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연구소 ELBiS Club 히브리서 8장 1절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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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작성일 15-09-11 01:32본문
ELBiS Club 히브리서 8장 1절 13절 150910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시작된 “대제사장 예수(기독론)”에 대한 논증에 입각한 권면은 나선형구조를 타면서도 그 핵심에 이르고 있습니다. 8장에서 저자는 그 요점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1절).” 이 선언이 가지는 함축은 8장 본문 전체가 기본적으로 가지는 입장인 두 가지의 대조, 즉 하늘의 보좌를 의미하는 “참 장막”(2절)과 그 그림자요 모형으로서의 “모세가 지은 장막”(5절), 그리고 “새 언약”과 “첫 언약”의 대조(6절-13절)의 핵심을 드러내는 6절의 진술(“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과 함께 당대와 현재의 자신감을 잃고 살아가는 일상적 그리스도인에게 말그대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비교와 대조를 통해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아마도 8절 이하 12절까지의 예레미야 31장 31절부터 34절에 걸친 인용구를 이용한 “첫 언약과 둘째 것(7절)”즉 새 언약의 비교를 하는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절에 의하면 모세와의 첫 언약은 돌에 법을 기록했지만 새 언약은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11절에 의하면 새언약에 속하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주를 알라”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cf.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12절에 의하면 새언약 관계속에서 하나님은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분명 새 언약은 첫 언약에 비해 “더 좋은”것인데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던 히브리서 독자들은 현상적인 죄와 불의의 문제 때문에 스스로 당황하며, 그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의지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고 구체적이기에 안전하게 느껴지는 율법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짜파게티를 먹고 그것이 진짜 짜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진짜 짜장면을 줘도 짜파게티를 달라고 하는 것처럼, “낡아지게 하신 것” “쇠하는 것”(13절)인 율법과 모세의 장막과 제사장 직분으로 상징되는 옛 종교체제 안으로 다시 편입하려는 독자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더 좋은” “더 아름다운”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일상적인 자신의 삶과 주변에 휘둘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죄책감과 수치심의 문화속에서 늘 두려움과 불안함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이런 죄책감과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예축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해결책, 그런 프로그램들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가고, 집회를 찾아가고, 상징과 아이콘을 찾아가서 유익을 얻지만 모형과 그림자에서 머무를 뿐 본(本)(5절)뿌리, 실체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치유집회를 좇아 다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치유집회를 순회하는 것처럼... 히브리서는 이미 더 좋은, 더 아름다운 중보자가 우리에게 있다고 선언합니다. 붙잡아야 할 근본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되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보좌에 있다는 말로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합니다(cf. 엡 2:6, 골 3:3). 죄책감과 수치심은 그 눈에 보이는 현상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대제사장”과 우리가 함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생각과 마음에 법을 새기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새 언약의 영, 성령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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