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일상사연 -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뭐라도 할 수 있다 > 일.삶.구.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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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2018년 3월 일상사연 -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뭐라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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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 건 조회 5,811 회
작성일 18-03-0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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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만 지나면 아이들 모두 개학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에 비하면 내일 하루 견디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니다. 다만 바로 다음날 다시 주말이어서 좋다 말았다.

아이들 운동화와 가방을 빨았다. 언제쯤 아이들이 커서 스스로 운동화를 빨까. 아니 그냥 세탁소에 3천원에 맡길껄. **(첫째) 운동화는 너무 낡았는데 새로 하나 사고 말껄…… 궁시렁 거리며 잘 지지 않은 검은 때를 빡빡 문지르고 있는데 점점 **(셋째)이가 욕실로 그대로 돌진해서 올 요량으로 성큼성큼 칭얼거리며 기어오고 있었다. 대충 헹구고 말았다. 역시나 깨끗하게 빨 수는 없다.

새학기 시작을 알리는 문자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에서 줄줄히 받았다. 아이들 개학을 두고 분주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약간 설레이기도 했다. 나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 속에서 생활하게 될 아이들…… 그리고 곧 봄이 온다. 아… 어떤 나날들이 보낼까……

- 하얀씨의 페이스북에서


하얀(가명)씨를 만났습니다. 네 아이(9세 남아, 6세 남아, 4세 여아, 7개월 남아)를 키우고 있는 하얀씨와의 만남은, 약속을 정할 때부터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 드라마틱했습니다. 저는 먼저 메시지로 인터뷰 참여 의사를 묻고 구체적인 일정을 정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통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와 울음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하얀씨는 저와 대화하는 동시에 아이들과 대화해야했습니다(솔직히 그것을 대화라고 불러도 되는지 지금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나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하얀씨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저녁식사를 마친 후 하얀씨 집 근처의 까페에서 만났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집에 두고 온 하얀씨는 정말 오래간만에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습니다. 하얀씨는 “아, 살빼야 하는데……”라고 말하며 작은 와플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살쪘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외모라 저는 “지금도 날씬하신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얀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임신하면서 쪘던 살이 잘 빠지지 않아서 예전에 입던 옷들을 입을 수가 없어요. 겨우 입을 만한 옷을 골라 외출을 할 때면 꽉 끼는 옷 때문에 여간 불편한게 아녜요. 조금 지나면 예전처럼 다시 살이 빠질거란 생각에 견디려고 했는데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저는 비록 임신도 출산해 해보지 않았지만 하얀씨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십대 때 사두었던 옷을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는 저 옷에 맞도록 다시 몸을 줄일 거’라고 십년 넘게 다짐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하얀씨는 최근에 누군가가 다이어트 동기를 불어넣어주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얼마전 주일에 작년 겨울에 입던 옷을 입고 교회를 갔어요. 조금 타이트했죠. 그때 누가 말했어요. ‘하얀아, 니 살찐 거 알제?’ 편한 사이인 언니가 이 말을 했으면 그냥 그려러니 넘어갔을 거예요.”


“응? 그리 편한 사이가 아닌 분이 하신 말씀인가요?”


“편한 사이인 언니의 남편께서 하신 말씀이죠. 진중한 목소리로 정확하게 지적하셨어요. 옆에 있던 언니는 아이 넷 낳고나면 당연한 거라고 말했구요.”


“아, 제가 남자를 대표할 순 없지만 대신 사과드릴게요. 저도 아내랑 이야기할 때 ‘사실 그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해주는게 진짜 사랑하는 거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때가 종종 있어요. 물론 결과는 말 안해도 아시겠지만…….”


“아기띠로 막내를 뒤로 업어서 뱃살이 여실히 드러났죠. 가릴 수도 없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어요. 밥을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뒤로 업은 걸 잠깐 후회하면서요. 그뒤로 며칠 동안 그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어요. 살을 빼려는 의지에 도움이 되었어요. 앞으로도 쭉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하얀씨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오늘 잠깐 우리집에 온 조카들 옷을 사러갔어요. 저도 바지를 두 개나 골랐죠. 한 치수 크면서 스판이 가득 들어간 청바지……. 그래도 엄청 타이트했어요(웃음). 일단 살을 한꺼번에 다 뺄 수는 없고, 그동안이라도 옷 다운 옷을 입어야 하겠고, 그렇다고 너무 큰 치수도 살 수 없고…… 다만 헐렁하면서 허리가 고무밴드로 된 바지는 이제 그만 입기로 했어요. 다이어트 하는데 별로 도움이 안되요. 어쨌든 임신하면서 찐 살은 건강을 위해서든 옷값 절약을 위해서든 뺄 수 있을만큼 빼야할 것 같아요.”


