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11장 1절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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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5-04-12 01:17본문
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11장 1절 19절 25041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적대하는 세상 속 교회의 운명에 대해
여섯째 나팔(8-9장) 이후 일곱째 나팔이 불기(11:16-19)까지 10장과 11장:1-15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진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10장은 이 시기를 살아가는 요한을 비롯한 성도들에게 “작은 두루마리”인 말씀을 받아 먹고 예언하는 일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면 11장은 이 시기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이슈를 다룹니다. “두 증인”의 존재가 핵심입니다.
본문은 에스겔서나 스가랴서의 묵시적 그림을 가져오고 있는데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로 측량하는 장면(cf.겔40-48장, 슥2장)이나 “두 증인(슥4장)”이 그렇습니다. 본문은 성전측량(1-2절)로 시작하고 하늘의 소리와 고백과 함께 성전이 열리고 지성소의 언약궤가 보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성전 측량의 의미를 생각할 때 도량형의 일종인 측량자는 다스림 혹은 통치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에서 성전과 제단은 측량하되 성전의 바깥 뜰은 내버려두라고 하시고 이방사람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BC 2세기에 성전을 짓밟은 것처럼) 짓밟게 허용하시는 것 역시 다스림과 통치속에 모든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5절 이하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을 때 들리는 하늘의 소리와 하나님 앞 스물 네장로들의 말들의 핵심 역시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 성전에서 주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지만, 땅의 현실은 성전의 바깥 뜰과 그 거룩한 도성은 이방사람들이 짓밟는 가운데 “두 증인”으로 등장하는 존재의 “반전에 반전에 반전”의 드라마가 중간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두 증인”을 많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교주로 연결시키지만, 4절에서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서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요, 촛대 두 개입니다”라고 정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촛대는 계시록의 맥락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며, 올리브 나무 두 그루는 스가랴 4장에 나오는 기름부은 자인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지칭합니다. 6절의 “권세”의 예시를 보면 비와 관련하여 엘리야, 물을 피로 변하고 재앙으로 땅을 치는 권세와 관련하여 모세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단서들을 종합할 때 한편으로 증언이 말씀과 관련된다고도 여길 수 있지만 여기서는 참된(cf.요8:17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증언을 하는 증인인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인 두 증인은 도성을 짓밟는 마흔 두 달(삼년 육개월은 7년의 절반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에 해당하는 1260일을 “상복을 입고 예언”합니다. 아마도 순교하고 핍박받는 동료들을 대신하여 예언하기 때문에, 혹은 메시지의 엄중함이나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의 죽을 형편 때문에 그 엄중함을 드러내는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땅에서 매고 푸는(cf.마18:18-20) 교회의 권세를 5절과 6절이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7절부터 13절까지의 두 증인의 운명의 반전과 또 그 반전의 반전은 마치 증인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처럼 여겨집니다. 증인이란 말의 이면에는 순교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참 증인이요 순교자이신 예수처럼 두 증인이 무저갱(아비소스)에서 올라온 짐승과 싸워 죽임을 당하고 시체는 안장되지 못하고 거리에 버려져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방사람,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 원수, 땅을 망하게 하는 자)”에게 볼거리가 됩니다. 아마도 그들의 증언, 즉 말과 행실, 그 존재의 의로움이 저들의 양심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괴롭혔다고 생각하고 이 죽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10절). “사흘 반”은 “삼년 반”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기에 아마도 현재 당하는 두 증인의 실패, 교회의 어려움과 환난, 실패가 상대적으로 금방 지나갈 것이라는 위로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사흘 반” 후에 에스겔 38장의 생명의 기운처럼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나와 다시 일어나는(부활) 반전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12절은 마치 인자이신 예수의 승천처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그 가운데 일어난 큰 지진(도시 십분의 일의 피해와 칠천명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십분의 구를 피하게 하시고 “남은자” 칠천명에 해당하는 소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가운데서도 보여주시는 자비를 봅니다)으로 인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결국 메시야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 짓밟힘을 당하는 가운데 있지만 참된 증인이자 순교자이신 예수님과 연합한 존재가 되어 참된 증언으로, 교회의 존재와 말과 행실의 의로움(상복을 입고)으로 세상 속에서 증언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로서의 교회, 증언 때문에 순교(적색,녹색,백색)를 마다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 속 증인으로서의 교회는 동시에 천상의 하나님의 통치, 다스리심을 보고 누리고 경배하고, 하나님의 깊은 곳, 언약궤를 보고 임재안에 거합니다. 이것은 순차적으로 미래에 있을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땅을 살면서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하늘의 소리와 광경을 경험하는 동시적 경험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나 함께 하늘에 앉히신(엡2:6-8, 골3:1-4) 교회로서 어떤 증언에, 어떤 순교에, 어떤 부활에, 어떤 통치와 영광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삶,일,구원 (3191)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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