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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Experiencing the Trinity) Summer School 제8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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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4,216 회
작성일 09-09-0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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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 분이 나타나실 때

앞의 두 장에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우주적 구속에 대한 큰 그림을 대략적으로 제시했다. 하나님은 이 세계 전체를 구속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옛 세상의 부패와 타락의 콘크리트를 뚫고 올라오는 새싹이다. 마지막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에너지의 폭발로 하늘과 땅이 드디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 부활은 바로 그 원형이자 근원이다. 그 큰 그림을 앞 장에서 살펴 본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와 합친다면 어떤 그림이 나오겠는가? 당연히 현재 예수님의 부재에 반대되는 예수님의 직접적 현존이 될 것이다.(203)

현재로서는 성령과 말씀, 성례전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부재중인 예수님이 우리에게 현존하신다. 그러나 언젠가는 예수님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204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반복해서 주장했던 주된 강조점은 그분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인데 두 단계의 주요 행동으로 살펴보겠다. 우선은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분이 심판관으로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205)

첫 번째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는 자신의 재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만 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겠다.

첫째, 예수님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재림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다니엘 7장의 맥락에서 고난 이후 자신의 정당성이 입증될 것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오다'는 내려오는 움직임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이다.(단 7:13) 맥락 속에서 볼 때 이 핵심 본문은 비록 예수님은 죽겠지만 그 이후에 오는 사건들(예수님의 부활, 성전의 파괴, 아버지께로 하늘로 가는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이 입증될 것이라는 뜻이다.(207)

둘째, 잠시 떠나면서 종이나 하인에게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의 돈을 가지고 장사하도록 하는 왕 혹은 주인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원래 예수님의 종국적인 재림 때까지 해야 할 임무들을 교회에 맡기고 떠나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들은 1세기의 유대교 세계에 속한 이야기이고, 그 때는 모든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즉시 알아 '들었을' 것이다. 즉 유배시대에 이스라엘 성전을 떠나셨다가 드디어 유배 후기의 선지자들이 말한 것처럼 다시 이스라엘로, 시온으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이야기로 말이다. 원래의 배경에서 보면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성전으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인간 안으로 그리고 그 인간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초림에 대한 것이다. (207)

만약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이 재림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면 재림에 대한 개념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간단하다. 나머지 신약성경에서다. 예수님의 정당성이 입증되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난 후에 교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라고 천사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비록 사도행전이 이 믿음을 자주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책의 내용 전체가 그 규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210)

물론 가장 주된 증인은 바울이다. 그의 세계관, 그의 신학, 그의 헌신은 모두 미래에 오시는 혹은 나타나시는 예수님 이야기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사건에 대한 그의 말은 종종 오해가 되었는데 특히 '휴거' 신학 지지자들이 그런 경우였다. 이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룰 때가 되었는데 먼저 종종 오해되는 또 다른 전문 용어 하나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겠다.

이 경우에 문제가 되는 단어는 헬라어 '파루시아'(parousia)다. 이 단어는 보통 '오다'로 번역되는데, 그 문자적인 의미는 '현존', 즉 '부재'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현존'이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바울 서신의 두 가지 핵심 본문(살전 4:15;고전 15:23)에 등장하며, 다른 바울 서신이나 신약성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단어는 물론 그 의미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종종 초대교회가 '파루시아'를 데살로니가전서 4:16-17(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고 사람들이 그분을 만나기 위해 위로 날아 올라가는 것)의 모습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정은 모두 틀렸다.(210-11)

한편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당시의 비기독교적 담론에서 두 개의 생생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의미 모두가 그 단어의 기독교적 의미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의미는 신 혹은 신성의 신비로운 현존이었다. 특히 신의 능력이 치유로 나타날 때의 현존을 의미했다. 요세푸스는 야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강력한 현존이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간혹 이 단어를 사용했다. 두 번째 의미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속국을 방문한다는 의미인데, 특히 왕이나 황제가 식민지나 지방을 방문할 때 쓰인다. 그러한 방문을 일컫는 단어는 '왕의 현존'(royal presence)인데 헬라어로 '파루시아'다.