#남편이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다


본격적인 인터뷰로 들어가기 위해 나이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하얀씨는 “올해 마흔 한 살이구요, 육아와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은 자기도 (육아와 집안 일) 한다고 말해요. 아무튼 현재 월급 받는 직업은 없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월급을 받아아 ‘일’이라고 인정해주는 분위기니, 저는 ‘집에서 노는 사람’이 되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죠. ‘가사노동’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일’하는 것 같은데, ‘집안 일’이라고 해버리면 진짜 일이라는 느낌을 덜 주는게 현실이죠.”


“맞아요. 가사 노동이란 말은 보통 일상생활하면서는 잘 쓰지도 않구요.”


“평범한 일상이 무너진 시점, 예를 들면 재산분할이 필요한 시점에나 등장하는 말이죠.”


제가 농담을 하자 하얀씨의 웃는 얼굴을 보며 저는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가사노동, 혹은 집안 일을 하시기까지 거쳐온 여정이 궁금해지네요.”


“단순해요. 대학원 졸업하고 영어강사로 8년쯤 일을 했어요. 대학원 전공이 신문방송학이라 언론쪽 일을 하고 싶었는데 못했죠. 그래서 ‘뭐라도 하자’라는 마음에 영어 강사를 시작했어요. 강사 생활하다 결혼했고, 임신 5개월까지 일하다가 배도 불러오고해서 그만뒀죠. 그리고 계속…….”


“네 아이를 낳으셨군요.”


하얀씨는 미묘한 웃음을 띄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하얀씨가 슬쩍 넘어간 부분이 궁금해졌습니다.


“결혼 과정을 여쭤봐도 될까요?”


“남편은 저보다 세 살 연하예요. 원래 전 연하 남편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요. 가장 이해 못하던 여자가 연하 만나는 여자였구요. 남편도 그랬데요, 연상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저는 드라마 시청자가 된 기분으로 물었습니다.


“아니, 두 분 다 그런 성향이었는데 어떻게 만나게 되신건가요?”


“교회에서 만났어요.”


“아! 교회 오빠, 아니 교회 누나셨군요.”


하얀씨는 제 너스레에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대학생 때 훈련 받은 선교단체 간사님이 지금 남편을 두고 ‘너무 좋은 형제’라고 말씀하셨어요. 간사님은 그 뒤에 미국엘 가셨는데, 미국에서도 한 번씩 전화와서 ‘잘 되어가고 있나?’라고 물으셨죠.”


“그 간사님이 중간에 다리를 놔주신 건가요?”


“아뇨, 그런건 아니고…… 좋은 형제라고 이야기만 해주신거죠. 처음엔 별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자존심이 엄청 상했어요. 저는 배우자 만나는 거에 관해, 하나님이 ‘이 사람이 니 배우자다’ 이렇게 해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거예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할지 내가 알아봐야 하고……. 그런 과정이 힘들었죠.”


“아무래도 연상연하 커플이라고 하면 주위에서 입도 많이 댈테구요.”


“네, ‘세살 연하는 힘들다’는 말을 많이들 해서, ‘내가 왜 그 힘든 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6개월 동안 기도했어요.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해도 나랑 잘 안될 수 있으니 모두 내려놓고 기도드리려 했는데, 그렇겐 못했구요……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하나님께 따지듯이 기도했어요. 사실 그 동안 한 번도 이성교제를 안해봤거든요. 왜 하필 연하냐고, 그리고 왜 내가 먼저 알아보고 기도해야 하냐고 불만을 터트렸죠. 기도하면서 제 안에 있는 어떤 틀과 자존심이 깨지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울기도 했고(웃음). 그런데 그 깨어짐이란게, 단순한 이성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어지는 것이었어요. 기도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는 분이 아닌데…… 나는 기도하며 왜 이렇게 괴로울까?’ 그 와중에 ‘그렇게 니가 힘들면 저 사람 보내도 된다. 내가 좋은 사람 또 보내줄께’라는 말씀을 들었고 신뢰가 회복되었어요.”


