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연구소 온라인 ELBiS Club 시편 3편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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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작성일 20-10-17 15:23본문
온라인 ELBiS Club 시편 3편 요약 20201016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를 가진 시편 3편은 확신(orientation-reorientation)을 품은 탄식(disorientation)의 시편입니다. 표제가 암시하는 이 시의 역사적 맥락은 사무엘하 15장에서 17장에 이르는 다윗왕의 파천 [播遷] 장면(혹은 몽진 [蒙塵]이라고도 하는)입니다. 일국의 왕이 수치스럽고 무기력하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수치와 무기력을 더 극대화하는 것은 다윗의 상황이 업친데 덥친 가정의 깨어짐의 결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계 내에서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 다말을 욕보인 사건이 있었고 이것 때문에 압살롬이 친누이 다말의 복수로 배다른 형제 암논을 죽여 버리는 살육의 사건이 먼저 있었습니다. 도망갔던 압살롬을 용서하여 다시 받아 들였지만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봉합했던 문제가 다시금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는 현실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들”혹은 “원수들”이라고 비슷하게 복수로 표현된 반대자들은 사무엘하의 맥락에서 시므이나 아히도벨과 같이 다윗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반대하는 이들과 압살롬과 같은 존재들 뿐 아니라 다윗의 수치와 무기력을 빌미로 공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다윗을 반대하고 제거하려던 이들을 다 포괄하는 총체적 세력입니다. 시인은 1절과 2절에서 세 번이나 이 세력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나(3절)” 시인은 매우 즉각적으로 3절부터 과거를 근거하여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전망합니다. 4절과 5절, 그리고 7절의 하반절의 시제는 과거입니다. 4절은 과거에 환란 중에서 탄원하는 기도에 “거룩한 산(cf2;6)” 하나님의 거소에서 응답해 주셨던 일의 회상입니다. 5절은 수많은 길바닥 경험 속에서도 잠을 자고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의 회상입니다. 우리 중 한 분은 이 상황 속에서도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인 표현인지에 대해 매우 공감하였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이런 상황속에서도 평안을 누린다는 암시인 동시에 거꾸로 불안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 중 하나가 잠을 자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일상적 경험인 셈입니다. 7절은 현제적 상황에서 구원을 간구하면서 그 근거로 과거의 경험을 다시 듭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저들의 얼굴을 후려갈기소서, 이쪽저쪽 귀싸대기를 올리소서, 주먹으로 아구창을 날리소서!”라고 현재형으로 신랄하게 표현합니다만 NASB는 이 부분을 과거의 경험으로 이야기합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구하는 셈입니다. 이런 과거의 경험이 겹겹이 쌓여 있는 다윗의 인생의 시점에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실제로 사무엘하 15잘에서 17장 그리고 그 후에 일의 처리의 장면들을 보면 다윗은 전전긍긍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속에서 두려움 없어 보입니다. 3절의 “주님, 주님은 나를 에워싸주는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들에 하시는 분” 현재형 고백이나 6절의 미래시제의 표현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가 바로 그 방증입니다.
시인은 마지막 8절에서 일인칭단수에서 삼인칭복수로 탄원을 확장합니다. “구원은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시인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과 연결시킵니다. 왜 하나님이 다윗편이 되셔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콩가루 집안 수치와 무력함의 대명사가 된 다윗을 붙들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다윗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맥락을 넘어 시편 자체의 맥락으로 이 부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이 바벨론포로라는 수치스럽고 무력한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시편 1편과 2편에서 “복있는 자”가 누구이며 “복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시라는 장르를 통해 암송하고 노래하는 행위를 통해 그 대답을 찾고 전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편 3편에서 15편에 이르는 탄식의 시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탄식의 상황속에서 나오는 시속에서도 시편 1,2편에서 이미 결론적으로 제시하였던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 혹은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복”이 “주님의 백성에게” 내려주시는 복으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수치스럽고 무력한 상황들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코로나 상황속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은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다”라고 비난하는 원수들의 표현이 정곡을 찌르는 것같이 느껴지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수치스럽고 무기력한 시절에 시편 3편을 통해 우리는 “그러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받습니다.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고 시간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십니다. “주님의 백성”의 편에서서 복을 누리고 마침내 복을 끼치는 그런 자리로 나아가기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두려움없이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길을 걸을 수 있기를....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몸을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간구속에서 이 시기를 잘 견뎌 낼 수 있기를...
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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