두 가지 의미의 배경 모두 구름타고 날아다니는 사람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보게 된다. 또한 시공간의 우주가 곧 붕괴되거나 파괴될 것이라고 하는 암시도 전혀 없다.(211-12)

'파루시아'는 그것 자체가, 예수님이 실재이고 카이사르는 서툰 모방이라고 바울이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용어 중 하나다. 재림에 대한 바울의 신학은 예수님이 주라고 하는 자신의 정치 신학의 일부다. 다시 말해서 '파루시아', 즉 왕의 현존이라는 용어가 유대교의 묵시적 언어와 병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바울의 용법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것이 바울의 첫 청취자들에게는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 이후의 청취자들에게는 문제를 일으킨 것이 분명하고 특히 지난 세기에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4:16-17을 읽을 때 더욱 그렇다.(214)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해결하기 어려운 구절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본문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문자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가 고린도전서 15:23-27과 51-54절, 그리고 빌립보서 3:20-21에서 말한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214-15)

고린도전서 15:23-27에서 바울은 메시아의 '파루시아'를 죽은 자가 부활하는 때, 즉 그분의 현존하는 그러나 은밀한 통치가 최후의 적인 죽음을 정복함으로써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때로 이야기하고 있다. 51-54절에서 그는 예수님이 오실 때 아직 죽지 않은 자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은 변화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사건이다. 두 본문 모두에 나팔 소리와 죽은 자의 부활이 나온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그 때 살아있는 자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라고 말하는 반면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들이 "변화되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맥락상 꽤 분명하게 예수님과 카이사르를 대비시키고 있는 빌립보서 3:21에서 바울은 현재의 비천한 몸이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의 결과로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될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215)

그렇다면 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7에서 주님이 내려오시고 살아있는 성도들이 공중에서 사로잡힌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가 의도적으로 하나로 모으고 있는 세 가지 다른 이야기를 암시해 줄 수 있는 풍성한 은유를 찾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은 은유를 풍성하게 혼합하는 일에 능했다. 다음 장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그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임할 것이고 여자의 해산하는 고통처럼 임할 것이기 때문에, 술에 취하기 말고 깨어서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216)

바울이 여기에서 한 곳에 모으고 있는 세 가지 이야기는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나팔 소리가 울리고, 큰 외침이 들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자신이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본다.

그 다음에는 다니엘 7장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에서는 박해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일으켜져 구름 위로 올라가 영광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앉음으로써 이교도 적들 앞에서 자신들이 옳았음을 입증 받는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시고 있는 이 ‘구름 위로 올려지는’ 일이 이제 바울에 의해 현재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216)

바울은 충격적인 방식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잇을 정도로 은유를 혼합하여 이 두 개의 이야기를 함께 놓음으로써 우리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세 번째 이야기를 끌어올 수 있게 만든다. 황제가 식민지나 지방을 방문하게 되면 그 나라의 시민들은 도시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까지 나가서 그를 영접하게 된다. 백성이 황제를 만나면 그냥 성 밖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대하는 예우를 갖춰 그를 성 안으로 호위해서 들어온다. 바울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의 요점은, 대중적인 휴거 신학과는 달리 구원받은 신자들이 땅으로부터 떨어진 공중 어딘가에서 그냥 머문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의 요점은 돌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러 나갔다가 그분의 땅으로, 즉 자신들이 처음 출발했던 그 장소로 왕이신 주님을 호위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자적인 묘사가 아니라 매우 강도 높은 은유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그 의미는 빌립보서 3:20의 구절과 같다. 빌립보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듯이, 하늘의 시민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황제가 모국으로부터 와서 식민지에 온전한 위엄을 부여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구출이 필요하면 구출해 주고, 현지의 적들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16-17)