“마음을 정리하신거네요. 한데 어떻게 결혼을?”


“마음을 정리했는데요…… ‘그런데 너무 괜찮은 사람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웃음). 그때쯤 미국에 계신 간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그분이 ‘그냥 니가 이야기해라. 보석을 못알아보면 그 애 손해다. 니도 나이가 서른이다’라고 하셨어요.” 하얀씨는 웃으며 “그 때 아니라고 했으면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주셨을 텐데 당시엔 거기까진 생각못했죠”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또 한편 고민은…… 개척교회였다고 했잖아요. 작은 공동체라서, ‘기도하며 이야기했는데도 잘 안되면 공동체에 계속 남아있기 힘들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있었어요. 좋은 사람은 맞지만 제가 무조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결국 목사님 사모님과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이야기하며 안하는 쪽으로 마음을 잡았구요. 그런데 사모님이 남편에게 ‘어떤 자매가 형제를 위해 6개월간 기도 중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면 찾아와라’고 하였데요. 사실 전 남편이 사모님 안찾아갈줄 알았어요. 당시에 시험도 하나 떨어지고…… 남편도 상황이 썩 좋은 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남편분이 용기를 내셨군요.”


“네, 남편은 무엇보다 제가 기도했다는 걸 존중해줬어요. 그리고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사람이 중요하다’라고 말했구요. 솔직히 저는 ‘자기가 좋아하는 간사님, 사모님이 추천해줘서 그렇게 이야기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괜히 제가 남편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았죠. 이른바 ‘알아가는 과정’을 보내는 시점에 제가 자꾸 피했어요.”


“아니, 그럼 알아갈 수가 없잖아요.”


“제가 좀 부담스런 것도 있었구요. 당시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많이 할 때였는데, 일촌신청이 왔는데 일촌명을 ‘영동(영원한 동반자)’로 했더라구요.”


“아, 뒤로 물러나실만하네요(웃음).”


“그때 같은 선교단체 출신 오빠가 고민 상담을 많이 해줬어요. 특히 ‘영원한 동반자’…… 남자는 관심의 표현을 그렇게도 할 수 있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너무 뒤로 물러서지 말라고 했죠. 특히 남자들은 누가 만나보라고 해서 억지로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이야기해줬어요. 그후로 데이트를 시작했고, 한 달 뒤 남편이 사귀자고 말했어요. 6개월은 걸릴 줄 알았는데 좀 빨랐죠.”


“기도의 힘인가요?”


“2년 사귀고 결혼했는데요, 남편은 제가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인줄 알고 결혼했는데 속았데요.”


하얀씨는 크게 웃었습니다.


남편 생일상을 제대로 차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이 생일 전날 출장 가면서 아이들 때매 내가 장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장을 보려니 배달시간이 너무 늦어서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있는 재료로 밥을 차려야했다.

전날 밤에 준비를 하려고 했으나 **(둘째)이가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셋째)이가 계속 깨는 바람에 뒤척이는 **(셋째)이를 재우다가 같이 잠들어버렸다.

아침에 부랴부랴 일어나 정신없이 밥을 하고 미역국을 끊였다. 팥을 삻아서 쌀과 같이 밥을 해야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재료가 없어서 잡채도 못하고 찌짐은 재료가 있어도 못했다. 찰밥도 늦게 되는 바람에 남편은 아이들 먼저 남은 밥으로 아침을 먹이고 나는 **(셋째)이 이유식을 먹였다. 그러고 난 뒤 겨우 식탁에 앉아서 둘이서 밥을 먹었다. 팥의 식감을 느끼면서.

연애 2년 결혼 8년 총 10년이 넘어가는 세월을 같이 보냈다. 아이들 중심으로 살다보니 서로의 생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살았다. 생일이라고 특별할 것 없는 똑같은 하루이지만 이제는 일부러라도 챙기고 싶어졌다.

미역국 끓이다가 옛날 생각이 났다. 연애시절 남편은 내 생일날 아침 일찍 우리집 앞에 와서 생일 축하한다며 마트에서 파는 즉석요리용 미역국을 주고 갔다. 꽃다발이 아닌 미역다발이라니…… 엄청 웃었던 기억이 난다.

