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5장 1절 14절 나눔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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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4-12-21 00:37본문
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5장 1절 14절 나눔요약 241220
어린양의 대관식-제국의 내란음모를 전복하는 천국의 전망
4장에 이어 보좌 앞 장면에 특이한 모습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동시에 네생물과 24장로, 그리고 많은 천사들은 물론이고 이제는 모든 피조물과 만물의 코러스가 들리는 감동적인 오디오와 파격적인 비디오를 요한이 경험합니다.
1절에서 5절에는 일곱 인을 찍어 봉한 두루마리가 등장합니다. 보좌에 앉아계신 분의 오른손에 있는 이 두루마리는 권위있는 칙령이나 모종의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아무나 볼 수 없도록, 자격을 갖춘 자만 볼 수 있도록 완전하게 인봉한 것이었습니다. 일국의 왕의 칙령도 왕이 원하는, 자격을 갖춘 자만 보고 시행할 수 있다면 하늘 보좌에 계신 분의 칙령은 그분이 원하는, 자격을 갖춘 자만 보고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슬퍼하며 울었던 것(4절)은 그 두루마리에 현재 자신과 성도들이 처해 있는 불안정과 불안함을 해소할 어떤 단서, 내용이 있을 것인데, 명확한 방향을 알려줄 그 내용을 알 수가 없고 그것을 알게 해 줄 책임있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때 장로 한 사람을 통해 요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격을 갖춘 책임있는 존재, 메시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유다지파(cf.창49:8-10) 다윗의 뿌리(cf.사11:1,10) 메시야가 자격을 획득(승리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 요한이 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어린양 하나였습니다. 6절에서 8절을 보면 그 어린양의 등장이 나옵니다. 분명 메시야로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상징하는 전지전능을 가지시며 특히 온 땅에 보냄받은 완전하신 성령과 함께 하시지만 동시에 살해당한 흔적이 있는 어린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양의 모습은 마치 단7장에 나오는 보좌와 인자의 등장이라는 그림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는 장면에서 우리는 왕(자)의 대관식을 연상하게 됩니다. 요한이 보는 것은 보좌 앞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리는 것, 경배하는 것,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9절이하 새로운 노래를 위해 준비한 거문고(harp)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지참하고 경배, 예배합니다. 여기서 그 고귀한 금대접에 담긴 것이 놀랍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온 땅에 보냄받은 성령을 통해 다 살피신다는 사실(6절)과 함께 현재 제국의 지배가운데 힘들고 슬프고 방향을 알지 못해 드리는 성도들의 기도가 그 분을 예배하는 예물이 된다는 사실이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의 묵시의 글을 읽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9절부터 14절은 삼중의 경배와 찬양의 노래입니다. “새로운 노래(9절)”라고 한 것은 아마도 4장에서 보좌에 계신 분께 드리던 노래와 구별되는 분에게 드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노래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메시야)의 자격있음을 노래합니다. 특별히 출애굽의 이미지들이 사용되고 있는 데 하나님앞에서 제사장 나라(출19:6)를 삼을 사람들을 그 죽음으로 값을 치루어 구속하여 사셨다는 사실과, 그렇게 한 목적, 목표가 그 제사장 나라로 땅을 다스리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많은 천사들이 화답하듯 수천 수만의 목소리로 어린양을 찬양하고(12절), 그 다음에 온 우주 피조세계 만물이 소리외쳐 찬양하는 데 이번에는 왕이신 보좌에 앉으신 분과 새로 등극하는 왕이신 어린양 두분의 만세수를 동시에 외칩니다.
이 엄청난 오디오비쥬얼 판타지 장면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복하려는 역모세력인 로마를 비롯한 세상의 제국의 내란음모 때문에 불안하고 슬프고 심지어 억류되어 있는 요한과 당대의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할 뿐 아니라 내란음모 세력들에게 확실한 왕권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므로 경고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이며 그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오늘 말씀은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혹 내란상태의 곤고함과 피곤함, 4절에서 슬픔으로 표현되는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난 전망을 보고 듣게 될 때 역모세력에 굴하지 않고, 어린양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판타지로 끝나지 않고, 혹은 천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늘도 온 땅에 보냄받은 일곱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보시고 소통하시는 경배받으실 어린양은 지금 여기서 드리는 신음, 성도의 기도를 제물로 받으시기 때문에 이 환타지는 오늘 여기 역사의 현장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일,구원 (3191)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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