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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Winter School 즐거운 망명자, 제임스 휴스턴, IVP, 2장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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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6,919 회
작성일 10-01-0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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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휴스턴, 즐거운 망명자, IVP, 2009

1부 기독교 신앙은 삶의 방식이자 새로운 정체성이다

2장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

기독교적 환상 체험의 특성

그리스도인의 신비 체험은 자신을 계시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곧 그분의 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그 사랑은 우리의 자기 의지를 변화시키고 인간적 욕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나님과의 씨름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셨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요1:48) 있었다. 이는 메시아에 대한 그의 기대가 당시 문화의 한계(자기 본위의 시각, 지상에 매인 제한적 욕구)에 갇혀 있음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하늘까지 이어진 계단을 오르내리는 야곱의 꿈을 염두에 두고 그분 자신이 천군의 주권자로 하늘과 땅을 초월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하게 되리라고 나다나엘에게 약속하셨다.(요1:50-51)

구약에서 꿈은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명확한 영역,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만나는 지대였다. 하나님은 꿈에서도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우리 존재의 핵심에 들어오실 수 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열려 있어야 하고, 꿈속에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꿈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거짓 꿈은 정죄되었다(신13:2-5,렘23:25-32,슥1);2). 그런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면 꿈의 중요성은 언제나 부차적이다. 하나님 말씀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 말씀의 권위는 어떤 정신적 환상보다 우위에 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실 거라는 보장이 담긴 꿈을 꾸고 나서 오히려 기도하지 않고 자력으로 살려는 유혹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많은 좌절을 겪도록 허용하셨다. 성난 형 에서와의 두려운 만남을 앞둔 시점에 천사와 씨름하다가 엉덩이 뼈가 어긋나 절뚝거리게 된 야곱은 영리하게 하나님을 몰아내는 강하고 자립적인 사람(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참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되었다.

우리는 자기 의지와 뜻대로 하려는 사나운 열망 및 교만과 씨름한다. 교만은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을 빼앗는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열려 있는 태도

하나님의 뜻에 열려 있기 위한 효과적 방법은 죽음을 숙고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죽음을 의식하면,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손에 영원히 안전하게 맡겨져 있음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을 우울과 절망의 원천으로 보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모든 상황에서 활기를 얻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쁨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에 관한 세 가지 상반된 상황이 있다. 첫째, 죽음을 현세의 모든 실존의 종착점으로 보고 가능하면 계속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둘째, 도덕적 죽음을 육체의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경우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만 활력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린다. 본성적 인격에 매여 있지 않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 자신을 죽이고 내려놓는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교리를 알면서도 이기심과 세상의 가치관과 탐욕스러운 소유욕에 빠져 비참하게 신음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 자멸적인 비극적 절망 상태, 즉 멸절만을 바라는 상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죽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후반부에서 죽음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리라고 말한다(살전 4:13-18). 변화되는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하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나다나엘이 "와서 보라"는 초청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초청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펼쳐 주시는 계시, 예수님의 승천을 볼 준비를 갖출 수 있다.

하나님의 개방성을 드러내는 승천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40일 후 승천하셨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과 부활, 승천과 오순절이 긴밀하게 이어져 역사의 진로를 결정하고 우주론을 바꿔놓았다. 인류의 역사, 곧 하나님의 이야기(이레나이우스)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위한 영광의 궁극적 표현으로 보게 해준다.

위르겐 몰트만에 따르면 라틴어 adventis에서 유래한 강림을 뜻하는 Advent는 미래가 나타나서 현재로 들어와 미래를 바꿔놓음을 뜻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1:4-5). 즉 하나님의 미래는 앞으로 나타날 일에 내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에 들어오시는 분께 내포되어 있다.

