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13장 1절 18절 나눔 요약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5-04-26 01:44본문
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13장 1절 18절 나눔 요약 250425
The Reality : 황제 권력 숭배- 모방과 패러디로 점철된 생활과 신앙
요한계시록 13장은 베리칩, 바코드 논란을 불러일으킨 “짐승의 수, 666”으로 악명이 높은 대목입니다. 이런 선입관 때문인지 13장을 대하는 이들의 마음은 무섭고 압도당하는 느낌입니다. 압도적인 횟수(26회)로 반복되는 “짐승”이 무엇이며 그 특징과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본문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 선정적인 해석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계시록의 기록자는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1절)”과 “땅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바다가 혼돈의 상징이며 땅이 이미 12장에서 용의 지배하에 있지만 아무튼 이들 존재의 출처가 “하늘”이 아님에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짐승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 누군가를 모방 혹은 패러디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1절에서 10절까지 첫 번째 짐승에 대한 묘사는 다니엘서 7장 전체에 걸친 짐승묘사와 연속성(뿔열과 머리일곱, 왕관, 표범 곰 사자의 존재)과 비연속성(네 짐승이 한 짐승안에 녹아있음)을 가집니다. 다니엘서 7장의 짐승이 당시의 네 제국과 왕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계시록 13장의 첫 번째 짐승 역시 권세를 가진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정치참여와 관련하여 권세에 복종하라는 취지의 로마서 13장과 권세가 용에게서 주어진다는 계시록 13장의 균형을 자주 이야기한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많은 해석가들이 이 본문이 기록되고 읽혀질 당시의 로마 황제, 특별히 “네로 카이사(이름을 숫자로 파자하면 666)”와 본문에 나오는 짐승의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 로마 황제와 황제숭배를 이 본문의 배경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두 짐승의 묘사된 하는 일이나 특성이 성자(1-10절)와 성령(11-17절)을 모방 혹은 패러디하고 있다는 느낌을 통독할 때 받았기에 그런 관점에서 다시금 본문을 자세히 살피게 되었습니다. 12장의 용이 하늘을 지배하려 하여 성부 하나님의 권세를 모방하려 했다면 13장 1절의 용(12:3)과 똑 같이 뿔열과 머리 일곱에 왕관을 쓴 첫째 짐승은 다니엘서 7장 13절의 인자이신 성자가 보좌로부터 받은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모방, 패러디하려 합니다. 원래 성부 하나님이 성자에게 주신 것을 용이 첫째 짐승에게 주는 모습이나 인자의 들리심으로 치명상을 입은 듯 하다가 상처가 나은 것(부활을 패러디하려 하나 완전한 죽음이 아닌 치명상에 그친)을 보고 사람들이 따라가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는 모습 역시 주이신 예수에 대한 경배를 모방,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들의 모방과 패러디의 목적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늘에 속한 것을 모독하려는 것입니다(5-6절)만 그들의 권세는 정한 기한, 7년에 비교하여 짧게 느껴지는 42개월(3년 반)에 그칩니다. 그 기간동안에는 예수만이 받으실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찬탈하여 모방하고(7절), 예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땅위에 사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는 패러디를 진행합니다(8절). 이 묵시를 듣는 사람들(귀가 있는 사람들9절)이 들어야 할 권고가 있습니다. 기간이 짧게 정해져 있지만 그 기간동안에 사로잡혀 가기도,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기도 할 것이기에 죽음 이후에 몸의 부활(죽음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 있다는 믿음과 그에 근거한 오래참음, 인내가 필요합니다(10절).
