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15.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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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작성일 18-01-05 16:27본문
[TGIM 자료/ 정리 : 정한신]
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
제5부 교회의 역할
15.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제도적 교회들-보편 교회(universal church)가 아니라 교회에 질서와 구조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종교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들-은 그 자체로는 정사들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처럼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 평신도와 성직자는 모두, 그들을 종으로 부리고자 하는 종교적 정사들의 포로가 된 것이다. 어떤 조직체든, 그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하고 소유하려 하는 악마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라오스’(laos)-평신도와 성직자 모두를 포함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헬라어-가 자유롭게 세상을 향해 사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종교 조직체 속의 어떤 권세들이 평신도의 사역을 좌절시키는지 그 정체를 파악하고 다루어야 한다.
신앙과 삶의 분리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평신도들은 의존성에 빠져 있다. 세상 속에서의 사역이라는 개념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많다 할지라도, 그들 마음 깊은 곳에는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신앙 생활이란 당연히 교회의 문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라고 여겨 왔다.
어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주일 학교 교사, 예배 위원, 교회 식당 봉사자, 안내 위원, 교회 재정 관리 위원, 성가대원 등이 되는 것이었다.
평신도 역시 직업, 지역 사회 혹은 가정을 위해 부름받은 사역자라는 생각은 귀로나 눈으로나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다. 사역이란 오직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는 것이었다.
‘부름받았다’는 뜻은 오직 한 가지였다.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 나와 같은 세대 사람들이 열 살 때 교회에서 이러한 인상을 받으면서 가치관이 형성되었다면, 그들이 주일 오전 11시의 활동과 월요일 오전 11시의 활동을 연관짓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종교 조직이라는 정사는,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주일의 신앙과 평일의 삶을 분리시켜 왔다.
신앙과 삶의 통합
앞서 말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일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아이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과 신앙을 통합시키기 위해 부모들이 끊임없이 애쓰는 모습을, 아이들로 하여금 직접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직면한 결정 사항과 문제들을 어떻게 신앙과 연관지을지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식사 기도처럼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기도여야 한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는 우리 아이들이, 어른들이 직업이나 교회 밖의 다른 활동을 통해서 하는 사역이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봉사자들이 하는 사역과 똑같은 인정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 사역의 모든 면-예배, 교육, 봉사, 교제 등-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모든 구성원을 구비시키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의 시작점은 예배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따르는 예배 의식에는,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라는 메시지가 이상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모여서, 먼저 우리의 잘못과 실수를 고백한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고, 회복되며, 말씀과 성례를 통해 새로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인도해 주시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이제 섬김을 위해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내진다. 그런데 예배 의식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바로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갈 준비를 갖추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를 좀더 강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점점 많은 교회들이 예배 의식 중에 창조적인 방법을 통해, 평신도 사역자 승인식이나 임명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예배 시간 중에 교회 직분자나 주일학교 교사를 ‘임명’한다. 심방이나 전도를 감당할 평신도들을 그렇게 임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직장이나 가정이나 지역 사회 등 세상 속에서 평신도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공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는 직장 사역을 인정해 주기 위한 방법으로, 특정한 주일을 정하여 그 날에는 모든 사람이 다 직장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예배에 참석하게끔 한다. 그리고 그 날은 예배 전체가 직업을 통한 제사장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복음 안에는 안전, 지위, 생활 양식이라는 이 시대 권세들과 직업, 제도, 정부라는 이 시대 정사들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결정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강단은 우리 사회의 악마적 세력들을 폭로해야 하며,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은 우리가 하는 일에 좌우되지 않으며 사실 이미 보장되어 있다는 이 놀라운 소식을 선포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예배 의식 참여를 장려해야 한다. 목회자와 예배 의식 집례 책임을 분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평신도가 쓴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문에는 기도집 같은 데서 뽑은 멋진 기도문과는 달리, 평신도들의 마음에 직접 와 닿을 수 있는 진실한 감사와 관심의 표현이 담긴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평신도 사역의 전부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평신도의 많은 사역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이유로 나는 평신도가 예전 가운을 입는 관행에 반대한다. 예전 가운을 입으면, 그/그녀는 예배 중에 다른 평신도들과 구분이 된다. 이 때 그 가운이 기능상의 차이 이상을 상징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 관행은 예배 중에 하는 사역이야말로 평신도 사역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사역이라는 생각을 심어 줄 위험이 있다.
