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장 #1, 2009년 9월 22일 > ELBiS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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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신대ELBiS 갈라디아서 1장 #1, 2009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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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선약수
댓글 0 건 조회 9,979 회
작성일 09-09-2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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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iS Club 침신점
「갈라디아서」 1장, 첫번째 모임 (2009-9-22 Tues.)
  

2학기를 시작하며 조그만 걱정이 있었습니다. 다시 일상생활성경연구모임을 할 수 있을까, 늘어나는 학업량 때문에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번 학기는 성경연구모임 안하냐?’며 먼저 물어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모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새롭게 함께 하신분들도 많아서 첫 모임은 8명이 북적거리면서 시작했습니다.

모임이 크게 부흥(?)하다보니 사소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관찰하다보니 너무 많은 질문이 쏟아져서 원래 살펴보기로 했던 본문을 제한된 시간에 다 살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모임에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1장을 연구하기로 결정한후 몇 가지 질문에만 대답을 찾아갔습니다.
 

1. 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그렇게 강조했나? (1v)

많은 영어성경은 1절을 ‘Paul, an apostle’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자신의 사도됨을 강하게 언급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했던 문제라는 것입니다. 왜였을가요? 가르침의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도의 권위가 필요했을 것이며, 어쩌면 하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한 뜨거운 감격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a절의 방식으로(사람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생각해 볼 때, 바울의 고백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주로 예루살렘 교회로 추정되는)의 공인을 거쳐서 세워진 것과 달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부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을 사도의 직무로 보는 사도행전 6장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내용은 오늘날 소위 말하는 ‘사역자’로 부름받았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바꾸어 말하면, “사역자를 세우는 공식적인 제도(신학교, 목사안수 등)를 통과한 ‘교회 사역자’만 사역자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업적인 사역자를 중심으로 계층구조(hierarchy)를 이루었던 중세 교회를 개혁하고자 일어났던 개혁자들의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었습니다. 특정한 계층, 특별한 신분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이것은 나와 약혼관게에 있는 나의 서간이요 나의 캐티 본 보라(Katie von Bora, 루터의 아내)”라고 말했던 것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바울의 사상과 거리가 멀어보였습니다.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력은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사역자’가 되기에는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이날 함께 말씀을 나눈 공동체에서는 ‘사역’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아서 결국 신학교라는 제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형제의 고백이 있었으며, 전도사 시취와 목사 안수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제도의 불합리함을 보고도 눈을 감아야 하는 교회 현실에 대한 가슴 아픈 비판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목회학석사(M.Div) 과정은 목사가 되기 위한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과정, 즉 ‘사역자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제도라는 자조적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나누는 가운데 바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다시금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해서 끊임없이 사도권을 의심받았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받은 진정한 사도의 정체성을 흔들림없이 주장했던 바울처럼, 신학생이나 전도사라는 외적 호칭과 상관없이 구원받은 모든 성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사역자’라는 것을 되새겼습니다.
 

2. 바울의 편지는 공동 저작인가? (2v)

2절을 보면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채 갈라디아서를 읽었을 때의 느낌은, 바울 한 사람이 갈라디아지역의 교회 전체를 상대로 외롭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홀로 편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바울과 함께 머물고 있는 어떤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만연한 개인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사역도 혼자서 하는 것인양 인식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사역(ministry)이 사역(私役, personal works)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역자(이날 말씀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의 사역자(일꾼)로 현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역’이라는 표현은 ‘교회 내부의 일’이라는 의미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가 보냄받은 사역자입니다)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혼자 성경연구를 하고, 혼자 설교를 준비합니다. 대중을 상대로 혼자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홀로 서고, 성도들 앞에 홀로 서는 사람이 사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홀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바울의 전도여행에는 동반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에도 함께 하는 공동체의 문안인사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역의 많은 부분 중에서 혼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공동체는 빠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연구해서 설교하는 일은 사역자 혼자의 일인 것으로 쉬이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연구의 과정은 성경을 기록한 원저자의 생각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리보다 먼저 그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했던 선배들의 기록을 참고하는 것으로 심화됩니다. 설교는 설교자 혼자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청중들과 교감하는 중에 이루어집니다. 결정적으로 흔히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신비적 교제 역시 삼위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자로 섬기는 전도사들에게도 신앙의 갈등과 고민, 사역 혹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자체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면의 소리를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속으로만 끙끙거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때문에 비슷한 일을 감당하며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는 신학생들간의 이런 공동체가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함께 귀기울이며, 서로의 삶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외롭게 사역하지 않았던 바울,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사역했던 바울의 본을 따라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3. 난데없이 왜 이런 구절이 삽입되었는가? (4-5v)

바울은 4-5절에서 갑자기 찬송을 드립니다. 인사말(1-3v)로 편지를 시작했으니 본론(6절 이하)으로 넘어가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보이는데, 갑작스런 찬송의 삽입은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소위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한 내용입니다. (정말 그런지 직접 확인해본 경험은 드물지만) 그동안 익숙하게 배워온 내용대로라면, 사도 바울은 굉장히 논리적이며 탁월한 글솜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던 바울은 유대교의 전통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제적 공용어였던 헬라어에 능통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라틴어(로마어)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바울과 자주 비교되는 못배운 다혈질 베드로(심지어 베드로는 문맹이었으며, 베드로전후서는 다른 사람이 베드로의 구술을 받아적은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초반부터 매끄럽지 못한 방식으로 편지를 쓰고 있을까요? 우리는 찬송(4-5v)에 뒤이어 나온 6절을 주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은혜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반응하고 있습니다. 한데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찬송의 가사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4v, 새번역)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찜찜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설명이라면 6절의 언급 뒤에 따라오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울텐데, 왜 굳이 앞쪽에 기록되어 있을까, 게다가 왜 찬송의 내용(5v)이 함께 있을까요?

함께 질문을 놓고 씨름하는 가운데 누군가의 입에서 “원래는 인사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본론의 시작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려다보니 감정이 북받쳐올랐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갑자기 찬송이 터져나왔던 것은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찬양을 터트리는 감정적인 예배자의 모습으로 바울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성만으로 하나님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치밀한 논리와 막힘없이 흐르는 언변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원래 하려던 말이 막힌채 찬양했던 바울의 경험, 말막힘과 찬양의 영성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줄 요약

은혜에 말 막혀 찬송을 부르는
거룩한 사명으로 보냄받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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