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ETT 요한복음 10장 1절-21절 요약 1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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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작성일 10-04-07 12:11본문
ETT 요한복음 10장 1절-21절 요약 100406
9장 말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맹인됨이 드러난 바리새인들에게 계속하여 예수님께서 많은(9장에 비교하여 9장은 주로 소경이 말하지만 10장은 주로 예수님이 말하심) 말씀을 하십니다. 특히 이 말씀은 그 배경상 에스겔 선지자(겔34장)나 예레미야 선지자(렘23장)의 양무리를 유리하게 만드는 거짓선지자들을 향한 유명한 논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이런 일반적인 배경적 이미지를 먼저 던지시는 대목입니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이 화두를 던지시고 이 화두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6절)에게 다시금 더 풀어서 7절에서 18절까지에서 내용을 확장시키는 형국입니다. 그러면서 setting image에 있는 개념들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먼저 “문”의 이미지를 사용하십니다(7절-10절). 이렇게 하시므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는 배타적인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문을 통과하지 않은 자는 모두 담을 넘을 수 밖에 없는 절도요 강도요, 그러므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도둑이기 때문에 그들은 죽이고 멸망하려 할 것입니다. 8절에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온 모든 자들(참 선지자들까지)을 지칭하는 것이라기 보다 일반적으로 목자가 문으로 오는 시간 전에 도둑들이 몰래 먼저 담을 넘어와서 문을 따고 양을 가져가는 그림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 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양으로 생명을 줄 수 없는(10절), 양으로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할 수 없는(9절) 도둑일 뿐입니다. (어떤 명분으로 자신을 목회자라고 주장하지만 “문”이신 예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자는 다 도둑입니다!)
11절부터 15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구원과 생명과 꼴을 주시는 분이신지 다시금 동일한 setting image를 활용하셔서 자신의 정체를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목자라고 주장하시면서 그것은 자기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11,15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대부분 목자들이 고용된 삯군이었기 때문에 주로 떼로 몰려 다니는 이리를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 버리던 상례를 들어서 양을 위해 목숨을 불사하고 돌보는, 구원하는, 생명을 주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자신이 하시는(혹은 하실) 일(to do)을 이야기하는 데서 보다 심도 있는 이야기로 논지를 이끄십니다. 14, 15절에서 선한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아는 것을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로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마치 나중 요한복음 17장에서 보게 될 perichoresis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16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에서도 그 유사성이 드러납니다.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라는 말의 “한”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7장의 “하나됨”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라는 말씀도 17장의 맥락을 가져와서 생각한다면 충분히 보내심(missional)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양을 위하여 버리는 구원의 행위가 삼위일체의 존재됨과 역동속에서 나온다는 것, 생명을 주는 구원과 꼴을 먹임이 자신의 독자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와 그 명령(계명)에서 나오는 것이며,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예수가 아니라면 그는 문이 될 수 없으며, 선한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버린 목숨을 다시 얻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주장을 통하여 원래의 setting image에서 훨씬 깊어지고 확장된 도약을 16절에서 18절에서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연히 유대인들의 의구심과 분쟁을 낳기에 충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삼위일체의 신비와 역동의 패러다임을 알지 못하면, 다른 말로 단일신론적 패러다임으로서는 다른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가 없고, 귀신들렸다고 하든지 이단이라고 하든지 어떤 모양으로든 거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기도 한 모양입니다.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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