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톡톡크리스찬 #57 가난(2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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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작성일 10-02-09 12:21본문
부산 CBS 방송 -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2009년 2월 1일 방송분 준비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정한신 기획연구위원
주제 : 가난
* 참고자료
-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IVP, 2009
▲ 들어가면서 - 만연한 가난의 모습들
최근 아이티 지진 사태는 지진 피해 자체로 인한 안타까움에 더하여 극심한 빈곤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인하여 더욱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가난이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악화시키고 사람들의 최소한의 생존조차 어렵게 하고 있는 상황은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처해 있는 가난이라는 현상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9월 세계식량계획(WFP)은 지구촌의 기아 인구가 10억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고, 이는 세계 인구의 1/3에 이르는 27억명이 2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난의 모습은 일부 저개발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최근 발간된 「한국의 가난」(김수현·이현주·손병돈, 한울, 2009)이라는 책에 따르면 한국에서 빈곤층은 ‘공식 통계’로 15%에 이릅니다. 가난한 탓에 질병 치료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는 가구는 12%를 넘습니다. 또한 65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50%에 가깝다고 합니다. 국제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제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하고, G20 정상회의 개최를 앞두고 대통령이 가난한 나라를 돕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난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만연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일하면서도 가난한 상태에 있는 워킹푸어(근로빈곤층)가 비정규직 양산, 저임금화 등으로 증가하고 있고, 노숙인, 이주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탈북자 등 가난한 이들의 범주는 더 다양해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상태를 벗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고, 계층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빈곤 문제와 기아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성경과 가난
'경제적 균등' 혹은 공평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곧 하나님은 모든 사람 혹은 가족이 적어도, 품위 있는 삶을 살 만한 돈을 벌고 당당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땅, 돈, 교육)을 접할 수 있을 만큼은 균등한 경제적 기회를 갖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하에서는 성경이 가난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1. 성경과 가난의 다양한 양상
성경에서 ‘가난한 자’라는 말이 함축하는 일차적인 의미는 흔히 재난이나 어떤 형태의 억압에 기인하는 빈곤한 경제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어떤 사람들은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가르칩니다.(예: 잠 6:6-11; 19:15; 20:13; 21:25; 24:30-34). 물론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난한 자’에 대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재난 또는 착취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가난해진 자입니다.
2. 하나님과 가난한 자
하나님은 출애굽 등을 통해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학대했기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습니다.(암6:1-7; 5:10-15, 사10:1-3, 렘5:26-29)
또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한 직후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이 말씀을 읽으신 후에 예수님은 청중에게 이 성경 말씀이 지금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사명은 억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고 눈먼 자를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굶주린 자를 먹이지 않고 헐벗은 자를 입히지 않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마25:31-46).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셨으며 자기 백성들이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시기까지 합니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19:17)라는 말씀은 더욱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에게 돈을 빌려 드리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를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신 것은 다음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5-36,40) 그리고 또 이와 같이 경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
3. 하나님은 때때로 부자들을 멸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높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그리고 부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눅6:20-25) 이는 부를 창조하는 것이 악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이 부유한 자보다 가난한 자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가난하고 불우한 자들을 높이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두 가지 특별한 경우에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을 멸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가난한 자를 억압함으로써 부유하게 되는 경우이고 둘째는 그들이 가난한 자들과 나누지 않는 경우입니다(대표적으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억압한 부자들은 물론이요 그러한 국가 전체를 멸하십니다(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주요한 멸망 원인, 소돔의 주요한 멸망 원인(겔16:49-50)).
외국인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땀 위에 세운 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의 저변에 이러한 불의가 존재하지는 않은지, 그래서 우리나라도 하나님의 멸망의 경고를 받을 일은 없는지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4.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매우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들에게똑같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특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많이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위한 정의를 명령하는 구절이 각각 40여개 정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자신이 이같이 힘없는 자들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점을 매우 분명히 밝히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점심이나 저녁식사에 가난한 자들을 초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눅 14:12-14)
성경은 신자들에게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본받으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눅6:33-36)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과 관계를 맺을 때 본받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종교적 의식이나 신앙 고백에 상관없이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여호와를 예배하면서 힘없을 자들을 억압한 이스라엘을 비난하시면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6-17)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사58:3-7) 요한일서 3:17-1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경건한 말과 행동에 상관 없이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 가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방법
1.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진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북반구의 사람들이 부유한 가운데 더욱더 많은 물질적 풍요로 헛된 행복을 추구하다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 신앙의 성실함을 측량하신다'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무시했기 때문에,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죽어갑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진리보다는 현재의 문화적, 사회적 가치관을 따르는 이단에 굴복하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각종 광고는 우리가 풍요함을 누리고 수십 억의 가난한 이웃들을 무시하는 것을 마귀적일 정도로 확신있게 정당화합니다.
