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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영성 9장 예수와 기괴한 인간 - 땅에 속한 기독교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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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1,978 회
작성일 23-09-0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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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람을 위한 영성
(로드니 클랩, IVP, 2006)

9. 예수와 기괴한 인간 … 땅에 속한 기독교 영성

  예수님도 오줌을 누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몸에 대한 기독교 영성을 다루고 있다. 몸은 귀하지만 동시에 지저분하다. 배설과 상처를 우리 몸은 지니고 있다. 영성이 만일 천사처럼 되는 것이고 지저분하고 연약한 몸을 무시한다면, 피와 땀과 배설물을 믿음의 삶에서 떼어놓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기독교 영성은 몸을 강조한다. 그것은 성육신의 진리, 곧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면서 참 사람이었다는 진리를 무시할 수 없다.
  몸은 계속 변하고 그런 몸의 변화는 그 몸을 가진 우리가 영원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한다. 털과 가죽이 떨어져 나가고 액체와 노폐물이 방출되는 것은 우리가 천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 죽을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달리 말하면, 몸은 기괴한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기괴하다는 말은 어중간한 상태에 끼어 있는 물체, 어떤 범주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것, 애매모호해서 골치 아픈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놀라운 존재로서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기괴한 존재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꿈꾸고, 기도한다. 그래서 동물 및 나머지 피조물과 다른 별개의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신과 짐승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한계를 가진 피조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짐승과 천사 사이에 있는 중간 존재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삶과 몸과 자아가 기괴한 특징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닮고 어떤 면에서는 동물과 비슷한 우리는, 참으로 일관성 없고 신비로우며 자기 모순을 안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중간 상태로 오셔서 그것을 포용하셨다. 그렇다면 참된 기독교 영성은 그런 현실에서 달아나거나 기괴한 면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주방뿐 아니라 화장실과 병상에서도 존재하는 영적 피조물이다. 기독교 영성은 우리 눈의 광채 뿐 아니라 손톱 밑의 때까지 포괄하는 영성이다.

진흙 속의 천국

  예수님은 용변을 보셨을까? 그리고 이를 어떻게 처리하셨을까? 이와 관련해서 영지주의적 대답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몸의 정당성과 선한 속성을 긍정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그 구성요소와 기능을 거부한다면, 이는 일관성 없는 태도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용변 기관이 더러운 자루와 부패의 빨대가 아닌 ‘자연스러운 액체를 깨끗이 처리하기 위한 출구’라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유대-기독교적 태도에 더 가까운데, 이는 유대인이 화장실을 사용한 다음 암송하는 아침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당신은 지성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몸속에 많은 구멍과 빈 공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 중 하나가 열리거나 이들 중 하나가 막히면 생존해서 당신 앞에 (단 한 시간이라도) 서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육체를 치유하시고 경이로운 일을 행하시는 당신을 송축합니다.”

  이 기도에 따르면 소화기관과 용변기관은 ‘지성으로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다. 어떤 논평가는 화장실의 변기가 하나님의 보좌와 나란히 놓여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화장실의 사용과 같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땅에 속한 삶을 위하여

  현대 도시인은 창조 세계 및 우리가 몸담은 ‘생명의 순환’과 동떨어져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주는 창조세계의 그물망으로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영적 훈련인 셈인데, 이는 하나님 아래서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를 수용하는 훈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인식을 개발할 수 있을까? 우리도 먹고 배설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화장실 청소를 권한다. 이는 자그마한 기독교적 봉사이며 나와 내 사랑하는 식구가 죽을 몸을 가진 존재임을 상기시켜 준다. 일회용 기저귀보다 헝겊 기저귀를 사용함으로써 더러운 천을 직접 헹구는 일을 통해 우리가 현실에 뿌리박은 존재임을 상기하고 우리 아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또한 동물들과 함께사는 방법도 있다. 동물들은 인간에게, 계획을 짜고 계산을 할 때 인생이란 하루씩 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통제나 조작이 불가능한 것임을 무시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즉 우리도 피조물일 뿐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정원 가꾸기, 육체 노동, 환자용 변기 청소, 환자 목욕 시키기 등을 통해 우리의 육체성과 이 땅의 피조물과의 하나됨을 인정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보기까지