교회의 교육 사역은 평일의 세계를 위해 평신도를 구비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을 제공한다. 교회 교육을 일 주일에 주일 아침 한 시간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저녁 공부 프로그램, 지원 소그룹, 점심 식사 모임, 아침 식사 모임, 회사 식당 모임 등, 다양한 종류의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주말 수련회는 성인 교육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한다.
모임을 통해 얻은 경험에 따르면, 평신도들은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에 대해 가장 절실히 도움을 받고 싶어한다. 따라서 모든 교육 프로그램은 신앙을 표현하는 법, 변화를 일으키는 법, 정치 활동을 조직하는 법, 상담하는 법, 남의 말을 잘 듣는 법, 소그룹을 잘 운영하는 법 등 구체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과목들을 제공해야 한다. 은사 확인은 누구나 반드시 들어야 할 과목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재능 즉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으며, 이 은사를 개발하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데 중요하다. 평일 세계와 신앙을 연결하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은사 확인 과정이 필수적이다.
모든 교회는 구성원들에게 지원 소그룹에서 교제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야만 한다. 소그룹은 기도, 책 나눔, 주제 토론, 교제, 프로젝트, 성경 공부 등 다양한 활동을 중심으로 조직될 수 있다. 하지만 소그룹의 우선적인 목적은 구성원들이 삶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사역을 지원하도록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교인들의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인정하는 수단으로 커다란 교회 게시판을 사용한다. 교인들과 관계된 일과 업적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신문에서 그 기사를 오려 내어 게시판에 붙여 놓는다. 교회 인명록에는 모든 교인의 직업도 기록된다. 여기에는 단지 ‘보수를 받는’ 직업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한 자원 봉사 활동이나 학생들의 학년도 기록된다.
어떤 교회들은 모든 사람은 다 사역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간단한 표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내가 방문한 어떤 교회에는, 외부와 통하는 문마다 ‘사역자 출입문’이란 표식이 붙어 있었다. 그 교회 회보에는, 모든 교인들 이름 앞에 ‘사역자’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다.
교회 소식지를 통해,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어떤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 알려 주는 교회들도 있다.
우리 교회에서는 연초마다, 평신도들에게 사순절 묵상집에 실릴 간단한 묵상의 글을 적어내라고 요청한다.
지역 교회는 예배, 교육, 봉사, 친교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laos)을 해방시키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주일과 월요일 사이에 다리를 놓게끔 돕는 일에서 교단이 해야 할 역할은, 세상을 향해 신뢰성 있는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교단 차원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성명서를 내거나, 세상 문제에 대해 입장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세상 기관들과 맞서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변호하려 할 때 그 현안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큰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천명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 성명서 내용이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파악하고 있다거나 모든 측면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못하다면, 세상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사회적 성명서, 입장 선언문 등이 대개 소수의 성직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러다 보니 작성자의 무지나 편견이 쉽게 드러나 보이는 성명서들이 발표될 때가 많았다. 교회의 선언서가 불신을 받으면, 신앙이란 일상적인 삶과 무관하다는 평신도들의 생각은 더 굳어질 뿐이다.
그러나 교단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이들-평신도들_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 문제는 쉽게 바로잡을 수 있다.