마음만큼 생일상을 차리지 못해서 아쉬웠다. 마음 먹고 하려니 더 잘 안된다. 내년에는 좀 나아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도 한창 육아 중이여서 별반 다를 게 없을 듯. 그냥 평소에 잘 해야하나 싶다.

어쨌든 남편이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다.

- 하얀씨의 페이스북에서


#믿음의 가정


“말씀 중에 ‘자존심’이란 단어가 자주 나왔어요.”


하얀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하얀씨는 한동안 말을 멈춘채 자신의 내면을 탐색했습니다. 탐색의 시간이 끝난 후 하얀씨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자아상이 많이 낮았어요. 아빠의 직업 때문에…… 아빠는 건설현장 노동자셨어요. 전 그걸 되게 부끄러워했죠. 그것 때문에 자아상이 많이 낮았어요.”


하얀씨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구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못했어요. 제일 친한 친구에게도 말 못했죠.”


다시 침묵이 얼마간 이어졌습니다.


“사실 아빠에게 맞거나 폭언을 들은 적은 없어요. 아빠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셨어요. 다만 못 배우셨고…… 하는 일의 특성상 일만 하고 받아야 할 돈을 떼인적이 많이 있기도 했고…… 그걸 속상해하신 엄마랑 서로 싸우시고…… 사실 아빠가 저희들한테 그러신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줄 알았어요. 그걸 대학 가서야 알게 되었어죠. 대학생이 되고 선교단체에서 성장 배경을 이야기해보니까 장난이 아니었어요.”


하얀씨는 잠시 심호흡을 했습니다.


“내가 그걸 부끄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인식하며 내가 죄인이라는 걸 많이 생각하게 하게 되었어요. 저는 엄마 아빠를 제 기준으로 판단하고 제 가정을 부끄러워했어요. 엄마도 일하느라 늘 늦게 들어오셨어요. 자연히 우리는 방치되었죠. 전 그게 너무 싫었고, 그것 때문에 엄마를 판단하고 정죄했어요.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동생들에게…… (침묵) 동생들에게 쏟아냈어요. 때리고 심부름 시키고…… 많이 때렸어요. 동생들이 많이 울었죠.”


손님 없는 까페에는 음악 소리만 흘렀습니다. 저는 말없이 하얀씨의 이야기를 기다렸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선교단체 소식지 5월호에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의 상처나 뭐 이런 것들에 대해 신앙적으로 풀어내는 간사님의 글을 읽었어요. 그 글을 보며 생각할 수 있었어요. ‘나는 내가 가정에서 상처를 받았다고만 생각하지만, 상처받은 것이 내 죄성과 엎어져서 가족들을 정죄하고, 가족들에게 더 많이 상처 줄 수 있다’라구요. 그때부터였어요. 어설펐지만, 의무감에서라도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하얀씨는 커피잔을 만지작 거렸습니다.


“저는 늘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 공부한 것도 그것 때문이였어요. 엄마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런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가족을 바라보기 시작하며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내가 여기서 변화를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 새롭게 만들 가정에서도 똑같을 것’이란 생각이요.”


“지금 반복하는 실수는 상황이 바뀌어도 계속할 가능성이 높죠.”


하얀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부터 노력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하나님 믿으며 변화된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려고 애를 썼고, 복음도 전했어요. 바로 아래 동생이 군대 가기 전에 ‘누나가 많이 때려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아, 그런데 그 이야기가 너무 하기 힘든거예요. 성령님이 말하도록 하신 거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어요. 그 동생이 군대에서 교회를 가게 되었죠. 그리고도 막내동생이랑 1년 동안 가정을 위해 기도했어요.”


다시 하얀씨는 말을 멈추었습니다. 하얀씨는 흐린 눈빛으로 힘들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어요. 앞으로 3개월 더 사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엄마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3개월 더 사셨어요. 그때 아빠도 함께 기도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는 안다니시지만 마음으로 믿는다고 종종 말씀하세요. 우리보고 교회 열심히 다니라고도 말씀하시구요.”


하얀씨는 입으로 숨을 길게 들이마쉰 후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그때 결정적으로 생각했어요. ‘여기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라구요. 교회 친구들을 보면 권사님이나 장로님 자녀들이 많았어요. 소위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이었죠. 친구라서 친구 부모님들 교회에서 보면 인사는 했지만…… 부러운 마음이 되게 많이 들었어요. 남편도 그런게 되게 부러웠다고 하구요.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 변화가 없다면 나중에 저절로 믿음의 가정을 이룰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결혼한다고 저절로 믿음의 가정이 되는게 아니라…….”