  우리가 기괴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과 이웃과 원수와의 관계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전통적 기독교 영성은 우리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늘 지적해 왔다. 그리고 우리의 덕이 다른 사람들의 덕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지적해 왔다. 우리는 타인의 죄에 대해 혹독한 반면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거리를 찾는 경향이 있다. 자기를 과장하고픈 충동은 늘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원수를 규정하고 그를 마귀하고 생각함으로써 더 큰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은 천사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남을 판단하는 것을 극히 경계하셨고 바울도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자만과 자기 기만을 경계했다.(두 수행자 이야기-책 216페이지)
  오랜 세월 기독교 전통은 참된 성인은 자기를 남보다 더 낫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며, 가장 존경받는 성인과 가장 극악한 죄수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 종(種)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악과 파괴성을 지닌 죄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체스터턴은 그의 책의 주인공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혹은 나쁘게 될 소지가 있는지를 알기까지, 이처럼 잘난 체하며, 남을 깔보고 ‘범죄자들’을 저 멀리 숲 속에 사는 원숭이 취급할 권리가 자기에게 없음을 깨닫기까지, 저급한 놈들 운운하면서 더러운 자기 기만을 일삼는 모습을 모조리 없애기까지, 바리새인의 기름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자기 영혼에서 짜내기까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어떻게든 범죄자인 자신을 붙잡아 감금하는 것이 되기까지는, 아무도 진정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의 허물만 보지 않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뒤틀리고 기괴한 죄의 얼룩을 간파하게 될 때에야 이웃 및 원수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영성과 방귀

  우리가 고상하고 얌전해지려고 최선을 다해도, 때로 우스운 짓을 하는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도 하나의 영적 훈련이다(예컨대 방귀). 그런 경우에는 유머 감각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스도인은 자칫하면 까다로워지기 쉬운데, 그런 모습은 천사처럼 되려는 것이지 사람다운 존재가 되는 길은 아니다. 우리는 투박한 피조성을 끌어안아야 한다.
  루터는 “나는 마귀를 대적하는데 종종 방귀로 그를 쫓아버린다”고 했다.
  중요한 점은, 몸은 선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고 별로 고상하지 않은 특징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일부와 그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천사처럼 되고 천사의 영성을 추구하려는 주제넘은 태도다.
  전통 기독교의 영성은 땀을 흘리고 방귀를 뀌고 트림을 한다. 몸은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있으며, 장차 변화된 모습으로 영원한 세계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몸의 결함과 아름다운 성화의 상징

  그런데 우리의 투박함과 기괴한 속성이 영원한 세계로 이어질까? 우리가 소망하는 부활된 몸에는 눈뿐 아니라 소화 기관과 성기까지 달려있을까? 주류 기독교는 그것을 긍정한다.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 생선을 섭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몸이 경이롭고 아름답기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몸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상처나 질병이나 절단된 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전통 기독교는 부활시에 이 모든 것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시 창에 찔린 예수님의 상처와 그의 손의 못자국과 같은 것은 부활시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는 결함이 아니라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보여지는 상징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순교자의 상처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상처’이기 때문에 부활시에도 그대로 남아 추한 것이 아니라 존귀한 것으로, 그들의 아름다운 용기를 밝히 드러낼 것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발 씻기에 대한 묵상

  모든 몸의 지체가 귀천이 없지만 대체로 발은 더럽게 되기 쉽고 늘 낮은 위치에 있는 천한 지체로 여겨져 왔다. 이런 발을 씻어 주는 행위는 취약점을 드러내는 행위요 상호 의존 관계를 확인하는 의식이다. 또한 신발을 벗는 행위에 대한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이런 행위는 무력함과 슬픔, 가난, 투옥 등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영적 무력함과 가난함을 모세가 신발을 벗었던 장면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 발을 돌보는 행위는 가장 기본적이고 아름다운 행위이기도 하다. 투터는 육신의 몸과 그리스도의 영적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몸의 한 지체가 그 전체를 구현한다고 주장했다. 즉 한 지체라도 아프면 전체 몸이 그 지체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그 지체가 적당한 보살핌을 받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영으로뿐 아니라 몸으로도 서로를 보살핌으로 새 예루살렘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이 되자. 거기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잔칫상 아래에서 두 발을 뻗고 편히 쉬게 되리라.


< 일상생활의 영성에 관한 기도문을 만들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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