바울이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 몇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을 함께 모아 놓아야 비로소 ‘휴거’라고 하는 큰 그림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그 구절들을 심각하게 오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217)

이 수사학의 실체는 예수님이 직접 현존하실 것이고, 죽은 자가 부활할 것이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머지 신약성경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학은 정치적 권위자들과의 대결에서 비롯된 신학이다. 예수님이 이미 이 세상의 참 주님이시고 언젠가는 그렇게 증명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신학이다. ‘휴거’ 신학은 이런 대결을 회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기적같이 악한 이 세상으로부터 옮겨질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신학은 종종 영지주의적인 성격을 띠면서 사적인 이원론적 영성으로 기울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방임적 정적주의로 기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아마겟돈을 꿈꾸는 그러한 신학이 정치적인 현상 유지를 은밀하게 지지했는지도 모른다. 바울이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218)

바울에 대한 논의를 마치기 전에 중요한 한 쌍의 본문에 주목하기 바란다. 고린도전서 마지막에서 바울은 갑자기 아람어 문구를 하나 쓰고 있다. ‘마라나타’(Marana tha). 그 뜻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아람어를 사용하던 아주 초기의 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표현이다. 헬라어를 사용하던 교회가 아람어로 된 기도를 따로 만들어 냈을 이유는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주 초기의 그리고 바울 이전의 전통을 생각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도했던 것이다.(218)

두 번째로, 골로새서 3장의 매우 다른 본문을 보자.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간략하게 요약된 부활과 승천에 대한 바울의 신학이 현재의 기독교적 삶과 미래의 기독교적 희망에 적용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botan ho Christos phanerōthē)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로새서 3:1-4)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에 주목하기 바란다. ‘오다’ 혹은 복된 ‘파루시아’ 대신에 바울은 여기에서 ‘나타나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이것은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예수님의 ‘오심’을 마치 우주인처럼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생각을 탈신비화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에서의 약속은 예수님이 단지 현재 세계 질서 안에 다시 나타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가 될 그 때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이고, 우리가 그분 앞에 그리고 우리 서로에게 자신의 참 정체성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요한1서에 나오는 핵심 본문과 놀랍도록 가깝다.(219-220)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eanphanerōthē) 그가 강림하실 때에(parousia)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oupō phanerōthē) 그가 나타나시면(ean phanerōthē)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한일서 2:28, 3:2)

여기서 우리는 골로새와 똑같은 그림을 보게 된다. 비록 이번에는 ‘나타나다’와 ‘파루시아’가 사이좋게 나란히 오지만 말이다.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그분은 ‘현존’하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타나다’를 강조하는 이유는 비록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그분이 ‘오시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분이 현재 그분이 계신 그곳에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220)

물론 바울과 요한만이 이러한 것을 언급하는 저자들은 아니다. 계시록도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다’라는 단어 그 자체를 보게 된다. 계시록에서 성령과 신부는 “오라”고 말하며, 그 책의 마지막 기도는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이 곧 오시기를 바라는 기도다. 같은 주제가 그 책의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

약간의 변이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놀랍도록 일치된 관점이 우리가 아는 초기 기독교 전체에 퍼져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부활절이 예시하는 이 세상의 위대한 회복과 함께 예수님 자신이 직접 나타나셔서 이 세상 전체와 신자들에게 일어날 변화의 대행자이시자 모범이 되실 그 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고, 정말로 그 때는 아무 때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기대와 희망은 2세기와 그 이후의 세기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예수님의 ‘나타남’이나 ‘오심’에 대한 생각은 후대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비판적으로 그냥 전해 받은 전통이 아니다. 승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나타남 역시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예수님이 온전하게 제시되는 일의 핵심적 부분으로 여겨졌다. 그 부분이 없다면 교회의 선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부분을 제거해 버리면 온갖 것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 못지않게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고 우리도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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