둘째 짐승에 대한 모양 묘사는 아이러니합니다. “어린양처럼 뿔이 둘 있고, 용처럼 말을 하(11절)”는 존재는 계시록 5장 6절의 일곱 뿔과 일곱 눈(살피는)을 가진 보좌에 계신 어린양과는 다른 존재이면서 용의 말(12:9 온 세상을 미혹하던 자), 즉 미혹하는 말을 하는 존재를 지칭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둘째 짐승을 로마의 권세와 왕 숭배를 미혹을 통해 북돋우는 식민도시의 지도자들 혹은 각종 지역 종교의 거짓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로마에서 먼 식민도시들의 지도자들은 더욱 로마와 황제숭배에 충성심을 보이려고 속주의 시민들을 들볶았습니다. 이런 일에 종교 지도자들 역시 크게 복무하였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했던 행동이나 특성을 묘사하는 오늘 본문 12절부터 18절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 앞 본문과는 대조 댓구를 이룰만큼 성령의 특성과 하시는 일을 모방, 패러디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성령은 성자를 대신하여 오셔서 언제나 예수를 전하고 높이십니다(요14-16장). 이처럼 12절에 의하면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권세를 행사하며 첫째 짐승에게 절하도록 높입니다. 성령은 큰 능력으로 불로 강림하셨고 때로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섬기게 만드시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14절에서 16절까지에서는 둘째 짐승이 “큰 기적”과 “능력”을 패러디하지만 첫째 짐승인 세상 권력을 우상으로 삼도록 사람들을 미혹하고 결국은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된 우상과 관련한 종교적 판타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죽음을 경험하게 합니다. 특히 이런 우상숭배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합니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인을 치시는 분이셔서 성령의 인을 통해 믿는 자들과 온 피조 세계가 구속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표가 되십니다. 그러나 15절에서 17절의 둘째 짐승이 하는 사람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 일은 이런 성령의 인, 성령의 표를 흉내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17절).” 이 부분을 근거로 절대로 문자 그대로의 도장을 몸에 새기거나 어떤 숫자를 의미하는 물건을 심으면 안된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대목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묘사요 고발입니다. 가는 속주마다 황제의 이름과 형상을 만들어 놓고, 무엇보다도 거래에 사용하는 화폐에 이름과 형상을 주조하여 사용하던 로마의 황제숭배 행태에 대한 고발의 대목입니다.
이런 일상생활에 깊이 새겨진 황제숭배, 권력과 물질숭배의 문제 앞에서 당시의 성도들은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하지 않고 그 안에서 고민하며 살아갔습니다. 고린도 교회안의 우상의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그런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문자적 해석을 통해 죽음으로 저항하거나 끝까지 격렬히 투쟁하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헤쳐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18절).” 이렇게 말한 후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를 이야기합니다. “육백육십육(666)”은 정확하게 삼위 하나님을 숫자로 표기한다면 가능한 칠백칠십칠(777)의 모방, 따라하기, 패러디입니다. 권력과 물신을 추구하는 로마 황제 숭배가 성도의 일상생활에 주는 긴장이 크고, 그것 때문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의식주와 같은 일상다반사에 불편함과 숙고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성도들의 지혜는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하거나 노심초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가 대단한 것 같고, 매우 그럴 듯 하게 미혹하는 짐승들이 하는 것을 모방과 패러디, 따라하기로 알고 웃어 주는 것입니다. 위폐를 잘 고르려면 진짜화폐로 훈련하여 분별하는 것처럼 더 성 삼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패러디의 영, 패러디의 종교, 패러디의 세상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따라하기, 패러디하는 짐승은 굳이 로마제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와 권력이 게제되지 않는 삶의 자리는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스스로 인자의 권세를 가지려는 이들이 있고, 그런 이들은 두둔하고 거짓으로 미혹하고, communication 홍보와 매체를 통해, 언론을 통해 성령의 교통을 모방, 패러디하는 세력들을 지금 우리 시대에도 보고 있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대형교회일수록 세습을 통해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해, 혹은 외부와 세상으로 관심을 돌리게 해서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들을 합니다. 불안과 공포를 통해 배제와 혐오를 일삼는 거짓 선지자들, 미혹의 말, 용처럼 말을 하는 사람들을 21세기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코로나, 계엄을 거치면서 한국교회안에서 혹은 세계교회안에서 패러디하는 짐승의 수, 현실을 지각하는 인내와 믿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삼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삶,일,구원 (3191) 지성근 목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