“네. 돌아보면 후회되는 점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그때 그런 마음 먹은게 참 잘한 일이라고 자주 생각해요.”


하얀씨는 웃음지으며 말했습니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 제목이 두 가지였어요. 첫째, 내가 엄마아빠를 부끄러워 하는 마음 가진 걸 품어줄 수 있는 사람, 둘째, 하나님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신실하게 응답 받해주셨어요. 남편은 워낙 시골에서 고생하며 자라서 아예 그런 편견이 없었죠(웃음). 그리고 워낙 순수한 사람이라 하나님을 이용하고 말고 그런게 없었구요. 하나님은 기도 안한 것도 해주셨는데요, 남편이 5남매예요, 5남매가 다 잘생겼어요. 시골에서 자라 자기들이 잘생긴줄도 모른채 컸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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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가 그린 그림이다. 왜 내 이름이 가장 위에 있을까? 엄마의 파워 또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이가 대답한다.

“엄마가 제일 나이가 많잖아. 41살”

이 말에 우리 부부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남편의 레파토리.

“그래 엄마가 곧 50이지”

32살에 결혼할 때 곧 마흔이라고 쭉 놀렸다. 막상 그 나이가 되었을 때는 많이 들어서 그런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이제 41살인데 곧 50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앞으로 쭉 들을 말이다.

**(둘째)이 그림에서 엄마이름 다음에 나오는 그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마 남편이 늘 곧 마흔이라고 곧 오십이라고 엄마 나이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처럼 말하는 뉘앙스를 간파한 것 같다. 이런…

어쨌든 눈사람 얼굴이 몸보다 엄청 큰 이유는 적어야 할 가족 이름이 많아서이고 가족 중에 엄마 이름이 이마팍에 있는 이유가 나이와 더불어 제일 어른스러워서였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 하얀씨의 페이스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뭐라도 할 수 있다


“보통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아침 7시쯤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해요. 아침엔 간단히 콘프레이크나 주먹밥을 먹어요. 아니면 국에 밥을 말아주거나. 8시 20분에 둘째랑 셋째를 어린이 집에 보내요. 지금 방학 중인 첫째는 10시에 태권도 보내구요. 그렇게 차례대로 보낸 후엔 막내 이유식을 줘요.”


저는 ‘남편 나가는건 아예 이야기에서 빠져있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랬다간 ‘남자끼리 편들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을 거 같아 입을 닫은채 하얀씨의 일정을 계속 메모했습니다.


“애들 다 나가면 잠시 전날 못본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 봐요. 한 시간쯤? 음…… 12시까지 볼 때도 있구요(웃음). 1시부터 3시까지 막내 낮잠을 재우고 책을 좀 읽어요. 영어 공부를 하기도 하고, 피아노 연습도 좀 하고…… 피곤하면 저도 같이 자구요. 사실 요즘엔 피곤해서 거의 자게 되요.”


하얀씨는 멋쩍게 웃었습니다.


“아니면 그 시간에 책을 읽어요. 주로 독서모임이나 서평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일 때. 그러다보면 4시쯤 되어서 애들이 다 와요. 간식 좀 챙겨주고, 저녁 챙겨주고…… 막낸 이유식주고…… 애들 만화 한 시간 시청할 동안 그때 저녁 설거지하구요. 7시부터 같이 놀기 시작해요.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놀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보드게임도 하구요. 8시쯤 양치하고 잘 준비해요. 위에 애들 두 명은 서로 장난치다 혼나구요.”


“마무리는 저희 집이랑 비슷하네요. 모든 놀이는 ‘고함’과 ‘눈물’로 마무리 되죠.”


“네(웃음). 애들이 다 잠들면 보통 9시 반에서 10시예요. 그때부터 페이스북에 글을 써요.”


그러지 않아도 궁금했습니다. 하얀씨의 페이스북에는 언젠가부터 규칙적으로 짧은 글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얀씨에게 글쓰기의 계기를 물었습니다.


