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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영성 10장 섹스에 미친 현대인 - 기독교 영성 안에 성을 자리매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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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685 회
작성일 24-07-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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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부산대 모임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 부대 앞 오이코스

로드니 클랩, “사람을 위한 영성”, IVP, 2006

10. 섹스에 미친 현대인 
- 기독교 영성 안에 성을 자리매김하다

  한 기독교 철학자가 지혜롭게 말한 것처럼, 성과 관련하여 우리 가운데 누구도 완전히 정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성에 정당한 자리를 부여할 수 있고, 성욕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베아트리체와 성적인 아름다움

  성욕을 포용하고 품으려면 먼저 성적 쾌락을 잘 정돈하고 적절한 위치에 두는 일부터 해야 한다. 정통 기독교 영성은 성적 쾌락 자체를 하나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의 다른 모든 측면과 마찬가지로 성도 그 나라를 증거하는 데 맞춰져야 하고 그것을 보완해야 한다. 성도 하나님의 선한 질서 안에서 올바른 목적을 섬기는 데 사용될 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 창세기 2장과 아가서는 성을 기뻐하고 성적 아름다움과 욕망을 즐거워하며, 성욕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 전통 가운데 이와 같이 에로스가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변화되어 가장 아름답게 꽃피는 모습을 가장 탁월하게 그린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라고 생각한다. 단테는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를 향한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바른 질서와 균형 가운데 두어 그것을 찬미하고 더욱 풍성하게 한다.
  인간의 욕망이 욕망의 근원이자 그것의 궁극적인 실체이신 그리스도께 맞추어질 때, 그 굽은 것이 바르게 되고 희미한 것이 명료하게 되어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곳에 도달하면, 우리의 욕망도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돌아가는 바퀴처럼 질서 잡힐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참된 빛을 받을 때에만 인간 욕망의 대상은 모두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게 된다. 하나님의 빛이 비칠 때 우리가 좋아하고 갈망하는 것들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연의 상태가 된다.

성과 그 목적

  그러므로 우리는 성을 그늘에서 끌어내어 정통 기독교 영성의 빛 가운데 둘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성욕을 배제시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고 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성욕과 쾌락의 온당한 위치와 관련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없을까?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욕망이 방향을 제대로 잡아 제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독교 영성은 이에 관해 두 가지 목적을 제시해 왔다. 쾌락은 성의 최종적 혹은 최고의 목적이 아니다. 성적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생산성과 동반자 관계를 겨냥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된다.
  먼저, 섹스는 생명을 낳은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섹스를 통해 새로운 사람이 태어날 경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생명을 주는 일이다. 부부가 성교를 함으로써 관계가 깊어지고 확장되고 풍요롭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부가 더 풍성한 생명과 더 풍부한 사랑을 알고 구현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에서 부부의 존재 이유는 부부 자체를 위한 것이거나 서로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 생긴 더 풍성한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손대접, 가난한 자 돕기, 격려하기, 사회적 안정, 자녀 양육 등과 같이 생명을 주는 활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됨인데, 이는 동반자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섹스는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결혼 관계에서 동반자 의식을 북돋운다. 서로에게 헌신하고 그 가운데 안전감을 느끼는 배우자들은 섹스를 통하여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서로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다. 섹스에는 신체적․심리적인 개방과 취약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연인은 상대방이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노출해야 한다. 연인들은 그들의 의도 및 자아가 서로에게 더 깊고 완전하게 노출되게 함으로써 아무거리낌 없이 하나가 되게 된다.
  한편 기독교 영성의 주제요 대상인 하나님은 한결같이 성실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및 교회와 언약을 맺고 그들이 성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하신 분이다. 결혼한 부부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평생 헌신하기로 서약한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자기 신부인 교회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성실을 증거하는 표지인 셈이다. 기독교 영성은, 섹스가 성실성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심오하게 생명을 부여하고 동반자 관계를 심화시킨다고 본다. 부부는 다른 모든 이들을 배제하고 서로에게만 배타적으로 헌신하기로 한 만큼 그런 경계를 그은 셈이다. 부부는 공공연하게 헌신을 다짐하고 성령과 교회의 지원을 받아, 결혼식장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온갖 시련과 예기치 못한 기쁨을 통과함으로써 그 관계가 더욱 확장된다. 기독교 영성은 성실함만이 결혼 관계를 완성시킬 수 있고 성적 표현이 그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동성애의 문제

