 "죄의 힘은 원심적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나 인간 사회의 중심부에서 혹은 일의 중심부에서 하나님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즉시 죄가 "다른 모든 것을 주변부로 밀어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속알갱이만 남을 때까지 조각들이 알갱이로부터 벗겨져 날아가 버릴 것이며 속알갱이마저도 산산이 부서져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날아가 버릴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만약 죄의 원심력을 뒤바꾸고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일을 개혁하고 갱신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그 무엇 혹은 누군가가 있단 말인가? 문제를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고 나는 인간 역사의 기록들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덧붙이고 싶다.
기적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와 우리의 일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그 기적이 일어났으며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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