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연구소 ELBiS Club 갈라디아서 1장 13절-2장 14절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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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작성일 16-09-28 01:20본문
ELBiS Club 갈라디아서 1장 13절-2장 14절 요약 160927
갈라디아서를 단순히 교리적인 논쟁의 책으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 편지를 쓴 바울이라는 사람에게 실망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심정은 사뭇 도발적이며 자기를 자랑하되 남은 낮추는 밥맛없는 사람으로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를 그 상황과 맥락에서 이해하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본문은 중요한 인사이트를 주는 일종의 자술서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그리고 이 바울의 자술의 부분을 통하여 우리는 바울이 경계를 넘어서는 선교적 관점에서 이방인 교회인 갈라디아의 교회들을 권면하고 있다는 점, 즉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관점에서만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회심직전의 상태에서 시작하여 회심직후와 그 이후 특히 유대교와 유대교의 영향에 여전히 놓여 있는 예루살렘 교회, 그리고 유력한 자(2:2,6)로 표현되는 사도들, 특히 야고보와 게바라 하는 베드로등과의 관계(전도팀의 중요인물인 바나바를 포함하여) 속에서 일어난 에피소드 들을 일종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사도행전 9장 1절부터 31절(cf 갈1:13-20), 그리고 사도행전 11장 19절에서 30절과 12장 25절(cf. 갈1:21-24), 13장부터 14장에 걸친 바나바와의 일차전도여행(여기서 루스드라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같은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생김), 그리고 15장의 예루살렘 회의(cf. 갈 2:1-10)와 그에 이은 바나바와의 안디옥에서의 결별등의 배경(cf.갈 2:11-14)을 찬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긴 이야기를 짧으면서도 구구절절하게 바울이 굳이 이야기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 어쩌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관점과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입장 때문에 입을 맞춘 것처럼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가 보면서도 동시에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그 할례문제를 극복하고 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 열리는 지를 사도행전의 기록이 말하고 있는 데 바울 역시 이 본문에서 그 흐름을 정확히 집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만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니 친한 베드로(게바라는 별명을 가졌기에 부정적인 뉘앙스 장면에서는 게바를 공식적으로 사도로 삼았다는 대목에서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듯)를 밟는 등 타인을 폄하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느낌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자술서의 취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지게 된 자유”(2:4)의 복음으로 인해 유대인의 할례를 고수하는 예루살렘 기독교의 한계를 넘어서서 이미 이방인에게 선교가 행해졌고 그리하여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생겼는데 다시금 그 경계안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이들 즉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2:4)”이 있으며 이들 때문에 유력한 인사들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팀이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더베 등에서 경험했던 유대적 전통의 경계를 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15장에서의 예루살렘에서의 회합은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의 인식의 한계와 전통과 문화의 경계 너머에서 하나님이 이미 먼저 일하고 계시고 교회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고 경축하고 동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그 박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장 6절 등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라고 바울을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복음은 이전 시절 복음의 핵심을 싸고 있던 껍데기를 새로운 시대, 경계를 너머 존재하는 이들, 교회에게 다시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 일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경계를 너머 복음이 확장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우리의 사고 한계 안에 하나님의 이런 경계를 넘는 일하심을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흥분하고 다소 거칠고 편협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선교로 넓어진 복음의 기회를 다시금 유대교적 종교제도와 윤리로 가두어 버리려는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길게는 크리스텐덤 모델의 교회 짧게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교회의 한계를 너머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포스트 크리스텐덤, 포스트 모던을 살아가는 시점에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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