“원래 막연히 글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요. 1주일에 한 편씩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모임도 참석해봤는데, 글쓰기 실력을 높이는 거랑 상관없이 육아 스트레스나 가정(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글로 쏟아내게 되었어요. 저는 다 극복한 줄 알았는데, 글로 써보니 여전히 극복못한채 남아있었다는걸 알게 된거죠. 일년 동안 그런 과정을 보냈어요. 사람 만나서 같이 서로 이야기 들어주고……. 1년간 그 모임을 참석한 후 다시 1년을 보냈어요. 전 여전히 책 읽는게 좋고 글쓰는게 좋은데, ‘건덕지’가 없으니 안하게 되어버렸죠.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진짜 내가 이걸 좋아하나?’”


“글쓰기는 힘이 많이 드는 거라 좋아해도 ‘마감’ 같은 외부적 요인이 없으면 못할 때가 많죠. 저도 그래요.”


“그것도 그렇고…… 저는 원래 좀 계획적이예요. 이 시간에 이거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하는 스타일인데…… 그런게 잘 안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들한테 화를 많이 내게 되었죠. 둘째까지는 좀 그렇게 했어요. 셋째를 가지면서는 ‘아 이제 나는 아무것도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했구요. 그러다 셋째 낳고 글쓰기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셋째 낳은 다음에요? 그 바쁜 와중에 어떻게 가능하셨나요?”


“남편이 많이 도와줬죠. 모임있는 날은 남편이 다른 모임없이 매주 퇴근하고 일찍일찍 와줬어요. 학교(직장)엔 ‘아내가 산후우울증이 와서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핑계를 대구요.”


“절반의 진실이네요.”


우리는 함께 웃었습니다.


“글쓰기 모임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잘 풀려서 넷째가 생긴거라는 이야기 하신 분도 있었죠. 아무튼 ‘이젠 뭘 좀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던 즈음에 넷째가 생겼어요. 다시 포기했어요. ‘이게 내 숙명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러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뭐라도 할 수 있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음……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뭐라도 할 수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좀 풀어서 해주실 수 있나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하얀씨는 팔짱을 끼고 한참 생각하더니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글쓰기 모임 끝날 때쯤 임신사실을 알고 썼던 글(“인생은 알 수 없어서 재미있다?!”)이 있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게…… 결과물이 나오는 일(직업 등)은 아예 못하겠지만, 아예 전혀 다른 일, 예를 들어 페이스북 글쓰기 같은 작은 일이라도, 오히려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거예요.”


“‘업적으로 평가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까요?”


“네. 그 뜻이에요. 폰으론 그때 쓴 글을 못찾겠는데, 집에 돌아가면 보내드릴게요.”


하루 아침에 나의 모든 생각과 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느낌이 이런 것이리라. 인생은 오묘하고 아이러니한 순간들이 숨어 있다. 넷째를 임신한 것이다. 아이를 갖고 싶어서 임신 테스트기 확인하자마자 호나호하면서 부리나케 산부인과에 달려갔던 이전과 달리 확인한 순간 남편 앞에서 서럽게 울었다. (중략)

하지만 ‘이제 내가 계획했던 일은 아무 것도 못하는 구나. 건강한 아이를 건강하게 출산하기를 매일 기도하고 전전긍긍하며 2-3년을 보내야하는구나’ 여전히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듯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란 나의 자포자기도 결국 알 수 없는 것이다. 못할 수도 있지만 할 수도있다.  (중략)

한 번은 말 그대로 세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장단점도 각자 다르고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의 소유자들…… 각자의 성격대로 거실, 방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니 너무 재미있다. 물론 잠깐이다. 어느 새 **(첫째)의 큰 불만 어린 큰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둘째)이가 방해해서 제대로 놀 수가 없다고 난리다. 둘이 싸우는 소리, **(셋째)이 우는 소리에 정신이 없다. (중략)

내일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 큰 두려움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알 길 없는 내일 때문에 오늘 좀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실천을 하게도 만든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오늘 하루 세 아이를 키우기보다 지켜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일을 조금은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 자체가 행복임을 잊지 않고 말이다.

- 하얀씨의 “인생은 알 수 없어서 재미있다?!”에서


#지금 갈께


인터뷰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었습니다. 저는 ‘일과 신앙’에 대해 묻기 위해 입을 열었습니다.


