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의 신학과 영성 칼럼 3 > 여는 사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일상생활의 신학과 영성 칼럼 3 > 여는 사연

일상생활의 신학과 영성 칼럼 3

페이지 정보

작성자 1391
댓글 0 건 조회 5,078 회
작성일 07-09-23 22:52

본문

 

일상생활의 신학과 영성 칼럼 3

"성령을 받는 것"그리고 "성령충만"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요즘 어떤 분들은 성령사역, 성령운동이 제자훈련과 성경공부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강조는 가깝게는 60년대의 은사운동, 2,30년대의 오순절주의와 부흥운동에서, 그리고 멀게는 초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를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강조가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어떤 시대나 강조의 한계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모든 움직임이 그렇듯이 또 다른 극단으로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경향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의 저자이며 동시에 해석자인 성령이 아니고는 어떤 성경공부도, 어떤 제자훈련도 가능하지 않기에 성령사역과 제자훈련, 혹은 성경공부를 떼어 놓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강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극단의 선택의 여지를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성령을 인간의 지정의중에 특별히 감정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분히 성령을 강조하는 움직임은 열광주의적 경향을 띠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삼위하나님의 경륜속에서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며, 동시에 구원의 영이시며, 이 구속의 영은 새로운 창조, 혹은 완성을 이루시는 종말론적 영이시기에 단순히 인간의 인격의 단면으로서의 지적, 혹은 의지적, 정서적인 한 부분에만 영향을 미치는 힘이나 에너지 정도로 이해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삼위중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격이신 성령님을 축소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두 복음주의자인 죤스토트와 로이드죤즈의 성령받음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죤스토트의 견해인 성령을 받는 것은 처음 예수를 구세주와 주인으로 받아 들일 때 일어나는 사건이다(cf.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생각과 로이드죤즈의 견해인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을 수 있으며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경험이다라는 견해(cf.역시 사도행전의 고넬료, 사마리아신자들, 그리고 에베소신자들의 경험)는 이렇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짧은 지면에 논의를 다루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지만 저 개인의 견해로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죤스토트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요람까지 교회의 문화에 젖어 있던 영국의 상황속에서 자신이 믿는다고 여기지만 정작 생각과 삶이 변화되지 않는 자들을 향한 로이드죤즈목사님의 성령에 대한 강조는 그 역시 상황적 정당성을 가진다고 여겨 집니다. 둘을 함께 놓고 생각한다면 엄밀한 의미로 이들은 신자가 아닌 셈이지요. 단순히 몇가지 영적원리를 진술하고 제자도를 계산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전도의 대중적 방법이 이런 현상을 더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콘스탄틴이후의 교회는 늘 이런 자칭 신자이나 성령을 모르는 사람들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과 성화에 있어서의 성령에 대한 강조는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 혹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 혹은 성령안에서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경적이고 적절한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단순히 열광적 종교행위나 교회안에서의 삶에만 국한된다면 창조세계에 편만하시고 교회안에서만 아니라 교회를 넘어서서 역사하시는 삼위하나님의 한위격으로서의 성령을 축소시키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성령충만은 장소적으로 교회당안에서만, 시간적으로 주일 혹은 종교적 프로그램안에서만 경험될 것이 아니라 매순간, 그리고 세상 어디에서나 경험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실존이어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만 국한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동행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일터와 삶의 자리인 가정에서 성령충만을 경험하며 성령과 동행할 때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인 교회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의 경험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 존경하는 두 복음주의자인 죤스토트와 로이드죤즈의 성령받음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죤스토트의 견해인 성령을 받는 것은 처음 예수를 구세주와 주인으로 받아 들일 때 일어나는 사건이다(cf.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생각과 로이드죤즈의 견해인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을 수 있으며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경험이다라는 견해(cf.역시 사도행전의 고넬료, 사마리아신자들, 그리고 에베소신자들의 경험)는 이렇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짧은 지면에 논의를 다루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지만 저 개인의 견해로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죤스토트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요람까지 교회의 문화에 젖어 있던 영국의 상황속에서 자신이 믿는다고 여기지만 정작 생각과 삶이 변화되지 않는 자들을 향한 로이드죤즈목사님의 성령에 대한 강조는 그 역시 상황적 정당성을 가진다고 여겨 집니다. 둘을 함께 놓고 생각한다면 엄밀한 의미로 이들은 신자가 아닌 셈이지요. 단순히 몇가지 영적원리를 진술하고 제자도를 계산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전도의 대중적 방법이 이런 현상을 더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콘스탄틴이후의 교회는 늘 이런 자칭 신자이나 성령을 모르는 사람들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과 성화에 있어서의 성령에 대한 강조는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238건 16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원로그인

    최신글

    연구소후원

    접속자집계

    오늘
    1,161
    어제
    1,957
    최대
    3,984
    전체
    2,038,107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일상생활사역연구소 Institute for Everyday Life as Ministry
    주소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샘로 15(장전동, 해인골든빌라) 402호 (46240)
    협업공간 레인트리: 부산시 금정구 중앙대로 2066, 4층 (46214) 남산역과 범어사역 중간지점
    ☎전화 : 051-963-1391
    Copyright © 1391korea.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