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2025년 종교개혁기념주일 설교문 나눔-일상생활사역주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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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5-10-18 23:43본문
통상 종교개혁기념주일을 가운데 두고 두 주간을 <일상생활사역주간>으로 정하고 한국교회와 함께 캠페인을 벌입니다만 2025년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인 10월 26일로 사역주간의 첫날에 위치하는 관계로 "종교개혁기념주일 설교문"을 미리 한 주간 당겨 나눕니다.
이 설교문은 공동체가 함께 대독할 수도 있고 설교자가 아이디어 차원에서 활용해도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기리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시대 항상 계속되는 개혁의 과제(agenda)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위하여 이 설교문이 조금의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025년 종교개혁기념 일상생활사역주간 설교개요 제시
전체적인 착안점
종교개혁의 인간론
전적타락과 부패한 인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인 은혜의 필요
배경
로마 카톨릭의 구원관에 대한 교정을 위하여 이런 강조를 하게 되었음
경과
알미니안주의 경향에 대한 거부감
종교개혁의 인간론이 가져온 문제점
인간에 대한 극도로 부정적인 견해로 인해 하나님이 지으시고 그 형상으로 삼으신 인간의 고귀함을 자칫 놓칠 우려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충만한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가능하다는 이레니우스의 통찰을 놓쳐 버리고 지나치게 종교성에 치우치도록 만들어 일상의 삶의 영광스러움을 놓치게 할 수 있다.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중요한 신학적 씨앗이 종교개혁에 없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 이마고 데이
칼빈과 루터에서 보이는 이마고 데이
이마고 데이에 대한 세가지 관점
존재론적-조각상은유
관계론적-거울은유
종말론적-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이마고데이(Imago Dei) 의 회복과 미시오데이(Missio Dei)
시편8편
골1:15; 3:10
제목: 이마고데이: 훼손된 걸작, 회복되는 영광
본문: 시편 8편 4-5절, 골로새서 1장 15절, 골로새서 3장 10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골로새서 1:15)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로새서 3:10)
들어가는 말
‘나’라는 존재에 대한 끝없는 질문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고자 합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비단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때, 직장에서의 성과로, 혹은 자녀의 성공으로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으려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SNS에 비친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삶과 나의 초라한 현실을 비교하며 깊은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인간관계에서 반복되는 실수와 실패 앞에 서면 ‘나는 정말 가망이 없는 존재인가?’라는 깊은 자괴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실존적인 고민은, ‘과연 이 모습 그대로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라는 영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고민은 약 500년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종교개혁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선행, 고행, 헌금을 통해 구원의 점수를 쌓아야 했고, 심지어 ‘면벌부’를 돈으로 사면 죄에 대한 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팽배했습니다. 구원은 마치 우리가 평생 갚아야 할 거대한 빚과 같아서, 사람들은 늘 영적인 불안과 채무감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재발견했습니다. 그 진리는 바로, 인간은 그 어떤 노력과 공로로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인간론의 핵심인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사상입니다.
‘전적 타락’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죄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우리의 본성 깊숙이, 우리의 이성과 감정, 의지와 영혼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그 어떤 부분도 죄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선한 의도마저도 종종 이기심과 교만으로 오염되고, 우리의 결심은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절망이 끝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이 철저한 자기 인식이야말로 참된 희망의 시작입니다. 내 안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밖으로, 위로, 즉 하나님을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은혜’를 선포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수십억의 빚을, 채권자가 아무 조건 없이 탕감해주고 모든 빚문서를 찢어버리는 것과 같은 파격적인 은혜입니다. 이 진리는 당시 사람들의 영혼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벗겨주고, 참된 자유와 감격을 선사했습니다.
극단적 자기부정의 위험과 일상의 영광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은혜(Sola Gratia)’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치열하게 싸웠고, 후대에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적 선택을 강조했던 알미니안주의와도 논쟁하며, 구원의 모든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의 무능력과 죄성을 이토록 강조하다 보니 한 가지 신학적 위험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인간 자신을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틀 안에만 가두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의 고귀함과 잠재력을 간과하게 될 우려였습니다. “어차피 나는 죄인인데”, “내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어?”라는 패배주의와 영적 무기력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가 남긴 위대한 통찰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히 살아있는 한 인간이다 (Gloria Dei est vivens homo. The glory of God is a human being fully alive).”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의식에 짓눌려 무기력하게 사는 모습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충만하고 활기차게 살아갈 때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이 때로 우리의 신앙을 교회 안에서의 종교 활동에만 국한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우리의 직장, 가정, 사회—의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을 놓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월요일 아침 직장에서의 정직한 업무를 통해, 가정에서 자녀를 인내로 양육하는 모습을 통해,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손길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일상’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무대인 것입니다.