“하루 일정을 메모해보니까요, 굉장히 강도 높은 일상이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사람들이 보통 정신없이 달리다가 잠시 멈추면 ‘난 지금 뭐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혹시 그런 때 신앙은 하얀씨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하루 하루의 삶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신앙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사실 학원 강사를 할 때,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었어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으니까 나중에라도 언론 쪽 일에 도전할거라고 생각했죠. 아무튼 엄마 돌아가시고 강사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처음엔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되게 싫었어요. 그때 학원에 조금 일찍 가서 QT를 했어요. 이 일이 너무 나한테 안 맞는 일이고, 지내는게 참 마음에 안드는데…… 말씀을 보면 이 일이 참 귀하고, 나에게 의미 있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어요. 그때 그걸 배웠어요. 어떤 상황이든 내가 마음에 들던, 마음에 들지 않건, 주어진 일과 시간이 하나님께는 모두 귀하다는 걸요. 집안 일도 그 깨달음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받아들이겠다라고 다짐하는 것과 실제 극한상황에서 치밀어오르는 감정은 서로 어긋날 때가 많잖아요. 육아와 가사 노동을 하시며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어요?”


하얀씨는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이 꼭 나올거 같아서 미리 생각을 해뒀는데요, 지금 생각이 안나네요.”


“괜찮습니다. 억지로 짜내지 않으셔도…….”


제가 웃으며 대답하자, 하얀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원래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넷째 낳고 집에서 산후조리할 때, 산후도우미 없이 남편이 도와줬어요, 남편이 방학이라. 남편이 해줬는데…… 남편은 아이들 돌보고 집안일 하면서 너무 힘들어하고…… 나는 회복이 늦고 친정은 기댈 사람 없고…… 정말 많이 울고 서러웠어요. 특히 친정은…… 친정 엄마 없고 아빠와 결혼 안한 남동생 둘인데 내가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든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아빠도 너무 뭘 모르고…… 디테일하게 도와주지 못하시고…… 진짜 많이 울었어요.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슬펐죠.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감당해야하는 가장 힘든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하얀씨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이게 내 일이고, 아이들 안아프고…… 이렇게 사는 것도 감사하고 좋다. 지금은 지금대로 열심히 살면, 나중엔 나중대로 살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살다가도, 남편의 친구나 동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아내들이 하는 일을 들으면 되게 초라하게 느껴져요. 다른 사람이 남편에게 “사모님 뭐하시노?”라고 하면 “집에 있다”라고 대답하죠. 대학원 신방과 나와서 그냥 집에 있다고 하면 다들 놀라요. 그런 반응을 접하다보면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이상하게 초라한 느낌이 들어요. 요즘 주변에 제 또래 주부들은 어느 정도 애 키워놓고 다들 일하러 가요. 그래서 ‘같이 육아하던 엄마들 다 가고 나 혼자 육아에 남아 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쓴 적도 있어요. 그렇다고 막상 일이 생겨 워킹맘 하라고 하면 못할 듯하기도 하지만요. 특히 애 아픈데, 약지어주고 어린이집에 맡기는거 못할 거 같아요.”


하얀씨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어졌습니다. 그때 하얀씨의 스마트폰이 울렸습니다. 하얀씨는 “집에서 전화왔네요”라는 말을 제게 하고 통화를 시작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엿듯게 된 통화 내용은 다음이 전부였습니다.


“**(막내)이 많이 울어? 한 시간째 울고 있다고? 열 많이 나나? 알았다. 지금 갈께.”


인터뷰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드라마틱한 결말이었습니다. 섭외 과정에서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통화가 힘들었고, 인터뷰는 막내가 울고 있다는 소식에 흐지부지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니, 흐지부지라는 표현은 하얀씨에게 실례가 되는 표현입니다. 여성의 일상생활에 관한 많은 글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진짜 이야기로 인터뷰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내가 가입한 까페나 밴드의 닉네임은 *****맘이다. 아이들 이름 끝자를 따서 지었다. 닉네임은 이름 대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지금 나의 정체성은 엄마이다. 엄마로서 사는 삶이 대부분이니 당연하다. 그렇지만 엄마가 곧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처음에는 엄마가 된 이후에 다시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흐지부지 지나갔다. 엄마가 되는 것은 그 전과 완전 다른 삶이다. 고민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너무 가볍게 여겼다.

지금…… 고민까지는 아니지만 엄마로서 역할에 매몰되어 자신을 잊고 살거나 나의 정체성을 아이들 키우는 것에만 두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이제 알아봐야겠다.

- 하얀씨의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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