우리 삶의 많은 실패들은 일종의 죽음이다. 하지만 이런 불모 상태가 풍요로 바뀔 수 있고, 삶의 초월성을 이끌어 올 수 있음은 참으로 경이롭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삶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신비 체험은 독특하다

그러면 환상은 기독교 신앙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까? 우리는 왜 신비 체험을 경계할까?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20세기 초, 기독교 신비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오순절 운동 등 새로운 신앙 체험이 확산됐다. 이는 이성주의에 대한 문화의 반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신비주의에 한층 열려 있다. 자연의 추론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자연신학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계시가 가톨릭을 세 번째 범주인 신비주의 신학으로 자연스레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이 삼중 접근법을 거부한다. 그들은 자연이나 신비적 주관주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시가 그분을 드러내 준다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신비 체험이 하나님의 객관적 행하심을 위협하는 인간의 왜곡된 주관적 경험이 아닌지, 신비가를 계시의 소유자로 여겨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문제를 제기했지만 모든 신비 체험을 기독교적 사고와 어긋난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체험에 근거한 신비 체험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초자연적 생명을 주셨고 초자연적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셨다. 신비주의를 적대시하면서 그것을 지적 용기로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나님께는 제자들의 개인 삶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친히 개입하실 온전한 능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제도화된 기독교의 편안함에 습관적으로 안주해 버려서, 직접 개입하여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열려 있지 못하다.

한편 위대한 신비가들은 신비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전달자보다도 전달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신비 체험 자체를 탐닉하지 않고, 그들의 생애에 나타난 윤리적 결실을 내놓음으로써 신비 체험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담대히 선포하며,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체험을 자리매김한다.

특별한 하나님 체험을 했을 때, 우리의 인격적 반응과 그 체험이 우리 자신과 사람들에게 끼치는 유익만이 그 타당성을 가리는 시금석이 된다.

신약성경의 타자에 대한 개방성

그러면 여기에서 신비를 아는 의식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의식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자.

과거 인간의 의식은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것보다 투과성이 더 좋았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합리주의 사상이 퍼지면서 우리는 내면에 갇혀 버렸고, 무엇이든 고치려 드는 기술 중심적 욕망의 가세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천사와 기적과 축사(逐邪)와 종말론적 꿈에 대한 신약성경의 기록을 보면, 고대 후기에는 실재의 영역 사이의 경계가 보다 유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클라우스 버거에 따르면 성경 시대의 정서는 타자의 차원에 대해 뚜렷하게 열려 있었다. 타자는 과거의 봉인에서 풀려나 현재에 잠복해 있는 미래, 즉 표면 바로 아래 놓여 있는 가능성이었다. 종말론적 현실, 기적, 환상, 새로운 계시도 가능성이 있었다. 기적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다른 영역이 존재한다는 표시였다. 따라서 자유주의 학파가 시도한 비신화화는 신약성경의 의식체계를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성경 시대의 시각은 현대인의 의식보다 개인주의적․자족적․감정적이지 않았으며, 영혼을 무시하는 영육 이원론의 성격도 적었다. 자아가 다른 세계에 개방되어 있었기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비롯하여 우리에게 행하시는 그분의 사역에도 열려 있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죽음과 죄와 자아와 세속적 회의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유'를 추구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위해 고난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신약성경의 모든 신비한 사건은 한 명의 역사적 인물, 나사렛 예수와 이어져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모든 폭풍과 죽음의 위협을 이겨내는 자유를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 체험은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사건으로 남는다. 우리는 의심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분명히 일하시는 현실에 끈덕지게 참여하는 일"이다.(버거)

믿음은 평범한 삶과 가정사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믿음으로 존재가 통째로 바뀌어 버린 삶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삶과 인간관계를 새롭게 보게 되면서 기존 인식의 초점도 달라진다. 우리는 일상에 매이지 않고 현실의 장애물을 뚫으며, 이제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믿는다.

예수님은 신비주의 생활의 핵심이며 우리에게 새롭게 탐구해야 할 차원을 열어주신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가지 않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시듯 우리 역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세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영적 세계는 물질계와 나란히 존재할 뿐 아니라 물질계의 근원이자 영속적인 하부구조이다.(찰스 윌리엄스) 만약 그렇다면 인간들이 내리는 결정은 매우 중요하며 거기에는 영원한 결과가 뒤따른다.