2. 부유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소극적인 모습을 합리화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풍요한 생활방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도 좋지만,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이유로 화려하고 세련된 교회 건물을 건축하거나 사치스러운 명품으로 집을 꾸미고 소비를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교회 건물을 화려하고 꾸미고 최고급 인테리어로 치장을 하고 좋은 좌석을 구비하는 것이 고급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난의 상태에 빠진 이들을 먼저 돕기 위하여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기를 포기하고, 진정한 필요에 따라 건물을 세우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고 가난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더 많은 소비를 하고 더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경기 성장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주는 등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경제 성장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부유한 생활과 소비를 위한 바로 그 돈을 직접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쓴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더 빨리, 그리고 실질적으로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힘쓰고, 이러한 복지정책을 추진하도록 제도를 만들어가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나서야 할 것입니다.
3. 소규모 대부금 제공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생계비를 벌기 원합니다. 그들은 건실한 가족, 일하고자 하는 의욕, 자부심, 성실함 등과 같은 엄청난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지만 도움이 필요합니다. 소규모 대부금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조그만 장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가난한 가족들읠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자립을 돕는 방법입니다.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수입의 1퍼센트만 소규모 대부금에 사용한다면, 가장 가난한 10억명의 생활 수준을 일 년 안에 50%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4. 전세계적인 식량 공유의 운동이 일어나도록 교회가 먼저 나서야 합니다.
전세계의 곡물 수확의 단 2%만 나누어도 세계의 기아와 영양 실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도널드 헤이) 이를 위하여 먼저 교회가 나서고 전세계적인 참여를 촉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계적인 빈곤문제 퇴치를 위한 각국의 노력이 있지만 이러한 노력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5. 보다 더 검소한 생활 양식을 개발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존 웨슬리는 마태복음 6:19-23에 관한 설교("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에서 이렇게 주장하고는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필수품'(즉 간소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 깨끗한 옷 그리고 자기 사업을 운영할 만큼의 생활 필수픔)을 제외한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수록 우리는 남부럽지 않게 품위를 지키며 살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깨뜨리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다른 이들에게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가정 차원에서, 교회 차원에서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의 경제적 생활 양식에 대해 토론하고 보다 검소한 생활양식을 만들어가기 위해 서로 도전하는 모임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검소한 생활 양식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로날드 사이더의 제안 참고)
(1) 이웃의 생활 양식을 문제 삼지 말고 자신의 생활 양식을 점검해야 합니다.
(2)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그 금식으로 인해 남은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눌 수 있습니다.(예: 북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1주일 점심 금식 운동 등)
(3)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 겨울에 집이나 사무실 온도를 섭씨 20도 이하로 유지하기
-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기
- 자전거와 카풀 제도를 이용하고 짧은 거리는 걷기
- 식기 세척기를 사는 대신 손수 설거지 하기
-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이용하기
(4) 소비주의에 저항하는 작은 운동들을 펼쳐야 합니다.
- 텔레비전 상업 광고 중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부적절한 광고를 비판하고 필요시 불매운동을 벌이기
(5) 공유할 수 있는 물건은 사지 않고 나누어 쓸 수 있습니다.
- 전기 기구, 공구, 스포츠 용품, 책, 자동차 등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기(검소하게 살기로 헌신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가까이 산다면 그렇게 하기가 더 쉬울 것임)
- 교회를 통해 공동 이용 물품방을 만들어 나누어 쓰기 (예: 톱, 캠핑 장비, 큰 사다리 등)
(6) 지위 때문에 지출하는 돈(소위 품위유지비)을 평가해 보고 지출을 줄여나가야 합니다.
(7) 옷에 대한 유행을 따르지 않기로 결단할 수 있습니다.
(8) 아이들에게 더 많은 물질보다는 더 많은 사랑과 시간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6. 가난을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공공정책과 구조적 변화를 촉진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단체나 정치인을 후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공정무역 제품을 이용하는 일에 힘쓰는 일도 이러한 구조적 대안 중의 하나입니다.
7. 우리의 재정 뿐만 아니라 재능을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재능기부)
의사, 농부, 목수들이 개발도상국이나 빈민가에서 봉사하는 것이나 대학생들이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이나, 미용학교 학생들이 미용으로 봉사하는 등 이러한 나눔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창의성과 열정을 가지고 우리가 가진 재능을 나누기로 결단하고 이를 실천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 나가며
복음주의적 사회참여를 위한 시카고 선언(1973)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과 10억에 달하는 굶주린 이웃들 앞에서, 우리는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 수준에 관해서 우리의 가치관을 덤검해 보고 세계 자원의 정의로운 취득과 분배를 촉진해야 한다."
이러한 선언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고, 남과 나눌 때 기쁨과 행복이 넘쳐흐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바로 지금 나눔을 살아내고 실천하는 일이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 가난과 나눔을 생각하면서 드리는 기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만연해 있는 가난의 문제를 가지고 당신 앞에 나아옵니다. 우리 자신을 좀 더 부유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심지어는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 구조적인 악에 동참하였던 모습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부유하지만 나누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좀 더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살고, 재능을 나누고, 식량과 재화의 정의롭지 못한 분배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가 먼저 나서게 하여 주소서. 가난을 대물림하는 구조적인 악을 이기기 위해서 정책적, 제도적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자립하기 위한 이들을 돕는 기관들의 사역에 열매를 더하여 주소서. 주는 것의 기쁨과 나눔의 부요함을 누리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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