이마고 데이 하나님의 형상
그렇다면 이 양극단의 긴장, 즉 ‘전적인 타락’과 ‘인간의 존엄성’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 해답의 열쇠는 종교개혁가들이 그토록 붙들었던 성경 안에, 그리고 그들의 신학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보화와 같은 개념입니다.
훼손되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형상: 루터와 칼뱅의 통찰
‘이마고 데이’,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독특하고 존엄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면서도,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죄로 인해 이 형상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깊이 고뇌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거의 완전히 ‘상실되었다(lost)’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가졌던 완전한 의와 거룩함,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벽한 관계 그 자체였습니다. 타락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갔고, 이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죄의 형상뿐이라고 할 정도로 비관적으로 진단했습니다. 따라서 루터에게 구원이란, 우리 안에 남은 희미한 흔적을 닦고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옷,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으며, 구원이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장 강력하게 역설하는 관점입니다.
반면, 장 칼뱅은 조금 더 신중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그의 대작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해 “놀라울 만큼 기형이 되었다(frightful deformity)”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완전히 말살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not totally annihilated and destroyed)”고 강조했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의 형상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믿음, 의, 거룩함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인데, 이것은 타락으로 완전히 상실되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됩니다. 그러나 둘째로,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예술을 창조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능력과 같은 ‘자연적 은사’는 비록 죄로 심각하게 부패했지만, 여전히 ‘불꽃’처럼 인간 안에 남아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칼뱅에게 구원이란, 상실된 초자연적 은사를 회복함과 동시에, 부패한 자연적 은사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고 ‘회복(restoration)’ 해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강조점은 다르지만, 그들은 하나의 진리를 향해 있었습니다. 훼손되고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복구할 수 없으며, 오직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롭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절망과 동시에 위대한 소망을 줍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이 아무리 일그러져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본래의 아름다운 형상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선물 받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청사진을 향하여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세 가지 그림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훼손된 걸작’입니다. 마치 렘브란트나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명화가 오랜 세월 속에 훼손되고 오물로 뒤덮인 것과 같습니다. 그림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영광은 가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이라는 위대한 복원 전문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본래 모습을 한 꺼풀씩 회복시켜 가십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들린 존귀한 걸작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다시 정렬되는 거울’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세상에 반사하도록 창조된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거울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그 방향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비틀어 버렸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매일의 삶 속에서 이 거울의 방향을 다시금 ‘하나님의 아들이요,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리는(re-orienting) 작업입니다. 그분의 얼굴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라는 거울은 그분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반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의 청사진’을 따라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의 완성본이자,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blueprint)’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새 사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청사진을 따라 날마다 새롭게 지어져 가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가치관이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살아있는 벽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시편 기자의 찬양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생각하시고 돌보시며 “영화와 존귀로 관 씌우신” 존엄한 존재입니다. 비록 죄로 인해 그 영광이 훼손되었지만, 우리는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가치와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멈추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깨어진 형상, '이마고 데이'를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 개인의 구원과 안위를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위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선교, '미시오 데이(Missio Dei)'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미시오 데이'란 이 세상을 회복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이며, 하나님은 바로 회복된 당신의 백성을 통해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이마고 데이'의 회복은 '미시오 데이'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사가 되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정직과 성실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선교지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단지 안식처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천하는 작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는 모든 행위가 바로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 연약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일상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통로가 되게 하십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이마고 데이'가 '미시오 데이'로 이어지는 거룩한 현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형상을 새롭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만을 위한 삶을 넘어, 우리를 회복시키신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일상이 이 땅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동참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드러내는 선교적 존재로 살아가도록 힘과 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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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종교개혁기념 일상생활사역주간 설교개요 제시.pdf (115.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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