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빠른 하나님, 느려터진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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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작성일 08-01-14 13:33본문
일상생활의 영성은 일상생활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아는가? 하는 것이 일상생활의 영성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다.
소위 근육질적 기독교(콘스탄틴적 기독교)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동작을 늘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믿으면 복받는다'하는 식의 주장을 신앙적 '상식'이라 부르게 될 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의 경험과 괴리된 딴 세계의 이야기가 되며, 심지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과 먼 하나님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때로 발빠르게 움직이신다. 출애굽 시절이나 엘리야나 엘리사 선지자들을 통해 혹은 신약의 오순절 사건이나 바울과 같은 사람의 회심의 장면에서 하나님은 발빠르게 움직이시며 그 능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발빠른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의 일상은 오히려 발빠른 하나님을 경험하기 보다는 느리디 느린, 시쳇말로 느려 터져 복장이 터지게 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장인 것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관계속에서 하나님이 그러셨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고...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의 실재가 그렇다. 시편의 많은 부분이 이런 느린 하나님에 대한 영성적 반응의 표현이다.
베드로후서 3장 8절과 9절을 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 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사도가 The Lord is not slow!라고 외치는 이 장면은 그 당시 성도들이 하나님이 느리다고 생각할 만큼 한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빠름과 느림은 우리의 빠름과 느림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의 문제를 갖고 정서적 반응을 보이던 바울, 어쩌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설명을 필요로 하다고 여길 정도로 느리다고 생각하는 자신과 사람들에게 마지막 부분에서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2-36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과 지혜를 좁은 인간의 마음으로 이러쿵 저러쿵 왈가왈부하는 것이 우습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이 시대에 전 세계와 전 세대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며 그것을 소원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행진하고, 낙태를 일삼는 의사들과 유전자 조작을 꿈꾸는 과학자들을 응징하고, 조국교회가 우리시대에 부흥을 경험하고...이 모든 것들이 만일 그저 성경과 우리의 신앙의 일상과 교회사적 여정에 대한 성찰없는 발빠른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근육질적 기독교를 표방하는 것이라면 이것만큼 신앙을 왜곡하고 성경을 뒤틀리게 하는 것이 없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느려 터진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고 그 깊이에 머리를 숙이는 자만이 겸손을 알고 융통성을 이해하고 관용할 줄 아는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하는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일상은 발빠른 하나님과 동시에 느려터진 하나님을 경험하고 관계하는 장이다.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물론 하나님은 때로 발빠르게 움직이신다. 출애굽 시절이나 엘리야나 엘리사 선지자들을 통해 혹은 신약의 오순절 사건이나 바울과 같은 사람의 회심의 장면에서 하나님은 발빠르게 움직이시며 그 능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발빠른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의 일상은 오히려 발빠른 하나님을 경험하기 보다는 느리디 느린, 시쳇말로 느려 터져 복장이 터지게 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장인 것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관계속에서 하나님이 그러셨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고...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의 실재가 그렇다. 시편의 많은 부분이 이런 느린 하나님에 대한 영성적 반응의 표현이다.
베드로후서 3장 8절과 9절을 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 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사도가 The Lord is not slow!라고 외치는 이 장면은 그 당시 성도들이 하나님이 느리다고 생각할 만큼 한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빠름과 느림은 우리의 빠름과 느림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의 문제를 갖고 정서적 반응을 보이던 바울, 어쩌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설명을 필요로 하다고 여길 정도로 느리다고 생각하는 자신과 사람들에게 마지막 부분에서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2-36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과 지혜를 좁은 인간의 마음으로 이러쿵 저러쿵 왈가왈부하는 것이 우습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이 시대에 전 세계와 전 세대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며 그것을 소원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행진하고, 낙태를 일삼는 의사들과 유전자 조작을 꿈꾸는 과학자들을 응징하고, 조국교회가 우리시대에 부흥을 경험하고...이 모든 것들이 만일 그저 성경과 우리의 신앙의 일상과 교회사적 여정에 대한 성찰없는 발빠른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근육질적 기독교를 표방하는 것이라면 이것만큼 신앙을 왜곡하고 성경을 뒤틀리게 하는 것이 없다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느려 터진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고 그 깊이에 머리를 숙이는 자만이 겸손을 알고 융통성을 이해하고 관용할 줄 아는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하는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일상은 발빠른 하나님과 동시에 느려터진 하나님을 경험하고 관계하는 장이다.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댓글목록
다윗님의 댓글
다윗 작성일일상생활의 현실적 감각을 놓아버린채 신앙함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매일의 일상을 감사하고 더욱 소망하게 되는 것은 일상의 느리고 단조로운 순간들조차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과 동행이 드러나는 장으로 비로소 인식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