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ELBiS Club 전도서 7장 1절 29절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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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작성일 21-11-20 00:55본문
ELBiS Club 전도서 7장 1절 29절 요약 211119
지혜에 대한 양가감정 Authentic Wisdom
인생사의 부조리가 만연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은 인간의 삶의 헛됨(헤벨, 수수께기)을 처절하게 느끼게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미 2장 16절에서 “사람이 지혜가 있다고 해서 오래 기억되는 것도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라고 말하고 나서도 3장에서도 때를 이야기하면서 19절 이하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오늘 본문의 바로 앞 6장에서도 인간의 마지막 운명인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하는 데 바로 그 언급에 이어 7장 1절에서 4절에서 죽음(초상집)과 지혜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단연 7장의 주제는 18회나 반복되고 있는 단어인 “지혜”입니다. 1절에서 4절은 죽음과 태어남, 초상집과 잔치집, 슬픔과 웃음의 대조를 통해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5절부터 12절까지도 크게는 “더 나은” “더 좋은”삶의 추구와 지혜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잠언이 말하는 소위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같은 절대적인 무엇이라기 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따를 만한 지혜입니다. 특히 7절은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라고 하는 점에서 전도자가 말하는 지혜는 매우 무너지기 쉬운 어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지혜, 특히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좋은 것이며 생명을 주는 것이라서 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8-12절) 그렇다고 지혜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코헬렛의 입장입니다.
이 입장이 13절에서 18절에서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7장 본문에 “하나님”이 4회 나오는 데 이 구절에 3번 나옵니다. 지혜에 대한 양가감정은 바로 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가운데 두고 나누어 지는 감정일 수 있겠습니다. 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판(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 13절)에 순응하는 지혜는 18절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 즉 잠언이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지혜, “너무 슬기롭게 살”려고 하는 삶이 있다고 16절은 말합니다. 그것은 극단(“너무”4회)을 추구하게 합니다(18절). 19절에서 22절은 16절의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의 보충설명처럼 보입니다. 19절의 슬기로운 사람도 20절의 의인도 결국 다 욕먹게 되어 있다(21-22절)는 말입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23절부터 “지혜”에 대한 자신의 추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사물의 이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으려는 자신의 노력(23-25절)을 묘사하는 동시에 동시에 그 지혜를 깨닫는 사람이 없다는 것(26-28절)을 강조합니다. 여기 26절과 28절의 “여자”에 대한 언급이 현대의 감성으로는 매우 가부장적으로 다가오고 여성혐오적 발언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코헬렛의 시대를 고려할 때 특히 코헬렛의 청중을 생각할 때 이런 남성중심적 표현은 남성독자들의 입장과 처지, 남성의 귀에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하기 용이한 표현이었을 뿐 이것이 성서의 입장이라고 여겨 지나치게 받아들이거나 지나치게 거부하는 오류를 범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본문 전체의 맥락에서 진정한 지혜라는 것을 깨닫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전도자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보는 편이 더 나아 보입니다. 그렇게 지혜를 깨닫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29절)”라는 말로 지혜에 대한 담화를 마무리(물론 마무리에 8장 1절을 포함해야하겠지만)짓습니다. 이미 13절에서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코헬렛이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라고 구부리고 펴는 것의 대조와 평범하고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의 대조를 비교하고 있고 하나님과 누가의 대조와 하나님과 우리의 대조가 비교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결국 복잡한 인간의 지혜와 평범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지혜가 대조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떤 분은 전도서의 “지혜”담론은 잠언의 “지혜”에 대한 언급보다는 욥기의 “지혜”담론에 닿아 있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18절)” 참된 지혜(잠언이 이야기하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욥의 친구들이 지혜로운 자로서 무엇인지 복잡하게 인생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있는 욥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범하고 단순한 지혜를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14절)”라는 관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18절)”라는 태도,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29)”는 자각이야말로 참된 지혜, 하나님을 중심에 둔 지혜일 것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위드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지혜의 말들이 참 많습니다.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지혜의 말들을 무시하지도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고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말들, 극단에 치우친 허사들을 신뢰하는 것에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13절)”. 오늘도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missio Dei)을 생각할 수 있는 참 지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삶,일,구원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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