그렇다고 교회가 특정 문제에 대해 평신도 대다수의 여론을 그저 따라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그러한 여론이 교회가 견지하는 성경적·신학적 입장과 분명한 마찰을 보일 경우, 교회는 평신도들의 생각을 거스르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만일 성명서에 현안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그에 관련된 분명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면, 평신도는 평일 세상 속에서 그것에 관해 진지하게 고려하게 될 것이다.
교단 차원에서 교회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는, 어떤 문제에 관해 편견 섞이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믿음직한 원천이 되어 주는 것이다.
다만, 많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 교회가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신학교와 지역 교회의 분리
지역 교회가 평일 사역을 위해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훈련소라고 할 때, 그 코치 격인 목회자들이 그 일을 하기에 충분히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나 내 의견으로는 신학교들 역시 학술 기관이라는 정사에 사로잡혀서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일을 위해 목회자를 충분히 준비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 신학에 대해 얕보는 시각을 갖고 있기까지 하다.
우리 신학교들은 그들의 최종 목적을, 안수 받은 사역자들을 학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라고만 본다. 사실은 그 수준을 넘어, 평신도들을 세상 속에서의 사역자로 구비시키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인데도 말이다.
평신도에 관계된 신학은 신학자의 주된 임무에 딸린 부수적인 것 정도로 여겨진다. 이는 신학자들이 사실상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무심코 드러내는 셈이다-직업적인 봉사자들만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자체를 유지시켜 가는 하나의 내부 지향적 정사, 바로 그것이다.
최근 들어 많은 신학교들이 평신도들을 학생과 강사로서 받아들인다. 그런데 평신도를 위해 개설된 과정들은 대개 교회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게다가 많은 경우, 그러한 과정을 개설하는 실제 이유는 신학교의 어려운 재정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어떤 신학교들은 가끔씩 평신도 강사를 초빙해, 학생들과 교수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관점, 필요, 관심사들을 접해보게끔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러한 강의는 빈도수도 적고 일과 시간 이후에 개설되며 대부분의 교수는 거기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결국 평신도 신학이란 교회 기관의 부수적인 사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낳는다. 평신도 신학이 정규 교과과정의 일부로 대우받지 않고는, 학생들은 자신의 사명이 교회를 넘어 세상을 향한 사역을 위해 평신도를 인정하고 구비시키고 지원하는 것임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똑똑한 이들을 이용해 결국 종교적 정사를 섬기는 신학을 고착시키는 것, 이는 순전히 악마가 고안해 낸 천재적 전략이다.
신학교와 지역 교회의 통합
만일 제도적 교회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비시키려는 비전을 갖는다면, 우리의 신학교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할까? 성직자를 훈련시키는 일은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 내가 일상 생활 속에서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학, 성경 지식, 상담, 의사소통 그리고 공동체 형성에 전문성을 갖춘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지역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 말씀과 성례, 성인 교육, 지원 소그룹, 나의 소명에 대한 지속적인 인정 등을 통해 사역을 위한 힘을 지속적으로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신학교가 평신도를 구비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그 목적을 위해 지역 교회 목회자들을 훈련시키려 한다면, 신학교의 커리큘럼과 철학에는 상당한 변화가 따라야 할 것이다. 사회의 세속적 기관에서 사역하는 평신도를 키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신학교라면 평신도와 함께 그리고 평신도를 위해 신학을 하고자 할 것이다. 문화 속에서 우리 모두가 직면한 이슈와 딜레마에 관해 평신도와 신학자가 함께 모여 집중적인 공동 연구를 한다면, 이 얼마나 고무적인 일이겠는가?
제도적 교회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구비시키는 일을 자신의 사역으로 삼을 때, 신학교는 참으로 커다란 흥분이 약동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길은 분명하다. 먼저 평신도들이 종교적 제도주의의 감옥 문을 박차고 나와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사역을 주장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한 이 일은, 오늘의 세계 속에서 평신도를 통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줄 아는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속에서의 사역을 위해 해방될 수 있고 또 해방되어야 한다.
(2018년 1월 5일 요약 정리/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정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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