천사들의 존재

성경은 천사 숭배를 금하지만 하나님의 사자인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한다. 천사들의 현존은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하며 그들의 활동은 하나님의 행하심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계시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육체가 없으되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며,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천사는 복음 사건의 결정적 순간마다 나타난다.(성육신, 부활 등)

토런스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천사는 영적 중요성'이 있다고 썼다. 천사들은 우리의 운명인 하늘의 영역을 증언한다. 천사들은 우리의 순례 길을 주시하면서 우리가 목적지인 천국에 계속 열려 있게 해준다. 그들은 또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 성경의 거룩한 특성을 거룩한 방법으로 지켜 가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적 기원이 있음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한다.

또한 천사들은 최고의 예배자다. 천사 사역의 역할은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주어 보좌에 앉으신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환상을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또 세계 모든 민족을 연합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섞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

우리 삶에는 성경과 예배의 신비뿐 아니라 섭리적 사건의 신비도 있다. 우리는 삶에 나타나는 천사들을 통해 감각과 불신의 베일을 꿰뚫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보살핌과 사랑에 열려 있을 때, 천사들은 그분의 역사를 선포하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명이 펼쳐진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빛 안에 살지 않는 사두개인 같은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들의 얼굴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예수는 어찌되었는지 묻는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되, 여전히 명백하고 유일한 분으로,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에 있다. 승천은 이곳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런 운명과 목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기다리는"(살전1:10)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실재와 외양, 예배와 우상 숭배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다

초월성에 대해 열려 있는 삶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역할을 살펴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질수록, 초월성에는 닫혀 있고 주관적 판단에만 이끌리는 상태에서 점점 벗어나게 된다. 주관적 판단에만 이끌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역사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도 충분히 살펴볼 수 없게 되며, 자기 안에 갇혀 버리게 된다. 우리 자신을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지평이 장엄하고 광대한 영원으로 넓어진다. 영원한 것을 엿볼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또한 늘어 가는 것이다.

성경이 없으면 영혼이 쪼그라드는 절망에 이르게 된다. 매일 성경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닫힌 자연적 생명과 열려 있는 영원한 운명의 통합을 유지해야 한다.

<내용 요약>

그리스도인의 신비 체험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을 빼앗는 교만과 씨름함으로써 하나님께 열려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열려 있어야 하며, 승천하시고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삶의 초월성을 인식해야 한다. 제도화된 기독교의 편안함에서 벗어나 직접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께 열려 있되 그런 신비 체험은 우리 자신과 사람들에게 끼치는 유익으로 그 타당성을 검증해야 한다. 합리주의로 닫힌 의식을 열고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열린 의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삶은 천사들의 존재와 사역 및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바른 인정과 이해를 요하며, 성경을 읽음으로써 초월성에 대해 열려 있고, 우리의 닫힌 자연적 생명과 열려 있는 영원한 운명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할 문제>

1. 초월성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닫힌 의식으로 사는 것에 기득권을 가진 제도권 교회나 선교단체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2.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투과성이 없는 의식을 강요한다지만 포스트모던 환경에서는 초월성이나 영적 세계에 대한 기독교 외적 강조가 매우 활발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기독교적 신비 체험은 지극히 자아중심적인 혹은 몰아(沒我)적인 포스트모던적 신비주의와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신비 체험이 하나님 말씀의 준거 안에서 이뤄져야 할 것과 동시에 윤리적 정당성 및 일상생활의 바람직한 갱신으로 이어져서 참된 자아을 형성하고 참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 영적인 것이 또다시 강조되는 시대에 기독교 신비주의의 길을 모색하고, 교회와 공동체의 역할을 생각해 보자.

3.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과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을 생각해 본다. 제임스 휴스턴은 모든 신비주의 생활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한다.(103면) 신비주의에 대해 성령을 강조하는 일반적 태도에 비해 특이하게 보인다. 이런 태도가 영성 생활에 있어서 어떤 실제적 차이를 가지고 올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께서 신비주의 생활에 있어서 어떤 역동으로 일하시고 우리를 만나주실까? 이런 질문이 영성 생활에 있어서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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