  정통 기독교 영성이 특정한 성적 행습이나 관행을 고려할 때 사용하는 틀이 바로 생산성, 동반자 관계, 성실성이라는 신학적 목적이다. 동성애 관계는 과연 이런 목적을 촉진시킬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서밖에 온전해질 수 있는 길 즉 ‘한 몸’이 되는 길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르면서도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이며, 그 관계는 참된 인간성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맺는 은혜롭고 한결같은 관계를 반영한다. 동성애라는 것은 적어도 성행위의 측면에서 양성간의 연합을 부인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주제를 반영하고 구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과 동성애 성향을 지닌 형제 자매들의 행복과 명예를 모두 보호해야 한다. 이에 관해서 세 가지 제안을 하겠다.
  첫째, 동성애에 대한 입장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충실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은 아니다. 즉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신실한 자와 배교한 자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둘째,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이 두 가지(동성애를 철저히 정죄하는 것과 전적으로 허용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 기독교 전통에 더 충실해지고 더 건설적인 논쟁을 촉진할 수 있다.
  셋째, 교회가 심각한 논쟁에 빠졌을 때, 기독교 영성의 대표적인 덕이 인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 동성애를 둘러싸고 논쟁하는 교회가 그것을 지켜보는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증거는 바로 인내라고 생각한다.

천국에서의 섹스?

  몸은 부활하고 변화되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면 섹스는 어떻게 되는가? 영원한 세계에까지 가져갈 것인가?
  성경에서는 특히 사두개인과 예수님의 논쟁에서 이와 관련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에 따르면 부활할 때에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천국에서 천사와 같이 된다고 하신다.
  성경에서는 성행위를 결혼 관계 내에서만 허용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대답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섹스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응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성교가 몸의 부활에 포함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성이란 성교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여성이나 남성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자아 전체를 규정한다. 우리는 완전하게 된 아름다운 몸으로 부활할 것인데, 그 완전함의 한 측면이 곧 남성이나 여성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말하는 바는 천사가 출산을 하지 않는 것처럼 부활한 인간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그 밖에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세계에서의 인간 관계가 성실성과 신뢰를 회복할 것이라는 점인데, 성실성은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바는, 만일 성욕이 여기서 삶과 동반자 관계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승화되고 변화된 상태에서는 부활 이후의 삶과 동반자 관계를 훨씬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은 성실성을 세우고 생명과 동반자 관계를 증진시키고 즐거움을 안겨 주는 면에서,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무한히 뛰어넘을 것이다.

성과 정의

  기독교 영성의 관점에서 육체적 몸을 중심으로 성을 조명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적 몸을 중심으로 이 주제를 살펴보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성욕을 바르게 정돈하고 균형있게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질서를 가리키는 사회적 개념이 바로 정의다. 정의는 적절하고 공평한 인간 관계의 형성과 실천을 지향한다. 크고 작은 면에서, 일상적으고 특별한 차원에서, 우리의 공동체와 사회는 정의에 기초해서 생존하고 작동한다. 올바른 관계와 그 적절한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적 몸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과 성행위에 이런 정의와 불의의 개념으로 접근했다. 그는 무질서한 혹은 부정한 섹스가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불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퀴나스는 이런 관점에서 간통과 강간을 평가했다. 또한 결혼관계 밖에서의 섹스를 불의한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그 행위로 인해 태어난 자식을 키우는데 필요한 적절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난잡한 성행위를 어머니만 자식을 돌보도록 만드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아퀴나스의 논의는 성과 정의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어떤 사회적 몸이든지 적절한 성행위를 규정하고 여러 방법으로 그것을 권장하는 반면, 부정한 성행위를 배척할 필요가 있다. 성이란 너무나 친밀하고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불의한 성은 사람을 해치고 공동체를 해롭게 한다. 고전적 기독교 영성은 교회가 성욕을 합당하게 규제하도록 안내하고, 그 중요한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된다.

올바른 ‘판단주의’

  사실상 우리 사회는 한편으로는 성적 과시나 탐닉이 만연된 모습,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통렬히 비난하는 모습으로 이분화되어 있다. 그 결과 우리 문화는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성에 미친 사회인 동시에 성을 지나치게 판단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정통 기독교 영성은 적어도 성이 도덕과 관계없다거나 모든 판단을 피할 수 있다고 가장하지 않는다. 즉 기독교 영성은 성의 문제에 접근하고 그것을 ‘다루는’ 작업에 도덕적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판단하는 일도 피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를 세울 목적으로 성을 판단하고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까다로운 춤을 추도록 부름받은 셈이다. 하나님은 높은 표준을 요구하시므로 우리는 표준을 붙들어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은혜를 붙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동시에 자비와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 안된다.
  성과 관련하여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21세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세 가지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성욕을 길들이려 할 때 인간의 의지력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성령의 능력에 의존했다. 둘째, 사막의 교부들은 성욕의 존재와 위력에 대해 정직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처럼 변덕스럽고 신비로운 성을 완전히 길들일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았으며, 욕정을 ‘어느 정도 묶을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셋째, 그들은 표준을 유지하고 판단하는 일을 피하지 않았지만, 타인보다 자신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울 목적으로 성적 훈련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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